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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선생의 일화

1. 어머님의 엄격한 가르침과 퇴계의 순종

진성이씨(眞城李氏)의 500여년 세거지(世居地)인 안동군 도산면(陶山面) 온혜리(溫惠里)는 퇴계선생의 조부이신 이계양(李繼陽, 호는 老松亭, 1428~1488)공이 부라촌(浮羅村, 浮浦)에 살면서 서촌(西村, 祿轉面 사신리)에 거주하는 영양김씨(英陽金氏) 김유용(金有庸)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이식(李埴), 이우(李우) 등 두 아들을 두고, 봉화훈도(奉化訓導)로 있을 때 고향을 왕래하면서 어떤 스님으로부터 점지받고 정착하게 된 곳이라 한다.

퇴계의 아버지 이식은 신령현감(新寧縣監)을 지낸 의성김씨(義城金氏) 김영명(金永命)의 차자(次子) 김한철(金漢哲)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잠(潛), 하(河)와 딸 하나를 낳고 재취(再娶)로 춘천박씨(春川朴氏, 朴緇의 딸)를 맞아 의(의), 해(瀣), 징(澄), 황(滉)을 두었다. 춘천박씨는 막내인 퇴계가 태어난 후 7달만에 남편과 사별하여 자녀교육에 있어서는 유별나게 엄격하였다고 한다.

“남들로부터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행실을 삼가하라”는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란 자녀들은 모두가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여 충과 효를 실천하는 지도자로서 후세에까지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 장자인 잠(潛)은 충순위(忠順衛)로서 그의 딸은 송암 권호문(松巖 權好文)의 어머니이며, 차자 하(河)는 훈도(訓導)로서 노송정(老松亭) 종파를 이어 받았다. 춘천박씨(春川朴氏) 소생인 3자 의(의)는 외가가 있는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로 이거하여 외가의 봉제사(奉祭祀)를 잇는 등 효행을 다하였으며, 4자 해(瀣)는 문과급제로 황해, 충청관찰사, 대사헌, 예조참판을 역임하면서 과환(科宦)으로 가문을 빛냈고, 5자 징(澄)은 찰방(察訪)인데 효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6자 황(滉)은 문과급제 후 수없이 주어지는 벼슬보다는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정진하여 370여명의 제자를 배출하는 등 도학(道學)과 덕행(德行)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사표(師表)가 되었다.
(출처: 진성이씨대종회)

어머니 박씨 부인이 퇴계 선생을 낳을 때 공자(孔子)가 방문 안에 들어오시는 꿈을 꾸었던 까닭에 그 집 문을 성림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문은 지금도 태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생후 일곱 달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박씨부인은 농사와 길쌈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가며, 여러 자녀들을 학업에 정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자식들을 앞에 불러놓고, “너희들은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므로 남의 집 아이들과는 달라서 공부만 잘해도 안된다. 공부를 남보다 잘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행실을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행실이 방정(方正)하지 못하면 과부의 자식이기 때문에 옳게 가르치지 못해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 터인즉, 너희들은 그 점에 각별히 명심하여 훌륭하신 조상님들에게 욕을 돌리지 않게 하여라.” 하고 수없이 타일렀다. 그래서 퇴계는 어릴 때부터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고, 동무들을 항상 온순하고 겸손하게 대했다. 그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게 되었는데, 아침이면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깨끗이 빗고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글을 두어 번 외워본 후에야 선생님 집에 들어갔고, 선생님 집 앞에서는 공손히 엎드려 스승에 대한 인사를 반듯하게 올렸다. 이처럼 퇴계는 글을 배우기 시작할 초기부터 성실했던 까닭에 그의 학력은 날이 갈수록 높아갔다.

2. 천성이 인자함

퇴계가 8살 때 일이다. 바로 위의 형인 해(瀣)가 칼에 손을 베어 피가 흐르는 것을 보자 퇴계는 얼른 달려와 상처난 형의 손을 붙잡고 소리내어 울었다. 어머니 박씨가 그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정작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하고 물었다.
퇴계는 여전히 울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형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 아니하나, 피가 저렇게 흐르는데 어찌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이로써 퇴계의 성품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인자한가를 가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3. 퇴계의 독서법

퇴계는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무척 좋아하여 하루도 신변에서 책을 멀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온갖 정성을 모두 기우렸다.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누워서 책을 읽거나 흐트러진 자세로 읽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이처럼 근엄한 독서자세는 어려서부터 70세에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퇴계는 책을 남달리 정독하는 편이어서 무슨 책이나 한번 읽기 시작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연거퍼 읽어 그 속에 담겨 있는 참된 뜻을 완전히 터득하기 전에는 그 책을 결코 내려 놓지 않았다.

