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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육적(陸績)을 생각하면서 ---

 

 

지난 설날 전후하여 다시 건강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하여 산보도 제대로 못하여 우리 59회 홈페이지에 글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실망이 컸음은 물론 거의 두문불출 하였습니다. 때문에 지난 3개월 동안 서울대 명예교수연구실에도 나가지 않아 다시 체중이 3 kg 정도 증가되었습니다. 오늘 장모님 생신연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 동안 열지 않은 이메일이 5000개가 넘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이메일 점검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였습니다. 지난 주에는 김유영 교수가 이메일을 열어보라고 전화까지 하였습니다. 물론 우리 59회 홈페이지도 거의 열지 않았습니다.

 

어제 5959회 동창회에도 참석하지 못하여 마음이 싱숭생숭하여서인지 밤을 지새웠습니다. 작년에는 516일에 밤을 지새웠습니다. 이와 같이 밤을 지새운 것은 지난 6년여 동안 봄, 가을에 저에게 일어난 기현상입니다. 금년부터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랬는데 ---

 

지난 달부터 케이블 TV를 통하여 드라마 하나를 꾸준히 보고 있습니다. CHING 방송이 매주 ~금요일까지 진행하는, 중국 국가청렴위원회가 극찬했다는 역사 드라마, 염석전기(廉石傳奇)로 중국의 삼국시대 오나라의 청렴한 관리 울림태수(鬱林太首) 육적(陸績) 이야기입니다. 육적은 효자로도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부정부패, 비자금 소동을 근절시키기 위하여는 육적과 같은 인물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따라서 웹에서 자료들을 발췌하여 아래에 실었으니 참고 바랍니다.

 

저는 아마도 내일부터는 다시 산보도 꾸준히 하면서 점진적으로 건강을 되찾게 될 것 같습니다. 주로 저녁 8시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여 왔으니 30분 후에 잠들게 되면 좋겠습니다.

 

친구들 모두, 우리의 홈페이지도 더욱 건강하기를 바라면서 ---

 

 

최창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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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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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적(194년 이후 ~ 225년 이전)은 중국 삼국 시대 오나라의 관료·학자로, 오군 오현 사람이며 자는 공기(公紀).

 

생애

 

육적이 6살 때, 구강에서 원술을 뵈었다. 원술이 귤을 내왔는데, 육적은 그 중 셋을 품었다. 육적이 떠날 때, 원술에게 배례를 하다 귤을 땅에 떨어트렸다. 원술이육랑은 손님으로 왔으면서 왜 귤을 품었지?”라고 묻자, 육적은돌아가서 어머니께 드리고자 하였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원술은 이 대답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다.

 

이 이야기는 진수가 지은 역사서 《삼국지》에 있는, 원나라 곽거경이 지은 《이십사효》에도 수록되어, 훗날회귤고사”, “육적회귤”, “회귤이라 하여 지극한 효성을 일컬을 때 인용되었다.

 

동오의 손책은 오군에 있으면서, 장소, 장굉, 진송을 상빈으로 모셨다. 이들은 사해가 아직 태평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무력으로써 다스려 평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육적은 나이가 어렸는데, 멀리서 크게 외쳐 관이오의 패업과 공자의 말을 들어, 이들이 덕이 아닌 무력에 의한 통치만을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여 장소 등을 놀라게 했다.

 

육적은 용모가 웅장하고 박학다식하여, 천문, 역법, 산술 등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우번은 옛날부터 명성이 있었고, 방통은 형주의 유명한 선비인데, 모두 육적과 친교를 맺었다. 방통이 주유의 상여를 운구해 오나라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창문에서 육적, 고소, 전종과 함께 모였다. 방통은 이 세 사람을 평하였는데, 육적에 대해서는굼뜬 말이라 할 만하니 매우 빠른 발의 힘이 있다.”고 평했다. 육적은 고소와 함께천하가 태평해지면 경과 더불어 사해의 선비들을 헤아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저술, 죽음

 

손권이 정사를 통괄하게 되자 육적을 초빙하여 주조연으로 삼았으나, 직선적인 태도로 인해 꺼림을 받게 되어 울림태수(鬱林太首)로 전임되고, 편장군을 더하여 병사 2천 명을 받았다. 육적은 다리에 병이 있었고, 선비로서 학문에 뜻이 있었으므로, 병사를 거느리고 싸우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육적은 군무 중에서도 저술을 폐하지 않아, 《혼천도》를 짓고, 《주역》에 주를 달고, 《태현》을 풀이했는데, 모두 세상에 남았다.

 

육적은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사를 지었다. “한의 지사 육적은 어려서는 《시경》, 《상서》를 익혔고, 장성해서는 《예기》, 《주역》을 익혔으나, 명을 받아 남정하던 중, 질병에 걸려 위독해졌구나! 내가 만난 수명은 길지 못하니, 오호라, 세상과 격리됨이 슬프구나!” 또 가로되, “지금부터 60년이 지나면, 수레는 궤를 같이하고, 글은 문자를 같이 할 것인데, 이를 보지 못하니 원통하구나!”육적은 32세에 죽었다.

