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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침략 만행사건과 관련하여

2013.8.16

 


일본의 아베총리를 위시한 극우정치인들의 일제침략 만행사건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우리를 분노케 하고 있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아래에 세 게시물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중에는 더 많은 선남선녀가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반일교육을 받았습니다. 1971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도 “반일감정”에 사로잡혀 있어서 예쁜 일본 여성이 말을 걸어도 피하기만 하였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따라서 어느 일본청년이 “To the Pride of Korea”라면서 성탄절 카드를 저에게 보내준 적도 있습니다. 여하튼 그 후 “반일교육”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고 점진적으로 일본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유학의 큰 수확이었습니다.

 

대학에 교편을 잡고 1979년에 처음 일본을 방문(일본화학공학회 초청으로 오사카회의에서 논문 발표차)하여 나고야, 오사카, 교토를 둘러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친절, 청결, 질서, 정확성에 놀랐습니다. 그 후 국제학술회의에서 많은 일본 교수, 대학원생들을 만났고 좋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나 일본에서나 교육, 특히 인성교육이 잘 되어야 합니다. 좋은 교육환경 하에서는 아베 같은 사람이 득세할 수 없습니다. 선동정치가가 매장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최창균 2014.01.29 09:53

    일제시 만행 사진모음
    대한민국 국민이여 ! 전 세계로 메-일 보냅시다
    - 전세계 배포용 -

     

      우리의 선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군가를 부르면서

      일본군의 잔학하고 악랄하고 무자비한 총칼에 순직 하였습니다.

       

      일본은 1880년경 부터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일본군을 주둔시켜

      각가지 만행을 자행한 후 결국은 나라를 송두리째 빼았아 점령하드니 그래도 모자라서 또다시 독도는 자기들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침략행위는 없었다고 강변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한국강점 36년 동안에

      자행한 일본의 만행을 들추어 세계만방에 고발을 합시다.

    
    ※ 만행사진에 심장이 약한분은 주의가 필요
    
    
    
    
    광복 독립군과 독립투사, 양민들이 잔학한 일본군에 붙잡혀 온 집결장이다.
    일본인에 체포 되어 어디론가 이동하기위해 대기 하고 있다.
    손을 뒤로 묶인채 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다.
    1928년 이때부터 일본군은 악랄하고
    
    잔혹한 살육의 강도를 높인다.
    
    
    
    독립투사 또는 양민을 학살 하기 위하여 일본도를 손질하는 일본군인 놈들.
    
    
    
    독립군, 독립투사를 처형장소로 가기 위해 트럭에 싣고 있다.
    
    
    
    일본군놈의 장칼에 목이 떨어지는 우리의 독립군 
    
    
    일본군 놈들에 끌려 가는 독립군 의병장
    
    
    
    무기도 빈약하고 의복도 남루 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놈들을 해 치워야 겠다는 의기 투철한 의병대들 모습.
    
    
    
    총검으로 처형하기 위해 담장 쪽으로 몰고가고 있다.
    이미 총검에는 선혈이 묻어 있다
    
    
    
    체포된 독립군은 결국 처형을 당했다.
    칼로 목을 칠 때 넘어 가지 않도록 팔을묶고 뒤에서 당기고 있다.
    일본인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간을 촬영한  것이다.
    
    
    
    개를 풀어 인간 사냥을 하는 모습이다. 

     결국 총살로 생을 마친다. 독립군 간부의 처형 장면이다. 목을 치기전 뒷편 일본군의 웃는 모습을 볼 때 분노보다 일본의 양심과 목적을 혼돈하게 한다 독립군 병사를 작두로 목을 짤라 공중 높이 매달아 놓았다. 추운 겨울 날씨로 오랫동안 매달아 경각심을 주기위해 인간이

    할수 없는최악의 형벌을 자행 했었다. 죽은시신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화장을 시켰다. 온 마을이 유해로 가득하고 일본의 원폭 피해처럼 보인다. 일본 토벌군인 들은 사정없이 민간인 까지 처형 했다. 떨어진 목을 손에 쥐고 미소까지 보이는 것은 사람 목숨을 장난삼아

    학살하는 것을 증명 할수 있는 장면이다. 일본놈 들은 포로가 된 민간인 과 독립군을 사정없이 목을 잘라서

    담장 밑에 상품처럼 진열하여 두고 있다.

     

    독립군 용사들은 죽어서도 한결같이 한을 품고 눈을 감고 있다. 생매장 되어지고 있는 양민들. 일본놈들의 잔혹함을 엿볼수 있다. 이렇게 돌아가신 분들은 숨이 끊어질때 까지 대한독립을 원했다. 일본군 의사 간부가 세균 생체 실험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마취도 없이 손을 묶고 해부하고 있다,

    복부에 창자와 내용물이 나오고 일본인들은 입 마스크하여 지켜 보고 있다. 일본군들이 처형하기전 목에 수건을 감아놓은 것은 칼이 목을 치기전

    잘린 몸통에서 품어 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수건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 손을 뒤로 묶고 칼로 살육하는 장면. ↑ 지독한 고문. 하의가 벗겨지고 혹독한 고문뒤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 우리 한국인들은 나무 벌목 과 혹독한 노역을 시키고 난뒤