일찍이 퇴계가 서울에 유학하는 중에 “주자전서”를 처음으로 읽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방문을 굳게 닫고 방안에 조용히 들어 앉아 그 책을 읽기 시작하자 하루에 세번씩 끼니 때 이외에는 일체 외출을 하지 않고 그 책 한 질을 수 없이 되풀이 하여 읽었다.
때 마침 그 해 여름은 몹시 무더워서 보통 사람들은 독서는 커녕 서늘한 나무그늘을 찾아다니기에 바쁠 지경이었건만 퇴계는 그와 같은 폭서도 아랑곳 안하고 방문을 굳게 닫은채 독서만 줄곧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더운 한해 여름을 꼬박 “주자전서” 읽는 일로 보냈던 것이다. 친구가 퇴계의 건강을 걱정한 나머지 한번은 퇴계를 찾아 와서 “이 사람아! 독서가 아무리 중요하기로 건강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닌가. 요새 같은 무더위에 방문을 닫고 앉아 독서에만 전념하다가는 반드시 건강을 해치게 될걸세. 독서는 생량 후에 하기로 하고 이 여름에는 산수 좋은 곳으로 피서라도 다녀오도록 하세!” 하고 충고를 하였다. 그러자 퇴계는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은 깨달음이 느껴져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 이 책에는 무한한 진리가 담겨져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정신이 상쾌해지며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를 뿐이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책의 원주(原注)를 읽어보고 나는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 방법을 알고나니 이 책을 읽는데 더욱 흥이 일어나네. 이 책을 충분히 터득하고 나서 사서(四書)를 다시 읽어보니 성현들의 한 말씀 한 말씀에 새로운 깨달음이 느껴져서 나는 이제야 학문하는 길을 제대로 알게 된 것 같으이.”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잠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게 되어 마치 학문에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주자대전” 가운데서도 특히 주자의 편지를 통해 도학의 학문 방법을 깨닫고, 학문방법에서 편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편지는 사람의 자질이 높고 낮음과 학문의 깊고 옅음에 따라 병에 맞추어 약을 주고 물건에 상응하여 저울추를 올려 놓는 방법을 쓴다. 혹은 누르고 혹은 부추키며 혹은 인도하고 혹은 구조하며, 혹은 결려하여 나아가게 하고 혹은 물리쳐 경고해 주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퇴계의 학문 방법이 추상적인 관념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의 만남 속에서 개개인의 절실한 상황에 따라 감동과 분발을 시킴으로써 학문을 심화시키고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의 인격적인 실현임을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주자학에 그만큼 심취했었고, 주자학을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경지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광범하고 산만하기만 하던 주자학을 근본적으로 발전시키고 체계화하여 마침내는 ‘퇴계학(退溪學)’ 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수립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퇴계는 책을 읽는 방법에 있어서 남달리 정밀하게 읽었으니, 그것은 퇴계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제자 한 사람이 글을 올바르게 읽는 방법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글이란 정신을 차려서 수없이 반복해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한두 번 읽어보고 뜻을 대충 알았다고 해서 그 책을 그냥 내버리면 그것이 자기 몸에 충분히 배지 못해서 마음에 간직할 수 가 없게 된다.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것을 자기몸에 배도록 공부를 더 해야만 비로소 마음 속에 길이 간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학문의 참된 뜻을 체험하여 마음에 흐뭇한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는 또 독서에 대해 이렇게도 말했다. “글을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반드시 성현들의 말씀과 행동을 본받아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서둘러 읽어서 그냥 넘겨버리면 그 책을 읽기는 했어도 별로 소득은 없게 되는 것이다.” 실로 독서의 진수를 정확하게 지적한 금언(金言)이라 하겠다.

  
4. 엄격한 자기 성찰

퇴계는 매일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전해지는 일기는 극히 일부분 뿐이다. 그러한 가운데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에는 일기를 보충할 만한 자기반성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1) 내가 한번은 금문원의 집에 갔는데, 산 기슭이 매우 가파라서 갈 때는 말 고삐를 꽉 잡고 조심조심 하였으나, 돌아올 때는 얼큰히 취하여 길이 험한 것을 깜빡잊고 탄탄대로인양 안심하고 왔다. 마음을 채근하고 버림이 이와 같으니 두렵지 아니한가.

[사진→ 친필 좌우명: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毋不敬), 혼자일 때도 조심하라(愼其獨),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毋自欺), 사악한 생각을 하지 말라(思無邪)]


2) 나는 과거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처음에는 합격 불합격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24살 때에 연거푸 세 번을 낙방하였으나 역시 큰 상심은 아니 하였는데, 하루는 집에 있자니까 누군가 “이서방, 이서방”하고 부르는데 나가보니 늙은 종이었다. 그리하여 문득 탄식하기를 내가 아직도 이름 밑에 아무런 호칭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욕을 보는구나 생각하고 갑자기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듯 바뀌니 두렵지 아니한가.


3) 내가 처음 과거에 합격하던 해에 여러 사람에게 이끌려 날마다 술마시고 놀러 다니느라 조금도 겨를이 없었다. 밤에 돌아와서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즈음에 와서는 다시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어 그러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4) 번잡하고 흥겨운데서 사람의 성정이 바뀐다. 내가 사인으로 있을 때, 어느 잔치 자리에서 기생들이 눈 앞에 가득이 있어서 문득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생겼다. 비록 힘써 욕망을 억제하여 구렁텅이로 빠지는 지경은 면하였으나 이러한 기회가 바로 살고 죽는 갈림길인 것이다. 어찌 조심하지 않을손가.

  
5. 부인에 대한 관용

퇴계는 21살 되던 해에 김해허씨(金海許氏, 進士 許瓚 따님)를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나 둘째 아들 채(寀)를 낳은 후유증으로 결혼 5년만에 사별하였다. 3년 뒤인 1530년 안동군 풍천면 가곡리(豊川面 佳谷里)에 사는 안동권씨 사락정 권질(安東權氏 四樂亭 權질) 소생으로 정신이 혼미한 딸을 부인으로 재취(再娶)하게 되는데 이는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사락정(四樂亭)이 일찍이 퇴계의 사람됨을 알고,

“경호(景浩, 퇴계의 字), 자네는 내 집일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혼이 나가 온전치 못한 내 여식(女息)을 누가 데려가겠는가? 아무리 생각하고 궁리를 해봐도 자네 밖에는 맡길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처녀를 면하도록 하여 이 죄인의 원을 풀어주게나.” 하는 간절한 청을 퇴계가 받아들였다고 한다.

