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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어려운 시대, 힘겨운 시간을 의롭게 사신  金大中 선생” 이란 견해를 가진 사람을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가 만난다면 그분은 이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자신의 노벨 평화상 수상의 영예를 위하여 적장에게 5억여불을 갖다 바쳐서 핵폭탄을 개발하게 만든 자를 “의롭다”고 평가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신병자로 취급할 자격이 있겠는가?  이런생각을 해 보면서 다음글을 올려본다.

제2연평해전 8주기 맞은 故 박동혁 병장 어머니:“나라 지키다 갔지만 대통령은 월드컵 구경갔던 나라”
  

   “아들의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 경기장에서 빨간 넥타이를 매고 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다 죽은 우리 아들은 바로 김대중이 버린 군인입니다.”   29일 오전 10시 전쟁기념관에서 거행된 ‘제 2 연평해전’ 8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故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는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있었다.  

지난 2002년 6월 29일. 온 국민이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 북한의 경비정 2척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기습공격을 강행했다. 우리 군은 31분간의 사투 끝에 북한군의 총탄에 피투성이가 되고 숨통이 끊기면서도 방아쇠를 놓지 않고 NLL을 사수했다. 북측 경비정도 30여명의 사상자를 낸 채 도주했다.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을 포함한 5명이 교전 중 전사. 교전이 끝난 뒤 의무병이었던 박동혁 병장(당시 상병)은 부상을 입어 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그는 두 다리가 잘려나가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뒤 3개월 후 6번째 전사자가 됐다.  

박동혁 병장 어머니는 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며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다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더라... 그 장면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이곳이 저리고 아프다”며 가슴 한쪽을 손으로 두들겼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을 이 나라의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모두 외면했다. 영결식조차 오지 않았다. 박동혁 병장 어머니는 “나라를 지키다가 죽은 이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지켜주지 않더라...”며 당시 힘든 시간을 토로했다.
이어 “효순이 미순이 사고에 온 국민이 촛불을 들고 나왔지만 나라를 지키다 죽은 6명의 아들들에게 촛불 한번... 단 1초도 들어준 적이 없었다”며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우리 해군이 이렇게 희생을 당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북한이 쏘기 전까지 먼저 총을 쏘지 말아야 한다”는 교전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군은 그 당시 북방 한계선을 침범한 적에게 먼저 총을 쏠 수도 없었다. 故 박동혁 병장 어머니 역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총을 먼저 쏘지 말라는 것은 패전하라는 의미가 아니냐?”며 비통해했다.  

한편, 이날 기념식은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헌화와 분향, 부상자 이희완 대위의 경과보고, 인천오페라 합창단 및 해군 군악대의 기념공연, 총리 기념사 순으로 진행됐다. 정 총리는 기념사에서 "정부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께 최대한의 예우를 해 드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며 "아직 만족할 만한 보상을 못 해 드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이 문제를 풀어가고자 한다"고 전했다.  

이어 "참수리호에서 산화한 여섯 분의 호국영령들은 우리 함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부활해 차례로 조국의 바다를 지키고 있다"면서 "지난해 6월에는 윤영하 소령의 이름을 딴 함정이 실전에 배치됐고 한상국함, 조천형함, 황도현함, 서후원함도 취역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박동혁함까지 진수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