    결국 모두 처형되었다. 총검으로 처형당하는 모습이다. 일본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장면. 천벌을 받을 놈들이다. 일본도로 목을 자를려고 고개를 새우고 있다. 잔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 처형하는 순간. 칼이 지나가 목이잘린상태. 독립군의 목은 이미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 순간. 처형후 두병사의 자랑스런 자세로 기념찰영. 죽음을 기다리는 양민들 일본인 감시아래 손이 뒤로 묶여져 있다. 생매장된 양민들 가족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있는 장면이다. 죽은사람의 표정에서 일본인의 잔혹한 흔적을 엿볼수 있다. 처형을 기다리는 소년투사.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잔악 무도한 일본군들이 대량 학살 하고난 뒤 처참한 광경. 교랑에 즐비한 시체들 중에 뒤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과 애국지사의 가족들이 시신을 찾기 위해 살펴 보고 있다. 잔혹한 살육 장면(1942) 옷이 벗겨진 여인은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목은 짤라져 있고 얼굴 모습은 등뒤로 돌려 져있다. 강간후 총으로 치부에 발포한 장면.엉덩이에 총상구멍이 선명하게 보인다

    여성의 음부를 일본군이 가려 촬영 하였다.

    더 이상 해설이 필요 없는 사진이다. 한국 여인들을 찾으러 다니는 일본군들. 눈에 띄는 여성은 모두 끌고가 강간후 살해했다. 이런 여성보급을 당담하는 일본군은 항상 여러명의 한국여성을 데리고 다녔다. 수장된 시신들. 손을 뒤로 묶고 저수지에 수장시켰다. 살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 에게는 긴막대기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곳으로 몰아 넣어 집단으로 무차별 학살 한 후 불 태웠다. (1937년)허탈한 아버지 죽은 어린 자식 시신을 물건 처럼 들고 있을 만큼 어이가 없는 학살 이였다. 여성의 옷을 벗기고 마구 살육당 했던 참혹한 현장. 모래 사장에 뒹굴고 있는 시신들. 일본군이 1943년 후퇴 하면서 최후 발악을 자행한 흔적들이다. (1938년)죽이는 방법 시범 실습 현장 장면이다. 강변에서 총검으로 살육하는 실습을 자행하고 있다. 이런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동원된 일본군인들은 관심 깊게 보고 있다. 살이 떨리는 공포.

    두사람의 양민이 포로가 되어 일본인에게 두손 모아

    애원하는 모습이 보이고 일본군은 무엇인가 소리 치고 있다. 산더미 같은 시체. 여성의 하의가 벗겨져 있고 하체에선 선혈이 흘러 나오고 있다. 집단 학살. 가슴에는 죄명아닌 죄명을 달아놓고 사살했다. 얼굴의 선혈을 보아 총살이다. 이성 잃은 일본군. 일본군은 여성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장난하고 있다. 전쟁과 관계 없는 일이다. 일본의 숨은 근성을 엿볼 수가 있다. 부녀자 강간. 일본 병사의 손을잡고 애원하는 모습입니다. 이미 젖가슴이 드러나고 반항을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수난이다. 수장된 시신. 손을 뒤로 묶고 못에 수장을 시켰다. 막대기는 위에서 누르고 있다. 살기 위해 얼마나 바둥 거렸는지 짐작이 간다. 갓난 아기의 죽음. 인형처럼 뒹굴고 있는 아이들의 시체. 일본 놈들은 전쟁으로 이성을 상실 했었다.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 잡아온 양민들을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부녀자 집단사살. 엄마와 함께 도피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흐르는 선혈이 계단을 적시고 있다. 집단 사살 현장. 오른쪽 일본군이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부녀자 절규. 하체를 강압에 의해. (차마 설명 할수 없음) 손에 실반지가 보인다. 단란했던 가정을 등지고 결국 정신대로 갈것이다. 여성이 입을 벌리 있는 것은 한숨 뿐이다. 작두로 처형 직전. 작두로 목이 곧 짤러 질것이다. 작두로 목을 짜르고 있다. 작두 앞에 잘려진 목이 하나 보인다. 작두로 수없이 잘려간 양민들의 모습. 일본군이 장난 삼아 목이 잘린 시체의 손을 자신의 잘린 목부분을 가르키게 해놨다. 저런 끔직한 일은 일본군에겐 단지 장난에 불과했다. 일본 관동대학살 (1923년) 1923년 일본 관동일원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10여만명이 사망 했다

     

    민심이 극에 달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인 폭동설을 조작 유포시켜 한국교포 약 5천명을 피살 하였다.(몽둥이, 죽창 으로 학살) 창고에서 독살. 엄청난 시체가 당시 혹독한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노역자가 운송을 마치면 죽음 이다. 부릴때로 부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이렇게 3명의 의병 총살 현장.