권씨부인은 혼인 전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賜死)을 내릴 때 그 사약을 가지고 갔다는 이유로 할아버지(花山 權柱)가 화를 입고, 아버지(四樂亭 權질)는 귀양갔으며, 숙부(己卯名賢 權전)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와 신시무옥(辛巳誣獄, 1521) 때 비참하게 죽었고, 숙모는 관비(官婢)로 끌려가는 등 무서운 참극을 겪으면서 정신이 혼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권씨부인은 정신이 맑지 못해 늘 선생을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하루는 선생이 이웃 상가(喪家)에 조문을 가려다 도포자락이 헤어진 것을 보고 부인에게 꿰매어 달라고 했더니 흰 도포에 빨간 헝겊을 대 기워 가지고 왔다. 선생은 말없이 그 옷을 받아입고 문상을 갔다.
사람들이 퇴계선생의 옷차림 모습을 보고 “흰 도포는 빨간 헝겊으로 기워야 하는 것입니까” 하고 농담으로 물어왔다. 예학에 정통한 퇴계가 그렇게 입고 오자 그것이 예법에 있는지를 확인하려 한 것이다. 퇴계는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고 한다.

도포(道袍)를 빨간 헝겊으로 기웠느니, 제사상(祭祀床)에 차려진 음식을 집어 먹었느니 하는 권씨부인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퇴계선생의 결혼생활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넉넉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권씨부인과 관련하여 퇴계는 제자 중에 완주출신(現 全州) 천산재 이함형(天山齋 李咸亨)이라는 선비가 부인과 금슬이 좋지 않아 부인을 소박(疏薄)한다기에 선생은 걱정을 속으로 하면서도 한번도 직접 꾸짖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이함형이 고향을 다녀오겠다고 하자 퇴계는 “자네, 잊지 말고 내일 조반은 우리 집에 와서 먹고 떠나도록 하시게.” 라고 하였다. 이틋날 아침 이함형은 선생 댁에서 아침상을 받게 되었는데 반찬은 산나물과 가지나물, 그리고 된장 한 종지뿐 손님을 초대한 음식으로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더욱 놀란 것은 정신이 혼미하다고 들은 권씨부인에 대한 선생님의 말씨와 태도였다. 선생은 그런 부인에게 깎듯이 공대말을 하시고 배려를 극진히 하였다. 아무리 성인같은 선생님이지만 정신적으로 부족한 부인을 저토록 소중히 여기고 아껴줄 수 있을까? 그는 불현듯 자신의 부인을 연상하고 크게 뉘우치면서 길을 떠나려 하자, 선생은 겉봉에 ‘路次勿開看’(노차물개간: 도중에 뜯어보지 말 것)이라 적은 한 통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네가 부인과 금슬이 좋지 않다고 하니 이는 진실로 개탄할 일이로다. ‘糟糠之妻不下堂(조강지처불하당)’이라는 말이 있는데, 부부의 근본도리를 잊고 글공부는 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또한, 천하의 이치는,
夫者倡 婦者隨(부자창 부자수) 남편이 노래하면 아내가 따라 하고
牡者馳 牝者逐(모자치 빈자축) 수소가 내달으면 암소가 뒤를 쫓고
雄者鳴 雌者應(웅자명 자자응) 수탉이 울어대면 암탉이 순응하니
是以聖人制言行(시이성인제언행) 무릇 성인은 이처럼 언행을 다스려야 하며
而 賢人拘之(이현인구지) 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이 취할 바이다.
라고 하였는데 한 집안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성인의 말씀을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깊이 명심하여 공규(空閨, 남편 없이 아내 혼자 사는 방)를 알뜰히 지키는 부인 곁으로 기꺼이 돌아가 주기를 이 노부는 간곡히 바라네.(중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 뒤로 그는 아내를 소중히 여겨 후손이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이 50세 되던 무렵에 생활이 궁하여 아들을 처가살이시켜 놓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나도 너의 처가살이 어려움을 알고 있다. 아비가 궁하니 자식이 궁한 것은 아무 부끄러움이 아니다” 하고 아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아들에게도 일방적이고 권위적으로 무엇을 명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처가와 친가, 친손과 외손을 똑같이 고르게 돌보고, 아들이 없는 처가의 제사를 받들었던 면모는 오늘날에도 남기는 교훈이 크다.

선생의 이러한 면모가 50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인의 마음 속에 남아서 저절로 존경심을 갖게 하는 것이리라. 새로 만든 1천원권 지폐의 도안이 모두 바뀌어도 퇴계 선생의 영정은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지폐에 선생의 영정이 들어 있는 것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출처: 부산일보)


6. 퇴계의 며느리 사랑

퇴계선생의 맏며느리 봉화금씨(奉化琴氏)는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烏川 君子里)에 사는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 입향조(禮安入鄕祖)인 참판공(參判公) 농수 이효로(聾수 金孝盧)의 사위인 봉화금씨 장사공파 훈도(訓導) 금재(琴재)의 맏딸로서 퇴계의 장자 이준(李寯)의 아내이다.

