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3170 추천 수 0 댓글 0
청백리 이원익(李元翼, 1547년 ~ 1634년)을 생각하면서


두 달전 아침에 TV에서 청백리(淸白吏) 이원익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라고 절감하였다. 그는 남인에 속해 있었으나, 성품이 원만하여 반대파로부터도 호감을 받았다. '오리 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아래의 소개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무상급식, 재선거, FTA 비준, ---으로 계속 시끄러웠다. '오리 정승'같은 사람이 지금 있다면 시끄러움이 줄었을텐데 ---

나는 중학교 시절에도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께서 다른 친구로 하여금 내 도시락을 싸 오라고 하시면, 이를 미리 알고 어머니에게 쌀밥에 계란을 기본으로 하여 도시락을 싸도록 강요하였다. 선생님들은 정말로 나를 사랑으로 감싸주셨다. 선생님들이 대납하여 주셔서 등록금도 거의 내지 않았다. 내가 모범생이었기 때문이다. 점심 시간에는 혼자 학교 뒷동산(지금의 정곡도서관 북쪽)에 올라가 있었을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부자집 친구들에게 혐오감을 가진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내 친구들 중에는 그 당시 부유층 친구들이 더 많다. 그 당시에는 전교조 같은 것은 꿈도 못꾸고 교사들이 참다운 사랑을 실천하였다.

지금도 나는 점심을 싸 다니고 다니는 것이 무상급식보다는 좋다고 생각한다. 친구들이 도시락의 다양성을 통하여서도 서로 시야를 넓히고 더욱 잘 어울리고 부유함과 가난함을 더욱 잘 알게 되는 이점도 있지 않은가? 누가 빈자로 하여금 부자에게 적대감을 갖게 하였는가? 근본적으로 가정교육은 물론 학교교육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무상교육이 가능한 것도 부자가 많은 세금을 내고 있기 때문 아닌가?

자유민주주의 하에서는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부자를 미워하지 말자! 누구나 능력 있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을 잘 시키자! 서울시장 선거에서 여당 후보자가 부자임을 매도하는 사람들이 지성인들일까? 붉은 색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홍건적, 홍위병 생각이 난다. 선거운동 와중에 TV에서 분홍색 넥타이를 맨 민주당 대표, 붉은 목도리를 두른 시장 후보자가 보인 적이 있었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인가? 두 사람 다 내 고교 후배들이다. 후자는 특히 병역미필자다. 두 사람 다 고교시절에 화동언덕(정곡 도서관)에서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고교 교훈)이 되려고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 개과천선하기를 기대하여 본다.

한미 FTA , 어느 정권에서 시작하였나? 말도 안되는 말싸움민 계속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정치가들의 못마땅한 처사들이 비일비재하지만 '오리 정승'을 본받을 정치가들이 많이 배출되어, 누구나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부자가 빈자를 잘 도와주고, 내 화동언덕 시절처림 빈자도 부자를 사랑하는, 상식이 통하는 우리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

이원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원익(李元翼, 문화어:리원익, 1547년 ~ 1634년)은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왕족 출신 문신, 학자, 정치인이다. 음서로 관직이 승의랑(承議郞)에 이르러 다시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 사헌과 호조•예조•이조 판서, 의정부좌의정 등을 지내고 관직이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양가는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사후 근검절약,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당색으로는 동인(東人)이었으나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는 남인이 되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인조 반정 이후에도 영의정에 초빙되어 서인, 남인 연립정권을 구성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맥을 계승하여 남인에 학통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윤휴, 허목, 이순신 등의 인척으로, 윤휴의 서모이자 윤효전의 첩은 그의 서녀였고, 서외손 윤영은 충무공 이순신의 서녀와 결혼하여 그의 사돈간이었다. 미수 허목은 그의 손녀사위로, 정실 손녀딸의 남편이었다. 자는 공려(功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태종의 왕자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4세손이며, 외가쪽으로는 세조, 예종, 성종 세 조정에서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후손이다.



생애

====
초기 활동

-------------

출생과 가계


이원익은 조선의 왕족으로 태종 이방원의 서자이자 세종대왕의 서제인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4세손이다.
증조부는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이고, 할아버지는 청기군(靑杞君) 이표(李彪)이다. 아버지 이억재는 부인 우씨(禹氏)와 혼인하였으나 자식이 없었고, 뒤에 감찰(監察) 정치(鄭錙)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낳았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이원익이다.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아버지의 대에서 끝났으나, 그는 학문을 부지런히 연마하였다. 그는 키가 작았는데, 이 때문에 '키 작은 재상'으로 불렸다.
숙부는 이억순(李億舜)과 이억수(李億壽)인데, 숙부 이억수는 광해군 때 고령의 나이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폐모론이 나오자 폐모에 반대하는 지사들을 이끌고 항소(抗訴)하여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관료 생활

