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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오니 더욱 딸들 어렸을 때가 생각나서 글 3편,

(1) 예쁜 딸
(2) 우리집 가훈과 교육
(3) 아버지와 딸

을 올립니다. 앞의 두 글은 최창균이, 글(3)은 최창균 부인이 쓴 글입니다.  다음에 Longfellow의 두 영문시,

(1) THE RAINY DAY
(2) THE ARROW AND THE SONG

이 번역시와 함께 있습니다. 시(1)에서 역경(逆境)을 극복할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될 것이고, 시(2)의 마지막 구절을 보고 새로운 각도로 친구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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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의 글(서울공대, 83권, 109쪽, 1979)

                                                          예쁜 딸

                                                                                                            화학공학과   조교수         최창균



재작년 성탄절에 나는 곧 첫 아들을 보게 되리라는 꿈에 부풀어, 미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이러한 취지로 소식을 전하였다. 벗들은 아니 이 친구가 그렇게도 총각 시절에
“예쁜 딸, 예쁜 딸! ”
하더니 귀국하여 결혼 후 돌변하였구나 하면서 웃었을 것이다. 나 자신도 이상할 정도로 낮에도 밤에도 꿈에서까지도 득남 생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선적으로 결혼 전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기 위함이신지 딸을 보게 되었다. 진통, 제왕절개에 의한 분만에 곁들여, 득녀 소리에 너무나 심신 양면으로 괴로워 애써 눈물과 신음을 감추려 하였던 아내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몇 달을 신기로움 속에서 지내고 나니 이제는 또렷한 눈망울과 활짝 웃는 모습을 보이는 ‘예쁜 딸’로부터 나의 유년시절을 더듬어 보는 듯하여 점점 정이 쏠린다. 초인종을 누르고 집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두 손을 내밀며 소리 내어 웃으면서 나에게 안아달라고 재촉이 심하다.
“승은아, 아빠랑 뽀!”
하면 입을 귀엽게 내 앞으로 내미는 모습에 나는 하루의 피로를 잊는다.  

“어머니, 우리 딸이 어때요?”
"예쁘다, 예뻐…”
“아니 그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시지 말고 객관적으로 다른 애들과 비교하여 말씀해 주세요.”
“너희 집에 오면 승은이가 예쁘고 다른 집에 가면 그 집 애가 예쁘고…”
나는 기어코 내 딸이 제일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어 어머니와 집사람에게 계속 질문을 한다. 친지들에게도 보이고 싶어 추운 날씨에도 공연히 데리고 나가고 싶어질 때가 많다.
“승은아, 아빠 어디 있니?”
하면 나에게 손을 가리키며 방긋 미소 지을 때면 더욱 더 귀엽다.

하루에도 ‘예쁘다’, ‘똑똑하다’, ‘귀엽다’등등 좋은 칭찬만 듣는 지금이 얼마나 좋은 때인가? 아무 강요도 긴박감도 없이, 그저 먹고, 웃고, 재롱부리다가 잠이나 자고… 이 아이가 크면 어떤 여학생이 될까? 불암제 때 남자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던 여학생들, 또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악을 쓰던 그 여대생들 가운데 하나로 성장한다면…? 이제 일어나 걷기 시작하는 돌도 안된 내 예쁜 딸을 볼 때 간혹 걱정이 된다. 부디 꿋꿋이 무럭무럭 자라 가정교사, 과외공부 모르고 자기 스스로 노력하는 창의력 있는 상냥한 여학생이 되어서 엄마, 아빠의 자랑이 지속될 수 있기를…

“승은아, 아빠랑 뽀!”

Posted at 2007-02-24 Sat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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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의 글: 慈陽 창간호))



우리집 가훈과 교육

최창균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

[화학공업과 기술, 12(5), 447-448, 1994]


지금부터 4년 4개월 전 1990년 3월 25일 오후 1시30분에 우리집 가족 회의가 처음 개최되었다. 이날은 내 부친의 43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는 두 딸과 집사람,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네 사람은 다음과 같은 가훈과 좌우명을 정하기로 합의하였다.