퇴계는 맏며느리를 맞을 때 상객(上客)으로 사돈댁에 가게 되었는데 사돈댁(査頓宅) 집안 사람들로부터 미천(微賤)한 가문의 사람이라 하여 외면(外面)하는 등 홀대(忽待)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봉화금씨 집안은 5대에 걸쳐 과환(科宦, 生員.進士,文科)이 이어진 명성이 드높은 집안으로 혼례를 끝내고 퇴계가 떠나자 일가의 친척들이 몰려와 “우리 가문의 규수라면 어느 명문가엔들 시집 못 보낼가봐 진성이씨 같은 한미한 집안에 시집보낸단 말이오. 그런 사람이 이 집안에 앉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문을 더럽힌 셈이오.” 하면서 퇴계가 앉았던 대청마루를 물로 씻어내고 대패로 깨끗이 밀어버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퇴계 집안에 알려지자 이번에는 퇴계문중에서 크게 분노하여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며 야단이었으나 퇴계는 침착한 어조로,
“사돈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거나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가문의 명예는 문중에서 떠든다고 높아지는 것도, 남이 헐뜯는다고 낮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가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도 예를 지키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문이 형편없는 가문이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며느리를 맞아오는 터인데 그런 하찮은 일로 말썽을 일으키면 새 며느리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니 그만 두시지요.”
하면서 사돈댁의 괄시를 일체 불문에 부치고 새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이로써 금씨 며느리는 시아버님의 넓은 도량에 크게 감동하여 한평생 높이 받들어 모셨으며, 훗날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 “시아버님 생전에 내가 여러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죽어서도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나를 시아버님 묘소 아래에 가까운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금씨의 묘는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있다.

봉화금씨는 슬하에 안도(安道), 순도(純道), 영도(詠道)와 따님 한 분을 두었는데, 그녀의 맏며느리 안동권씨도 시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였을까 남편(安道)이 4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임진왜란 당하자 온몸을 던져 퇴계선생이 남기신 서책과 유물들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가문을 굳건하게 지켜 훗날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둘째며느리는 영남 사림학파의 종조(宗祖)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등 명문가로 널리 알려진 선산김씨(善山金氏)의 후손으로 지금의 진성이씨 선인파(眞城李氏 宜仁派)가 바로 선산김씨 부인의 후손들이다. 셋째며느리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수졸당 기(守拙堂 岐)와 맏집으로 출계(出系)한 억(억)의 어머니로서 의인파(宜仁派)를 제외한 상계파(上溪派)와 하계파(下溪派) 진성이씨(眞城李氏)는 모두 이 분의 후손들이다.

이처럼 사돈댁의 괄시(恝視)를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고 지극히 아껴주시는 시아버지의 인품에 감명 받은 봉화금씨는 내조(內助)의 적덕(積德)과 효행의 실천으로 한 가문의 영화를 누리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훗날 퇴계선생의 비문은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지낸 안동군 풍산읍 소산(素山)의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영수(金永銖)공의 외손자이자 당시 선성삼필(宣城三畢)로 이름 높았던 봉화금씨(奉化琴氏) 집안의 매헌 금보(梅軒 琴輔, 퇴계선생의 백형 潛의 손녀사위)가 쓰는 등 두 가문의 정리(情理)는 그후 더욱 돈독하게 되었으며, 퇴계선생의 사돈인 훈도 금재(琴재)의 두 아들 일휴당 금응협((日休堂 琴應夾)과 면진재 금응훈(勉進齋 琴應壎)은 오천리(烏川里)의 광산김씨(光山金氏) 입향조(入鄕祖) 참판공 김효로(參判公 金孝盧)의 다섯 손자(後凋堂 金富弼, 읍淸亭 金富儀, 山南 金富仁, 養正堂 金富信, 雪月堂 金富倫)과 함께 퇴계의 문인(門人)이 되어 소위 선성칠군자(宣城七君子)로 유명하다.

퇴계의 둘째 아들 寀(채)는 태어난지 한달 만에 어머니 김해허씨를 잃고 주로 외가(의령)에서 성장하면서 건강이 나빠 퇴계가 단양군수(丹陽郡守)로 있던 때(48세 2월)에 정혼만 해놓은 상태에서 2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무덤은 지금도 경남 의령읍 무하리 고망봉 산기슭 외할아버지 선선에 묻혀 있다. 채가 세상을 떠난 그 이듬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전임한 퇴계는 직책을 사임하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을 때, 홀로된 며느리가 남편을 잊지 못해 방안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남편인양 “이 음식도 좀 자셔 보세요. 이것도 당신을 위해 제가 만든 음식이니 한번 잡숴 보세요.”하는 광경을 우연히 엿보게 되었다.

‘열녀불갱이부(烈女不更二夫)’의 관념이 확고하던 시절이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 광경이 너무나 가슴아파 며칠 뒤 퇴계는, 사돈에게 딸을 재혼을 시키라고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뜻을 담아 며느리를 친정으로 데려가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년 뒤 퇴계가 상경하는 길에 어느 민가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 집 음식과 반찬이 어쩐 일인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입맛에 딱 맞는 것이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다. 남의 집 음식이 이렇게도 내 입맛에 맞을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이튿날 아침 길을 떠나려는데 이번에는 주인댁이 하인을 시켜 보낸 버선이 신기할 정도로 발에 꼭 맞는 것이었다. 그 순간 퇴계는 “아하, 내 둘째 며느리가 이 집으로 개가(改嫁)를 온 모양이구나.” 생각하였다.

퇴계가 주인과 하직하고 길을 떠나는데 이때 담 모퉁이에서 몸을 숨기고 눈물로 배웅하며 서 있는 여인은 먼 빛으로 보아도 옛날 둘째 며느리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퇴계선생은 행여 개가한 며느리의 시집 생활에 방해가 될가 염려하여 모른 체하며 길을 떠났으나 늘 둘째 며느리를 잊지 못하고 두고두고 걱정하였다고 한다.
(출처: 진성이씨대종회)