1564년(명종 19년)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합격, 생원이 되었으며 그뒤 일찍이 음보(蔭補)로 관직에 출사하여 승의랑에 올랐다.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있었으나, 원래 인품이 곧았으며 굳이 사람 사귀고 어울리기를 싫어하여 공적인 일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를 아는 이가 없었으나, 유성룡만은 그의 슬기로움을 알고 존경하였다. 1573년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성절질정관(聖節質正官)의 서장관이 되어 하사(賀使) 권덕여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이듬해 예조랑(禮曹郞)에서 뽑혀 황해 도사가 되어 크게 인망을 얻었다.
이이가 황해 감사로 있을 때, 그의 밑에서 일을 잘 처리하여, 이이가 천거하여 1576년 정언이 되고, 1578년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1583년 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사부 하낙이 승정원이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고 상소함으로써 그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처음에는 당색으로는 동인 이었으나,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자, 그는 유성룡과 우성전을 따라 남인이 되었다.


임진왜란 전후

-------------------
그 후 대사헌이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판서로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왕이 피란하는 길에 앞장섰으며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과 싸웠다. 이듬해 평양 탈환 작전에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으나, 일본과 화의를 주장한 죄로 물러난 유성룡을 변호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92년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사도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였고 이어 좌상(左相)이 되어 누차 소문을 올려 국사를 논했다. 선조를 간언하여 한때 대신을 그만두고 시골에 가 있었으나 1600년 다시 소환되어 이항복의 뒤를 이어 좌의정이 되었고 1604년 비로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고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에 피봉되었다.


광해군 시절

----------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고 1608년 대동법을 건의하여 전국적으로 실행하도록 하였으며 불합리한 세금제도를 고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는 임해군의 처형 당시 관용을 베풀 것을 주장했다가 북인들의 눈밖에 났으며,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사형하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1615년에는 이이첨 등에 의해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나타나자,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강원도 홍천에 유배되었으며, 1619년 풀려나왔다.


생애 후반

=======


인조 반정

------------
1623년(광해군 15년) 초 외가쪽 선조 정창손의 묘를 이장할 때, 이원익은 그의 신도비를 재건하고 서거정의 글씨체에 한백겸이 덧붙여 쓰고, 심열의 글씨로 복원시켰다.
1623년 봄 조선 선조선조의 서손 능양군과 서인의 주도로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남인이었으나 숭용산림의 정책에 따라 특별히 의정부영의정으로 등용되었으며, 서인-남인 연합정권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연합 정권은 1년만에 사실상 붕괴된다.
1624년(인조 1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공신 이괄의 난 때에 공주로 피란하는 왕을 모셨다. 이때 그는 한성부 감옥에 갇인 49인의 정치범을 함부로 처형하는 것을 반대하고 만류했으나, 서인 조정은 그의 건의를 무시하였다. 또한 인목대비(仁穆大妃)는 한사코 광해군을 죽이고자 하였고 모든 공신은 이에 찬성하였으나, 이원익은 대비에게 간청하여 이를 무사하게 하였다. 그밖에 광해군의 암살을 미리 예상하고 사람을 보내 광해군을 비밀리에 보호하게 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공부(貢賦)를 단일화하였다.


대동법 찬성

----------------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당시 한성부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 49명에 대한 처형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년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잠곡 김육의 대동법에 적극 찬성하여 전국에 확대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의 반대에 부딛치기도 했다.


죽음

====
이후 치사(致仕)하여 관감당(觀感堂)으로 은퇴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등으로 여생을 보내니 그의 문하에서는 허목, 윤휴 등이 배출되었다. 특히 그의 애제자 중의 한사람인 미수 허목은 그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그가 만년에 거처하던 관감당 근처에는 그를 모신 사당과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1634년에 사망하니 당시 그의 나이 향년 87세였다. 사후 인조의 묘정에 함께 모셨다.


사후

====
그는 청백리(淸白吏)에 뽑혔으며 남인에 속해 있었으나, 성품이 원만하여 반대파로부터도 호감을 받았다. '오리 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저서로 《오리집》 등이 있다.


평가

====

청렴하였으며 사심이 없었다는 평가가 있다.


기타

====
학자

-------
청백리이자 문신이며 학자이기도 했다.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허목, 윤휴 등을 문하생으로 배출하였다.


+++++++++++++++++++++++++++

[참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광명 오리 이원익선생 종택과 관감당

http://younghwan12.tistory.com/3148
http://younghwan12.tistory.com/3167
을 열고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