 

인물평

 

진수의 평:

진수는 육적을 높게 평가하여, “양웅의 《태현》에 대한 육적의 공적은 중니(공자)의 《춘추》에 대한 좌구명의 공적이나 노담(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장주의 공헌과 같은 것이다.”라고 했고, 손권의 인사에 대해서는이처럼 귀중한 인재에게 남월을 지키게 한 것은, 또한 인재를 해친 것이 아닌가!”라고 평했다.

 

방통의 평:

《삼국지연의》의 기술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공명이 동오를 찾아와 선비들과 논쟁을 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설종이 공명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공명의 대응에 부끄러워하자, 육적은 조조는 전한의 공신인 조참의 후예이지만 유비는 황실 후예라는 것도 별 근거가 없고, 고작 돗자리나 짚신을 짜던 사람인데, 어떻게 조조와 함께 설 수 있겠냐고 공격했다. 공명은 유비가 황실의 후예임은 황실이 인증한 바며, 조조가 조참의 후예라면 지금 조조가 황제를 끼고 전횡을 부리는 것은 한실에는 역적이고 조씨 가문에는 패륜아가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또 전한의 고조 유방은 고작 정장의 지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유비가 돗자리나 짚신을 짜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답했다. 육적은 말문이 막혀 답하지 못했다. 회귤 고사는 직접 등장하지 않으며, 다만 공명은 자신을 공격하는 육적에게 대답할 때 육적을 가리켜공은 원술 앞에서 귤을 품었던 육랑이라고 일컬었다.

 

친족 관계육강(陸康) (아버지): 후한의 여강태수로, 원술의 곡식을 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가 원술의 명령을 받은 손책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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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적(陸績)의 효도와 회귤고사(懷橘故事)

 

 

중국 오()나라 사람인 육적(陸績)은 어릴 때부터 효자였다. 그가 어느 날 대갓집에 심부름을 갔었다. 그 집은 부잣집이어서 음식상에 귀한 귤이 놓여 있었다. 육적은 말로만 듣다가 처음 보는 귤이라 얼른 먹고 싶었다. 그 순간 육적(陸績)은 어머니 생각이 났다. 홀어머니인 그의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 겨우 살아가므로 귤 같은 귀한 과일은 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먹기보다는 어머니께 드리려고 자기 몫을 옷 속에 감추었다. 돌아올 때 주인에게 인사를 하려고 엎드리니 품속에 숨겼던 귤이 방바닥에 굴러 나왔다. 주인이 그 까닭을 물으니, 육적은 그것을 어머니께 보이고 같이 맛을 보려 한다고 말했다. 주인은 어린것이 하도 기특해서 칭찬하고 귤을 따로 싸서 보냈다. 이것이 육적(陸績)의 회귤고사(懷橘古事)이다.

 

‘회귤고사’와 관련된,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명종 16) 경북 영천~1642(인조 20)]의 효성어린 시조 한 수가 있다.

 

반중(盤中)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조홍감: 홍시.  보이나다: 보이는구나.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음직하다마는        유자(柚子): .  

품어가 반길 이 없을세 글로 설워하노라.   반길 이: 반가워할 사람.  없을세: 없으므로.

 

육적(陸績)의 회귤고사(懷橘古事)나 박인로의 시조(時調)에 담긴 효심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가 좋은 음식을 대하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자기만 즐길 것이 아니고, 항상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이 실천으로 나타나면 효도가 되는 것이다. 미처 효도로 실천하지는 못 하더라도 그런 마음이라도 있어야지, 그런 생각마저 들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불효의 자식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글쓴이 : 최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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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석전기(廉石傳奇)

 

《염석전기》는 광서 옥림 지방에서 유명한염석문화에서 이름을 땄다. 삼국시기 부패를 척결하고 청렴을 널리 알린 옥림의 태수육적이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짐이 너무나 가벼워 배가 바다에 뜨지 못해 결국 해안에서 거대한 돌을 옮겨온 후에야 배를 바다에 띄워 돌아갔단 전설이 있다. 이후 이 돌은 청렴의 상징이 되어염석이라 칭해졌다. 이 드라마는 역사에 길이 남은 청렴한 관인 육적이 옥림 지방에서 태수로 임하면서 이룩한 위대한 성과들, 즉 낙후한 생산을 개량하고, 교육을 진흥하고, 탐관오리를 척결한 일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율림석”으로도 불리는염석은 중국의 역사적인 유물인 동시에, 중국 역사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옥림 지방과 관련된 전설이다. 삼국시기 옥림의 태수인 육적은 강직하고 근엄하고 청렴한 관리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빈 배로 돌아갈 때 너무 가벼워 거센 풍랑으로 인해 바다에 뜨지 못하자 해안의 거석을 실어 배를 띄었다고 한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간 육적은 싣고 온 거석을 집 앞에 두고 청렴한 정신을 영원히 세기고자 하였다. 이후 청렴한 관직 생활의 상징이 된 염석은 현재까지 소주 문묘박물관에 전시되어, 중국인과 공직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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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daum.net/historytop10/15083069 |

에도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