7. 퇴계의 손자 사랑

조선시대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한 1567년이었다. 이 무렵 퇴계는 67세의 노구임에도 학문적 명성에 힘입어 조정으로부터 입궐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퇴계는 건강을 이유로 번번이 관직을 사양했다. 조정에서는 직위를 더욱 올려 다시 제안을 계속했지만 퇴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퇴계를 비난하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해 8월 경북 안동에 은거하던 퇴계는 서울에 있는 손자 이안도(李安道, 1541∼1584)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병이 중해 예조판서를 수행할 수 없다. 새 주상(선조)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아무 하는 일도 없이 녹봉만 받아먹을 수 없었다. 또 추위가 닥치는데 객지에서 죽게 될까봐 두려워 너무나 급박해 곧바로 돌아왔다. 다시는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게 될까 두렵기 짝이 없다. 어찌하면 좋겠느냐.”라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자신에 대한 비난이 가라앉지 않자 두달 뒤인 10월 손자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나를 비방하거나 의심하거나 나에 대해 물으면 ‘제 조부께서는 그때 마침 병이 위중했기 때문에 하는 일 없이 녹봉이나 받아먹으면서 객지에서 죽고 싶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지, 만약 지금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어찌 이같이 하셨겠습니까’ 라고 대답하면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잘 얘기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또 퇴계가 66세인 1566년 10월 초 과거를 치른 손자에게 보낸 편지엔 할아버지의 사랑이 가득하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아직도 합격자 명단을 보지 못하고 있다. 누가 합격하고 누가 낙방하였느냐?” 그러나 자신의 이런 모습이 다소 쑥스러웠던지 10월 23일엔 낙방한 손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애초에 네가 높은 점수를 받는다면 요행이라 여겼으니 이제 또 무슨 아쉬움이 있겠느냐.” 애써 태연한 척하는 퇴계의 모습. 하지만 손자의 낙방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할아버지가 어디 있을까. 퇴계는 손자의 낙방 답안지를 구해서 검토한 뒤 그 내용을 담아 이듬해 4월 또다시 편지를 부쳤다.

“네가 과거에 응시해서 제출한 글을 보니 위쪽 4행과 5행은 의미가 너무도 보잘것 없구나. 그래서 등수에 들지 못한 것이니….”
대학자의 손자 사랑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퇴계가 44세 때부터 세상을 등질 때까지 16년 동안 손자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125통이나 된다. 편지에는 한결같이 퇴계의 인간적인 체취가 물씬 배어 있다.
(출처: 정석태 지음 ‘안도에게 보낸다’)

8. 비천한 여종에게도 인간적으로 대함(퇴계의 인권사상)

퇴계가 증손자를 보았을 때의 일이다. 장손인 안도(安道)는 성균관 유학생활 중에 아들 창양을 얻었다. 장손이 첫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러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뒤따르는 법. 증손자 창양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기 엄마가 또 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다. 임신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임신으로 젖이 끊어진 것이 문제가 되었다. 요즘 같으면 우유가 있으니 걱정할 일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밥물로 젖을 대신해야 하는데 그것으로 충분할 리가 없었다. 영양실조로 병을 앓기 시작하자 별 수 없이 유모를 구하는 중에 마침 아기 엄마의 친정에 아기를 낳은 여종이 있었다.

친정에서 딸을 낳은 여종에게 아이를 떼어 놓고 한양으로 가서 창양의 유모 노릇을 하도록 했다. 물론 퇴계에게는 비밀로 했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마침내 이 일을 알게 된 퇴계는 “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남의 자식을 죽일 수는 없다” 고 하여 여종을 돌려 보냈다.
별수 없이 증손자 창양은 계속 밥물로 배고픔을 달래면서 겨울을 넘기고 봄을 어렵게 넘겼으나 결국 죽고 말았다. 퇴계의 마음이 몹시 아팠지만 가족들에게 일체 내색하지 않고, 때때로 친구들에게만 이 일로 아픈 마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당시 사회 상황으로 보아서 여종의 딸 하나쯤 잘못되는 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었던 세상이었지만 퇴계는 신분이나 나이를 초월하여 인간을 모두 동등한 인격체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상을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물론 역사 속의 인물이 된 지금까지도 퇴계를 존경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 여성인권문제, 아동학대 문제가 대두되고 있기에 귀감이 되는 퇴계선생의 일화를 소개했다.
(출처: http://www.edumart.co.kr/letter/letter471.htm)

9. 대장장이 배순과 퇴계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10월에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우가 형밑에서 근무할 수 없는 제도가 있었는데 대사헌으로 있던 넷째 형 온계가 충청감사로 부임해 왔기 때문이다.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떠난 지 4년 뒤에 퇴계가 풍기군수로 온 것이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1년 동안 있으면서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고, 청탁을 일체 배제하는 등 공직기강을 확립하였으며, 서원에서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여 가르쳤다. 그 중에서 계급의 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천민인 배순(裵順)을 교육한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퇴계의 인간됨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배순이 살았던 곳은 소수서원에 가까운 배점리였으며, 직업은 야공(冶工, 대장쟁이)이었다.그는 신분이 비천함에도 학문을 좋아하여 퇴계가 백운동서원에서 가르칠 때 자주 뜰 아래에 와서 돌아갈 줄 모르고 즐겨 청강하기에 하루는 그의 아는 정도를 시험해 보았더니 능히 이해하므로 기특하게 여긴 퇴계가 함께 가르쳤다고 한다. 퇴계가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선생의 철상(鐵像)을 주조하여 아침 저녁으로 분향하면서 경모하였다. 22년후 선생이 돌아가시자 그 소식을 듣고(퇴계가 풍기를 떠난 것은 1549년 11월이고, 돌아가신 것은 1570년 12월 8일이다) 3년복을 입었으며, 철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가 죽자 배순의 손자가 조부의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창석 이준 군수가 지은 시가 비문으로 전해졌다.

