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2262 추천 수 117 댓글 0
첫 중국방문을 회상하면서


20년 전 1987년 6월에 중국 북경에서 국제유체역학회가 열려 이에 참석하기 위하여 김용덕 교수가 바랐던, 학원자율화를 위한 서울대 교수서명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집사람 모르게 첫 서명운동에 참여하여 이미 저는 서울대에 학술연구비신청서조차 제출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제 이름이 신문에 났다는 집사람 고함을 아침에 제가 집의 화장실에서 들었던 때가 그립군요. 제2차 서명에 불참한 덕분에, 민주항쟁(?) 전에. 홍릉 소재 안기부에서 조언을 듣고 일본 동경으로 가서 주일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던 김석우 참사관의 환대를 받고 북경행 중국 비행기에 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 때문에 대사관 애용 술집에서 김 원장은 놀랍게도 많은 술값을 냈습니다. 김 원장이 워싱톤 주미한국대사관에서 2등서기관으로 근무할 때도, 1976년 서울의 KIST로 귀국 예정인 저를 집으로 초대하여 저에게 멋지고 맛있는 저녁식사와 코냑을 대접하면서 코냑 마시는 방법까지 가르쳐 준 적이 있습니다. 이 기회에 깊은 감사의 뜻을 또 전합니다. 김 원장과 저는 학창시절에 한 번도 같은 반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중국 첫방문 시에 아마 5일간의 북경회의 후 10일간 중국내 여행경비 $1000를 포함하여 총 US $3000 정도를 여행경비로 지불하였을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해외여행이 매우 어려워서인지 항공료가 상대적으로 비싸서 대부분의 경비는 항공료였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와 중국간에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없어서 저의 중국 방문기록은 제 여권에 없습니다. 돈은 중국 내국인과 다른 태환권을 썼고 외국인의 자금성 입장료는 중국인보다 훨씬 비쌌습니다. 중국 과학자를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인도 뱅거로어에 있는 대학에서 개최된 학술회의장에서였습니다. 이 회의에 참석하였던 중국인 학자들은, 대표인 중국과학원장외에는, 모두 저를 피했습니다. 인도 천민들은 저를 그토록 따랐는데 ---. 중국인들 중에는 논문 발표 후 질문을 중국말로 답하는 학자도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 영어에 능통한, 백발인 중국과학원장이 인도 천민들을 보고 본인 어렸을 때를, 특히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중국인들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저는 하였습니다.

북경 공항에서 2차선 도로로 북경에 도착하여 우정(Friendship)호텔에 머물면서, 회의장을 오가며, 중국인들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제가 북경에 온 것을 아시고 검은 승용차에 저를 태워 집에 데려가서 북경오리를 대접하여 주신, 회의장이 있는 과학단지에서 근무하고 있던 조선족 어른께도 감사의 마음을 이 기회에 다시 전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를 보고 신기해 하고 특히 중국 여성들은 저에게 친절을 많이 베풀었습니다. 제가 지금보다 훨씬 젊었고 같은 황인종에다 서울에서 온 것을 알았기에, 1988년에 올림픽대회를 한성에서 개최한다며, 방문한 대부분의 우정상점(Friendship Store)에서도 여종업원들이 웃으면서 병이나 캔 음료수를 무료로 저에게 주었습니다. 음식점 여종업원들은, 서양인과 달리, 제가 웃으면서 고마워하며 퍼주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고 요리를 연이어 준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일행 중에는, 이 빠진 접시를 오해하여, 음식점에서 식사할 때 사제 빵을 가져와서 먹는 서양인들도 있었습니다.

북경회의에 참석한 우리나라 사람은 저 혼자였습니다. 만리장성, 원화원, 자금성, 명과 청의 황릉 등을 본 후 북경을 떠나, 서안, 계림, 광주, 향산으로 가는 여행에는 50명 정도 참석하였는데 동양인은, 일본 교수 1인과 저, 둘 뿐이었습니다. 어느 호텔에서나 제 방에서는 국제전화가 안되어 이 교수 신세를 여러 번 졌습니다.

서안에서 일본인 교수와 호텔 밖을 걷고 있을 때 자전거를 탄 중국인이 일어로 말을 걸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여자 있는 술집에 가지 않겠냐고 물어 창피하다고 답하여 주었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호텔방에서 창 밖을 보니, 대야 하나에 있는 같은 물과 수건 하나로, 여러 근로자들이 순서대로 세수를 하고 있어서 자못 놀랐습니다. 형형색색의 매우 작으면서도 매우 맛있는 만두들, 당 고종과 측천무후 묘소라는 높은 산봉우리, 양귀비가 온천욕을 즐기던 곳, 진시황릉 근처의 발굴지, 서안 성곽, 비림(碑林), 회교사원, 층마다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매우 높은 대안탑(大雁塔)이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 불탑은 높이 64m인 7층탑으로 삼장법사 현장이 조정에 건의하여 세운 것이랍니다. 탑이 있는 자은사 안의 불당안 부처님께 제가 혼자 절을 하고 시주를 하였더니, 안내인이 저는 절과 시주 덕으로 극락세계에 갈 것으로 믿고 있고 스님은 돈이 생겼다고 좋아한다고 설명을 하여 매우 멋쩍어 하고 있는데 일본인 교수가 절을 하여 기뻤습니다. 야구 모자(?)를 쓴, 이 젊은 안내인은 북경에서부터 계속 함께 다녔는데 이 청년이 있으면 잡상인도 우리에게 근접을 못하였습니다.

계림은 풍광이, 운남성에 있는 石林처럼 석회암 지대여서인지, 정말 예뻤습니다. 밤에 광주로 들어왔을 때 중국 음식에 싫증난 서양인이 우리를 안내하는, 중년의 영어 교사에게 광주의 특별 음식을 물었는데 “snake”가 있다고 하니 “Stake?”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라고 하니, 놀라서 다른 음식을 물었더니 “dog”이라고 하면서 광동성에서는 개고기를 주로 겨울에 먹는다고 답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물음이 없었습니다. 이 대화가 잊혀지지 않는군요. 아편전쟁과 관련된 곳, 또한 향산의 도교(道敎)본산이 인상 깊었습니다.

여행이 끝난 후, 저는 홍콩을 거쳐 서울로 왔습니다. 명동 대원각 건물에서 안기부 직원에게 귀국보고를 하였더니, 중국에서 불고 있는 건설 붐 보고는 묵살한 채, 제 중국방문을 비밀로 하라고 하여 격론 끝에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경제발전에 반비례하여, 친절하고 순박한 중국인들이 줄어들고 인심이 더욱 각박하여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 후, 중국을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지난 8월 운남성에서 적지 않은 거지를 보고 놀랐습니다. 점점 빈부차가 커지고 있으니 ---. 여하튼 20년 전에는 중국에서 음식도, 관광도 즐기면서 더욱 활발한 국제교류와 우호증진을 하게 되었고 건강의 기틀을 마련하였는데 이번의 중국여행은 저를 더욱 병약한 노인으로 만든 것 같아 매우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빠른, 정신적인 건강회복을 바라면서 ---


[후기] 20년전 여행이라 착각 때문에 잘못 쓴 말이 있으면 최창균에게 이메일(ckchoiyou@gmail.com)로 알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