     

    영국여행가 비숍 씨가 촬영한 것이다. 영국왕립 박물관에 소장된 자료. 서대문 형무소뒤 야산 공동 묘지에서 독립 의병 3사람이 총살 당하는 모습이다. 일본군들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기로 한것인다. 어린아이들 까지 죽여 불태워 졌다.

    온갖 수단으로 자행한 행위는 사진속에는 피할수가 없다. 독립 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된 유해들. 잔혹한 행위로 소리없이 죽은 영혼은 무엇으로 위로할 것인가? 선량한 양민을 단 칼에 처형하는 지구상에 하나 밖에 없는 야만족속들이다. 죽음 앞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당당한 독립투사. 목을 베어 매달아놓아 참아 볼수 없는 끔직한 사진이다. 길거리에서 일본 군인 놈에게 강간을 당하고 맞어서 내장이 나온 상태. 일본군 종궁 위안부(정신대)의 거실 내부 - 이곳에서 일본군은 성욕을 채웠다. 근심이 가득한 한국여성.

    일본군 위문품을 강제로하는수 없이 만들고 있다.

    이곳에서 강제 노동을 하면서 일본군의 노리게로 끌려 갔다. 종군 위안부에 들어 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 병사들. 종군 위안부의 음부를 노출하게 하여 찍은 사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막사로 실려가는 위안부. 위안부의 휴식시간. 일본병사 근무지에도 불려간 종군 위안부

    
    누구나 이 메일을 자기 블로그, 카페에 올리고
    이 사진을 메일로 의무적으로 다른 여러분에게 발송해서
    일본의 잔인함을 전세계가 알게합시다
    
    꼭 꼭 전 세계가 알게합시다.
    너무 분합니다.

    =호연 마을=
  • 최창균 2014.01.29 10:04

    난징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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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대학살.

    난징 대학살(중국어 간체: 南京大屠杀, 정체: 南京大屠殺, 병음: Nánjīng Dàtúshā, 일본어: 南京大虐殺 (なんきんだいぎゃくさつ), 영어: Nanking Massacre)이란 중일 전쟁 도중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5만 내지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1]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1939년 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를 난징 대도살이라 부르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난징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그래서 아시안 홀로코스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 최창균 2014.01.30 10:19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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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왜구들의 활동 범위
    왜구들의 약탈을 그린 회화 (16세기)

     

    왜구(倭寇, 영어: Japanese/dwarf pirates)는 통상적으로 고려원나라의 연합군이 일본 열도 침략에 실패한 이후인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중국 대륙의 연안부나 일부 내륙 지역을 약탈하고 밀무역을 행하던 무리를 가리킨다.

    한반도중국 남부와의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대마도, 이키 섬 주민과 규슈 주민들은 고려원나라 침략이후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통상로까지 막히자 복수심과 생계를 위해 해적질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왜구의 시초이다. 이처럼 초기 왜구의 구성원들은 가난한 규슈의 농민들이었다.[1] 이후 왜구는 거대한 밀무역 세력으로 성장하여 조직화되고 거대화 되었다. 이는 배후에 밀무역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규슈시코쿠 일부 지역 영주들의 후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에는 한반도중국 남부 해안가를 따라 단순 약탈 위주로 활동하였으나 후에 노예 매매와 밀무역 등으로 큰 이익을 남기는 등 대규모로 기업화 되어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하게 된다.

    후기의 중국남부 해안 왜구 상당수는 중국인으로 구성된 해적이 많았다. 14세기부터 16세기에 왜구가 특히 극성을 부린 것은 당시 일본 내부적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사실상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중앙의 통제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한 것을 시작으로 후에 들어선 무로마치 막부는 밀무역으로 인한 이익 때문에 이를 눈감아주었고, 쇼군가의 힘이 약해 지방 영주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 후에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는 지방 영주들을 통제하여 왜구가 거의 근절되었다. 이 때 왜구가 감소하는 주 이유 중 하나는 막부의 적극적인 왜구 근절 노력도 있었지만 동남아시아를 통해서 유입된 서양세력과의 무역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규슈 영주와 막부가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이들의 활동 시기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사이에 가장 심하였고,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삼국 시대에도 왜구가 신라를 침입했다고 하는데 이 때 침입한 왜구는 가야와 왜의 연합군으로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왜구와는 성격이 다른 왜국에서 정식 파견한 정규군이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신라구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하나,[2] 확인된 바는 없다.

    주된 약탈물은 식량이었으며 지방에서 조세를 거두어 한성으로 올라가는 공선 등이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 그 규모는 100척에서 500척까지 이르는 선단을 이루어 연안 마을을 습격하는 형태였으니 때로는 내륙 깊숙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1223년부터 1392년까지 169년간 총 529회의 침입이 있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왜구침구 기사가 312건이 나온다. 이 때문에 한국에선 현재까지도 왜구라는 명칭은 일본인을 폄하하는 명칭 중 하나이기도 하다.

    명나라 시대에 남방과 주변 지역을 통제하지 못하여 왜구에 의하여 자주 점령되었다. 18세기 무렵 청나라가 들어서며 푸젠성, 대만, 베트남 인접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여 외적을 방비하게 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왜구의 침략이으로, 이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고 국가 기반은 흔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