10. 예법을 합리적으로 고쳐 시행

성호 이익(星湖 李瀷)은 평소 퇴계의 예설(禮說, 예에 관한 이론)은 바로 예의 지침이고 상례(喪禮)에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1인자로 모시고 따랐다. 퇴계가 돌아가신 뒤 스승의 예설을 정리해서 「예설유편(禮說類篇)」을 엮었다. 다음은 예설유편에 실린 퇴계선생의 예법들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시대든지 통용될 수 있는 법이라야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제도에 얽매이기보다는 인간 위주여야 하고, 때와 재물과 분수와 처지에 맞아야 하고, 검소하고 원칙에 맞게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국 예법이 여자를 낮추어 죽은 아내를 망실(亡室)이라 한 것을 고실(故室)로 바로 잡았고, 계모를 홀대한 예법을 버리고 아들에게 적모(嫡母, 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일컫는 말)상(喪)을 치른 후 산소 아래서 시묘도 살게 하였다. 죽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질부(姪婦, 조카의 아내)를 말려서 열녀가 되기보다는 살아 어버이에게 효도하도록 했고, 상중에 병든 아들과 조카를 종권(從權, 일시적으로 상주하는 일을 중지시켜 건강을 회복하는 것)시켜 고기를 먹게 했다.

생일 제사를 지내면 힘에 벅차 기제사도 못 지내게 된다고 당시의 풍속을 바꾸었다. 제물을 많이 담으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쌓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모 합설 제사는 가례에 어긋난다며 단설(제삿날 그 분 제물만 차림)하게 하였다. 초상에는 문상객에게 술 대신 차를 내놓게 하였으며, 제사 음식의 음복은 남과 나누어 먹지 않고 제관(祭官)만 먹게 하였다. 아무리 죽은 부모가 좋아한 음식이라도 살아있을 때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아들이 따르기 어려우므로 일정한 제물만을 쓰게 하였으며, 진설도(陳設圖)에 있더라도 철이 아니면 다 구해 쓰지 못하므로 세 가지 철에 맞는 과일로써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손녀를 출가시킬 때 세속을 따르지 않고 그 철에 입을 옷만을 베와 무명으로 짓게 하고, 중국의 혼례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서 시행하였다. 오늘날 전통혼례라 부르는 예식은 퇴계가 개정한 법인데, 조정 중신들이 들고 일어나 말이 많았으나 국왕이 퇴계의 예가 우리 실정에 맞는다며 어명으로 시행케 하였다. 혼수함(婚需函)을 시종이나 남을 시켜 보내면 불경하고 세도를 부리는 나쁜 예절이라 하여 신랑의 형제들을 시켜보내 되 양가 부모가 의논해서 하라고 하였다.

퇴계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닌 까다로운 의례절차에 대해 물어오면 자기 뜻대로 판단하지 않고 옛 성현의 말씀을 찾고 연구한 후에 그 근거에 따라 시행케 하였다. 선경후중(先輕後重, 부자를 매장할 때는 아들을 먼저 묻고 아버지는 나중에 묻음)과 후우경(後憂輕, 제사는 아버지를 먼저 지내고 아들은 나중에 지냄)의 절차는 증자가 공자에게 물어 시행한 것인데 퇴계가 찾아내어 보급하였다.

퇴계가 벼슬 때문에 객지에 가 있을 때는 제삿날 지방을 써 붙여 놓고 배례하였으며, 귀한 음식이 생기면 쉬 상하는 음식은 부모님의 지방을 써 붙이고 배례한 후에 먹었고, 마른 것은 두었다가 제사에 쓰도록 큰 댁에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남에게는 절대로 권하지 않았다. 자기가 선생으로 사숙하는 주자가 그리 하였으므로 자기는 따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사람에 따라 성의와 경우가 다르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퇴계는 유가(儒家)의 예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정한 선구자였으나 제자 김취려(金就麗)가 예서(禮書)를 편찬하도록 부탁했을 때에는 학문과 덕이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하기도 하였다.

11. 퇴계선생의 인간성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학봉집'의 '퇴계선생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쉽고 명백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정대하여 빛나는 것은 선생의 도(道)요, 따스하고 봄 바람 같고 상서로운 구름 같은 것은 선생의 덕(德)이요, 무명이나 명주처럼 질박하고 콩이나 조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었다. 가슴 속은 맑게 트이어 가을 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밝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수해서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았다. 무겁기는 산악과 같고 깊이는 깊은 샘과 같았으니, 바라보면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퇴계는 아랫사람이나 제자들에게도 항상 공손한 말씨를 사용하고 예의를 지켰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한 까닭은 사화로 어지럽던 시대적 상황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한 고을을 다스릴 만한 벼슬에 머무르라는 어머니의 뜻을 지키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퇴계의 일상생활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과 행동을 진지하고 신중하게 하여 우아하고 경건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한평생 경(敬)을 실천한 그의 모습과 태도는 한결같이 단아하고 차분하여, 수양에 의해 절제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보여 주었다.

12. 멋과 풍류를 즐기는 자세

퇴계는 자연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연 풍경과 철따라 피는 꽃나무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시를 남겼다. 퇴계가 살던 집에는 항상 솔·대나무·매화·국화 등을 심어 벗삼고 즐겼다. 50세 때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뜰에다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오이를 심어 지조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듬해는 계상서당(溪上書堂)으로 옮겨서도 방당(方塘)을 만들고 연을 심고, 솔·대·매화·국화·연(松·竹·梅·菊·蓮)을 다섯 벗으로 삼아, 자신을 포함하여 여섯 벗이 한 뜰에 모인 육우원(六友園)을 이루어 어울리는 흥취를 즐겼다.

61세 봄에는 도산서당 동쪽에 절우사(節友社)의 단(壇)을 쌓고, 솔·대·매화·국화를 심어 즐겼다. 특히 매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서울에 두고 온 매화분을 손자 안도(安道)편에 부쳐 배에 싣고 왔을 때 이를 기뻐하여 시를 읊기도 하는 등 매화는 그가 가장 아끼는 벗이었다. 매화분 하나를 마주하고 주고 받으며 화답하는 시를 읊조리는 모습은 매화와 퇴계가 하나가 되어가는 경지를 느끼게 한다.

