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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3106 추천 수 5 댓글 1
저는 막내딸 덕분에 지난 2월 설날연휴 기간에 걸쳐 부부동반하여 캄보디아를 다녀온 이후, 또다시 계속 건강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이에는 우리나라 말로 동요를 부르면서까지 물건을 사달라고 애원한 어린이들을 본 여파도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작년에 3개월 정도만 건강상태가 좋았습니다.

지난 9월부터 집사람은 회사 다니는 것도 그만두고 돌도 안된, 막내딸 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습니다.

저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아침 6시경에 일어나는데, 오늘은 갑자기 2시부터 잠을 못이루다가 갑자기 시 "인생찬가"[밑에 있음]가 생각나서 이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애써 글을 마무리하여 게시판에 올렸는데 올려지지가 않아 다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짧게 써야겠습니다.

지난 4월16일부터 저작권법이 발효되어, 이 게시판에 실었던 적지 않은 글들을 없앴습니다. 재수 없으면 벌금을 내게 된다니 여러분들도 조심하십시오(아래 Comment 참조). 이 법이 "무자식상팔자"격 역할을 해서야 ---

여러 이유로, 말 많았던 제 홈페이지도 없앴습니다(실렸던 글 중 하나가 아래에 있음).

오는 수요일 5월19일, 우리 59회 동창회(공지사항 참조)에 많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봄날 잘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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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인생찬가(A Psalm of Life) - Henry Wadsworth Longfellow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1807-1882)



1
Tell me not, in mournful numbers,      내게 말하지 말라, 구슬픈 가락으로 ,
Life is but an empty dream!                     인생은 한낱 텅 빈 꿈이라고!
For the soul is dead that slumbers,     왜냐하면 잠든 영혼은 죽은 셈이고,
And things are not what they seem.    사물은 겉보기와는 다르기에.

2
Life is real! Life is earnest!                 인생은 현실이며, 인생은 진지한 것!
And the grave is not its goal;              무덤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Dust thou art, to dust returnest,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란 말은
Was not spoken of the soul.               영혼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3
Not enjoyment, and not sorrow,          즐김도 슬픔도
Is our destined end or way;                우리의 운명지어진 목표나 길이 아니다;
But to act, that each tomorrow             행동하는 것, 그래서 내일이
Find us further than today.                  오늘보다 더 나은 우리를 발견하리라.

4
Art is long, and time is fleeting,            예술은 길고, 시간은 화살 같다.
And our hearts, though stout and brave, 그리고 우리의 심장은 튼튼하고 용감하긴 하나,
Still, like muffled drums, are beating.     언제나 천으로 감싼 북마냥, 무덤으로의
Funeral marches to the grave.              장례 행진곡을 울리고 있다.

5
In the world"s broad field of battle,        세계의 드넒은 전장에서,
In the bivouac of Life,                          인생의 야영장에서,
Be not like dumb, driven cattle!            말 못하는, 쫓기는 가축이 되지 말라!
Be a hero in the strife!                         투쟁에서 영웅이 되라!

6
Trust no Future, howe"er pleasant!        미래는 믿지 말라, 아무리 즐겁다 할지라도!
Let the dead Past bury its dead!           죽은 과거로 하여금 죽은 자를 묻도록 하라!
Act,-act in the living Present!                행동하라, - 살아있는 현재에서!
Heart within, and God o"erhead!            마음속엔 용기, 머리 위엔 하느님!

7
Lives of great men all remind us.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는 모두 우리에게 상기케 한다.
We can make our lives sublime,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숭고하게 만들 수 있음을,
And, departing, leave behind us.          그리고, 떠나면서 우리 뒤에
Footprints on the sands of time;            시간의 모래밭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음을;

8
Footprints, that perhaps another,          발자국, 어쩌면 인생의 엄숙한 바다 위로
Sailing o"er life"s solemn main,            항해하는 다른 사람이,
A forlorn and shipwrecked brother,       쓸쓸한 난파당한 형제가,
Seeing shall take heart again.              보고서,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될 발자국.

9
Let us, then, be up and doing,             자, 그러니 일어나 일하자,
With a heart for any fate;                      어떠한 운명도 감수할 마음 갖고;
Still achieving, still pursing,                 언제나 성취하며, 언제나 추구하며,
Learn to labor and to wait.                   일하는 것과 기다리는 법을 배우자.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보든대학을 졸업하고 유럽 유학 후, 모교에서 6년간 근대어 교수를 지냈다. 1836년,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어 어학교수로 18년 동안 있었다.  
    일찍부터 시에 관심이 깊어 몇 편의 시와 수필을 지방잡지 등에 실었으며,  영국 낭만파시인인 W. 스콧의 경향에 크게 심취하였다.  그러나 그가 시인이 된 계기는 1835년의 두 번째 유럽여행이었다.  이 때, 영국•스웨덴•네덜란드•독일 등 북유럽지역을 편력했으며, 그의 시의 기조가 된 낭만주의, 특히 독일낭만주의와 접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 여행기인 《바다 건너(1835)》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후 몇 년간 산문•시 등을 많이 썼으며,  첫 시집 《밤의 목소리(1839)》에 실린 <인생찬가>, <별빛>은 큰 호응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마을의 대장장이>를 수록한 《민요와 그 밖의 시(1841)》, 비련의 서정시집 《에반젤린(1847)》, 인디언 영웅시 《하이어워사의 노래(1855)》 등이 있고, 학자로서의 업적으로 A. 단테의 《신곡》을 번역하였다.  그의 시는 평이한 운율과  감상적인 면이 있으며, 시작(詩作)이라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전문적 지식을 갖춘 사람을 대상으로 하던 그 시기에 이를 극복하고 대중을 위한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이버 백과 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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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기 목사의 저녁 초대] 1976년 2월 어느날
  