“서울에서 기르던 매분을 호사가 김이정이 손자 안도에게 부쳐 배로 싣고 왔기에 반가워 한 절을 지었다. 이르되(都下梅盆好事金而精付安道孫兒船載寄來 喜題一節云)”

脫却紅塵一萬重(탈각홍진일만중)
來從物外伴瞿翁(내종물외반구옹)
不緣好事君思我(불연호사군사아)
那見年年氷雪容(나견년년빙설용)

“만겹 紅塵 다 털어 버리고
俗世 떠난 이 늙은이를 좇아왔구나.
알뜰한 그대가 내생각 해 주지 않았으면
어찌 氷雪같이 고운얼굴 해마다 다시보리.”
(출처: 최형호저 ‘도산 매화를 찾아서’)

또한 퇴계는 산림에 묻혀 사는 선비로서 산사를 찾아 독서하거나 산을 찾아 노닐기를 즐겨했다. 그는 독서하는 것과 산에서 노니는 것이 서로 같은 점을 들어 독서와 산놀이를 일치시키기도 했다. 가장 즐겨 찾아 노닐었던 산은 청량산(淸凉山)으로 도산(陶山)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그 이름이 경관과 어울리지 않으면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하고, 그 자신 소백산을 돌아보고 ‘유산록(遊山錄)’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의 유산록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서문이나 발문을 지어 주면서, 산수의 유람이 갖는 의미를 깊이 음미하고 있다.(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소백산을 유람하고 봉우리와 대의 이름을 고쳐지었으며, 돌아와 ‘소백산유산록(小白山遊山錄)’을 지었으며, 홍응길(洪應吉)의 ‘금강산유산록(金剛山遊山錄)’에 서문(序文)을 지었고, 남명 조식의 ‘두류산유산록(頭流山遊山錄)’에 후지(後識)를 지었다.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단양팔경(丹陽八景)을 정했으며 ! 죽계구곡(竹溪九谷)도 정했다고 전해진다.
퇴계는 한시뿐만 아니라 한글로 쓴 시도 남겼는데 바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 그것이다.

“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古人 못뵈
古人을 못 보아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쩔고.”

“靑山은 어찌하여 萬古에 푸르르며
流水는 어찌하여 晝夜에 그치지 아니 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萬古常靑 하리라.”

산놀이뿐만 아니라 물놀이도 그의 운치있는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李賢輔)을 모시고 분천에 가서 뱃놀이를 하였고,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제자 황준량(黃俊良)과 함께 구담(龜潭)에서 뱃놀이하였다. 퇴계가 가장 즐겨 뱃놀이하던 곳은 도산서원 앞에 있는 탁영담(濯纓潭)이다. 62세 때에는소동파가 적벽에서 뱃놀이를 한 해로부터 8갑주(480년) 되는 날이기에 퇴계도 여러 제자들과 풍월담에서 뱃놀이를 하려고 준비하였으나 전날 큰 비가 내려 이루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했다. 47세 무렵에는 7대(臺)와 하동(霞洞)에서부터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11승경을 명명하고 시를 짓는 풍류를 즐겼다.
(출처: http://my.dreamwiz.com/ohjs7/iw/iw1st.htm)

13. 퇴계선생의 매화 사랑

선생은 일찍이 104수의 매화시로써 따로 「매화시첩(梅花詩帖)」을 지은 바 있어, 「퇴계문집(退溪文集)」에 실린 10여 수의 매화시를 합치면 모두 110여 수의 매화시를 지은 셈이다. 선생은 그 누구보다도 매화를 좋아했고 사랑했다. 퇴계의 경물시(景物詩) 가운데 또 매화시가 특히 눈에 띈다. 일찌기 매난국죽(梅蘭菊竹)은 군자의 사우(四友)로 의취(意趣)가 있어 선비들이 좋아했지만 선생의 경우 특히 그 중에서 매화를 좋아하였다. 그것은 매화가 추운 겨울 온갖 시련과 풍설을 겪으면서도 외로이 혼자 이겨내고, 봄이 되면 제일 먼저 옥설(玉雪)같이 새하얀 꽃을 어김없이 피우는 그 오상고절(傲尙高節)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매화는 은사(隱士)나 절의(節義)의 지사로 등장하지만 선생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녀(仙女)나 애인으로, 드디어는 반려자와 같이 가까워지게 된다. 선생이 매화를 좋아한 것은 청정(淸淨)과 순수(純粹)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스스로도 ‘천향(天香)’ 이라 극찬한 향기도 있지만, 무엇보다 퇴계 자신의 환경과 그의 선천적 ‘천석고황(泉石膏?)’과 ‘조월운경(釣月雲耕)’ 을 즐기는 성품이 매화의 그 ‘속기(俗氣) 떠난 출세간(出世間)의 자태(姿態)’ 와 영합(靈合)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찌기 소동파(蘇東坡)가 매화의 차태를 두고 ‘고오청랭 빙청옥결(孤傲淸冷 氷淸玉潔)’ 이라 표현한 것에 공감했으며, 매화와 더불어 일생을 같이 하면서 일찍이 서한(西漢)의 시인 매복(梅福, 西漢 때의 詩人. 字가 子眞, 梅花를 지극히 사랑하여 梅仙이라 불렸다)과 같이, 매화와 더불어 높은 구도자(求道者)의 자세를 연마한 듯하다.

선생의 매화와의 인연(因緣)은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사후에까지 이어진 듯하다. 고제자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이 쓴 연보(年譜)에 의하면, 선생은 1570년(경오년) 12월 신축일(辛丑日) 유시(酉時)에 운명(殞命)하셨는데, 이날 아침에도 선생은 시인(侍人)에게 “분매(盆梅)를 침소 밖으로 가지고 나가 물을 주라” 고 일렸다고 적고 있다. 돌아가신 날까지 매화를 생각한 그 정성으로 매화와의 인연은 마침내 천상으로 이어졌으니 하찬은 꽃나무에까지 미친 선생의 지극한 성정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다.

선생의 매화시첩 첫머리에 실린 ‘옥당억매(玉堂憶梅)’는 이렇게 되어 있다.

"玉堂憶梅  壬寅年(42세)  옥당에서 매화를 그리워하다"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뜰안의 한 그루 梅花, 가지마다 흰눈 가득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차지)  너도 風塵과 江湖의 그리움은 어긋나는구나.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玉堂에 앉아서 봄밤의 달을 대하니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기러기 울음소리에 생각나는 것이 있구나.

제자 김성일(金誠一)의 「퇴계연보(退溪年譜)」에 의하면, 그 해 2월에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제수되었는데, 그 무렵 어느날 밤 옥당(弘文館)에 숙직(宿直)하면서 뜰에 있는 매화를 보고, 고향집에 있는 매화가 그리워 이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출처: 최형호저 ‘도산 매화를 찾아서’)

14. 명종의 각별한 대우(퇴계의 은거지 도산을 그림으로 그려오게 함)

1545년 7월에 인종(仁宗)이 갑자기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였다. 명종은 아직 동궁으로 있을 때 퇴계가 그의 사부(師傅)를 맡은 일이 있어 즉위하자마자 퇴계를 조정에 중용하려고 여러 차례 관직을 내리고 그를 불렀다. 그러나 퇴계는 원래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 그 때는 이미 나이가 많아 관직을 사양해 오다가 마침내 1565년 12월에 명종으로부터 특별 부름을 받았다.

왕이 보낸 전교(傳敎)에는 “과인이 총명하지 못하고 어진 분을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라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양 늙음과 병을 칭하여 사양하므로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노라. 경은 나의 지극한 심회를 안다면 조속히 올라오라.”는 내용이었다.
퇴계는 명종의 각별한 소명을 거역할 수 없어 1566년 66세(명종 21년) 정월 상경 길에 올랐으나 병환은 가볍지 않았다. 겨우 영주에 도착해서 사직소를 올리고 풍기에 가서 왕명을 기다렸으나 허락하지 않는다는 유지와 함께 행로의 각 수령에게는 노신을 잘 호송하라는 영을 내렸다. 왕의 유지(諭旨)는 “경이 사직하고자 하는 글을 보니 과인의 마음이 쪼개지는 듯하다. 사퇴하려고만 하지 말라. 여러 번 부르는 정성을 저 버리지 말고 잘 조리해서 상경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서 명종은 내의에게 일러 약을 조제해 가지고 가서 문병하라고까지 명하였다. 퇴계는 유지를 받고도 나갈 몸이 못됨을 아뢰고, 눈 쌓인 죽령을 피해 조령으로 방향을 바꾸어 예천에 이른 후 또 다시 부디 병든 몸을 놓아달라고 간절히 장계를 올렸다. 그래도 국왕은 윤허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퇴계에게 공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으로 승진시켜 소명을 내렸다. 퇴계는 이번에도 사직소를 올려 나아가지 아니하고 절간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왕은 윤허는 커녕 홍문관·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지사에다가 경연관 춘추관 동지사까지 겸임시켜 상경하도록 독촉하였다.

그러다가 4월이 되어 올린 퇴계의 장계를 조정대신들이 보고, 국왕에게 6경(六卿)의 자리는 오래 비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윤허를 주청하여 중추부 지사로 체직하게 되었다. 7월에 가서 퇴계는 자헌대부와 중추직도 해직하여 달라는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치 아니하고 병이 낫는대로 상경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 후에도 명종은 퇴계를 잊지 못하여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어진이를 불러도 오지 않음'이란 제목으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고, 유신(儒臣)과 조정 화공(畵工)을 도산에 내려 보내 퇴계가 살고 있는 ‘도산도(陶山圖)’를 그려오게 하여 그림 위에 ‘도산기(陶山記)’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서 병풍을 만들어 하여 늘 곁에 두고 보면서 퇴계를 그리워 하였다.
(출처: 권오봉저, ‘이퇴계의 실행유학’)

15. 청빈한 군자의 죽음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 ‘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은거한 진성 이씨의 묘’라는 뜻)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12월 8일 한서암에서 앉아서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퇴계의 묘소는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 가량 ! 떨어진 토계동 건지산 남쪽 산봉우리 위에 있다.
[사진←묘비 :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글씨는 琴輔가 썼다]

문인록에 언급된 바와 같이 선생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은 정부의 방침에 의하여 오늘날의 국장인 예장으로 치루어졌으나 성현의 묘소로서는 매우 초라한 편이다. 퇴계의 유언에 따라 묘비의 앞면에는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라고 써 있고, 뒷면에는 선생의 자명과 문인 기고봉이 지은 묘갈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통상 비석을 배치하는 방법과 달리 특이하게 동쪽을 등에 지고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며, 비석의 윗부분에는 좌우대칭의 구름무늬 한가운데 앞면에는 태양이 뒷면에는 반달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비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1906년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관리인이 전한다. 그리고 묘소 앞으로는 동자석이 좌우로 자리잡고 있고, 멀리는 망주가 벌려 서 있으며, 더 앞쪽으로 나아가서 문인석이 좌우로 서 있다.
(출처: http://my.dreamwiz.com/ohjs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