1976년 2월에 나는 "Ohio State University"(단일 캠퍼스로는 세계에서 최대 면적?; 미식축구 잘 하는 대학으로 유명함)가 있는 미국 Columbus 시를 방문하였다. 이 대학에서는. 나와 중,고교 또한 화공과 동기동창인 양수길 박사(현재 국가경영전략연구원 NSI 원장)가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어서 내가 KIST로 귀국 도중 양 박사를 만나러 이 시에 온 것이었다.

이 때 최영기 목사(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아래 게시판 No. 188 찹조)는 이 대학 전기공학과 박사과정에 있었다. 내가 온 것을 알고 최 목사가 나를 집으로 저녁초대 하였다. 이 때 최 목사와 나눈 환담 중 최 목사가 한 다음 말이 내 마음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부부 갈등이 생겼을 때, 문을 쾅 닫고 집 밖으로 나오니 갈 곳이 특별히 없어 학교 연구실에 갔다가 마음을 갈아 앉힌 후, 집으로 다시 돌아올 때는, 가능한 한 조용히, 문 소리 안 나게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1986년 8월(이 후 나는 미국 본토를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방문한 적이 없음)에 국제학술회의가 있어서 San Francisco 시를 방문하였을 때 우연히 친구들로부터 최 목사 이야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었다. 박사학위를 끝내고 좋은 직장에 다니던 최 목사가 갑자기 퇴사하고 신학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훌륭한 목사님이 되어 최 목사에게서 배우고저 우리나라에서도 최 목사를 만나러 Houston 시를 방문한다니 ---. 이는 목사가 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최 목사가 받은 때문인 것 같다.

수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우리 59회 조찬회 모임에서, 최 목사를 한 번 만났다. 또 최 목사를 만나게 되기를 바라면서 ---


2010/01/23/   최창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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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날을 앞에 두고 ---


5월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위의 글을 옮겨 실으니, 아래 글이 생각납니다. 읽어 보세요.


최창균

ooooooooooooooooooo

[퍼온 글]

부부의 일곱 고개



일단 결혼한 부부들은 싫든 좋든

다음과 같은 일곱 고개를 넘어야 한데요.



첫째 고개는 환상의 고개로

신혼부터 3년쯤 걸려 넘는 고개로

갖가지 어려움을 비몽사몽간에 웃고 울며 넘는 눈물고개.



둘째 고개는 타협의 고개로

결혼 후 3-7년 동안에

서로에게 드러난 단점들을 타협하는 마음으로

위험한 권태기를 넘는 진땀 고개.



셋째 고개는 투쟁의 고개로

결혼 후 5-10년을 사는 동안

진짜 상대방을 알고 난 다음 피차가 자신과 투쟁하며

상대를 포용하는 현기증 나는 비몽 고개.



넷째 고개는 결단의 고개로

결혼 후 10-15년이 지나면서

상대방의 장, 단점을 현실로 인정하고

보조를 맞춰 가는 돌고 도는 헛 바퀴 고개.



다섯째 고개는 따로 고개로

결혼 후 15-20년 후에 생기는 병으로

함께 살면서 정신적으로는 별거나 이혼한 것처럼

따로따로 자기 삶을 체념하며 넘는 아리랑 고개.



여섯째 고개는 통일 고개로

결혼 후 20~30년 후에 생기는 병으로

있었던 모든 것을 서로 덮고

새로운 헌신과 책임을 가지고 상대방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며 사는 내리막 고개.



일곱째 고개는 자유의 고개로

결혼 후 30~40년이 지난 후에 나타나는

완숙의 단계로 노력하지 않아도 눈치로 이해하며

행복을 나누는 천당고개.




출처는 모릅니다.


50년 가까이 살아보니 공감가는 점 있어 옮겨 전합니다.


    


  • 최창균 2010.05.16 08:08

    [최창균이 받은 서신 사본]



    FW: 조심 저작권법



    2010년 4월 16일부터 저작권법의 발효로

    서로 나누어 듣던 음악 프로그램이 저작권법을

    주장하는 자 및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3류 변호사들에 의하여

    고소를 당하면 음악 1편당 50만원의 벌금(?; 위자료)을 지불해야

    한다니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간 보낸 음악을 다른사람에게 전달을 하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림도,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드 팝송도 흘러간 노래도 모두 해당이 된다니 이제부터는

    음악, 미술, 사진 할 것 없이 모두 올리고 전달하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좋은 의미로 서로 나누어 듣던 음악, 사진, 그림 모두가 해당이 되며

    외국것들도 같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눈감고 귀막고 그렇게 살아야 될 것 같습니다.

    국가가 할 일이 산적한데 국회라는곳에서 이런 것부터 처리 시행을 하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게, 경악할 뿐 입니다.



    다시한번 부탁 드리는것은 그간 보내드린 모든 것을

    절대로 남에게 전달 또는 옮김을 해서는 안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