가훈(家訓)
성실(誠實 : sincerity)
인의(仁義 : humanity)
정직(正直 : honesty)

좌우명(座右銘)
역지사지(易地思之 : 처지를 서로 바꿔서 생각함)

위의 좌우명은 우리의 회의장소, 즉 집의 거실에 걸려있는 액자 속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 때 큰 딸은 중학교 1학년생, 작은 딸은 국민학교 5학년생이었다.

이 당시의 기록을 보면, 서기인 큰 딸이 다음과 같이 적어놓은 글귀가 있다.

“앞으로 더욱 가훈을 잘 지켜 화목하고 모범된 가정을 만들자.”

또한 내가 글자 하나 하나를 영어까지 섞어가며 딸들에게 설명한 내용이 개조식으로 개재되어 있다. 이를 대략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성실이란 정성스럽고 참되어 거짓이 없음을 뜻하니, 일(work)에 임할 때 이를 염두에 두고 하여라. 너희들이 맡은 일은 현재 공부이니 공부를 성실히 하여라.”
“인의는 어질고 의로움을 뜻하니, 다른 사람에게(you and them) 베풀어라.”
“정직은 바르고 곧음을 뜻하니, 자기자신, 즉 ‘내(I)’ 마음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

과연 위의 설명이 확실한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역지사지’와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딸들에게 말한 것이다.

나는, 절대적인 家長이셨고, 무서운 또한 엄한, 한때 지주이셨던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자라면서 나는 성실과 정직에 대하여 귀가 아프도록 들었고, 간혹 종아리를 회초리로 맞으면서, 仁義禮智信과 五倫을 익혔다. 따라서 은연 중에 우리집 가훈이 내 몸에 배어있는 것 같다.

가족회의가 개최된 것은 우리집 가훈의 제정일이 처음과 마지막이었다. 가훈을 정하여 놓으니 가족회의가 불필요하여졌기 때문인가 보다. 그러나 딸들은 이후 점진적으로 공부에 시달리게 되어 측은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속칭 입시전쟁을 겪을 날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큰 딸과 작은 딸이 사이 좋게 노는 시간이 줄어들어, 이제는 내가 그렇게 부러워하였던, 자매간의 다정한 대화도 눈에 잘 뜨이지를 않는다. 왜 우리는 계속하여 ‘입시지옥’을 겪고 있을까? 이는 청소년들에 대한 진로지도가 정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인의와 정직의 결핍증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들은 대부분 자신의 자녀들이 동년배 누구보다도 똑똑하다고 맹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면 교사 탓으로 돌리고 있다. 따라서 여유만 있으면, 가정교사와 학원의 힘을 빌리려고 한다. 최근 국민학생에 대한 일반과목 과외 교습학원 설립의 자유화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그 일 면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사가 과로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인의를 학생들에게 체험시킬 과외활동을 장려하고 학교 안이 학과목 교육의 장이 되도록 하여, 智德體全人교육이 언젠가는 초.중.고등학교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하여는 우리 모두의 사회에 대한 진정한 봉사정신과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절실히 요구된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양반만이 공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1910년에 양반가구가 서울에 2.1%, 경기 0.8%, 충남 10.3%, 충북 4.5%, 경북 3.8%, 경남 0.4%, 전북 1.0%, 전남 0.5%, 황해 0.3%, 함북 0.8%, 함남 0.4%, 평북 0.2%, 평남 0.1% 강원에 1.1%이었다. 1906년에 서울에 20여만명을 포함하여 한반도에는 1,302만명 정도가 살고 있었던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지금은 양반가구 100%에, 한반도의 전체인구는 1906년에 비하여 5배 이상으로 증가 되었고, 대학을 나와야 진로가 보인다고 믿고 있으니, 치열한 대학입시 경쟁장이 된 것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더욱이 GNP증가에 반비례하여 인심은 각박하여지고 있으니 인의와 정직을 생각할 정신적 여유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연유로, 청소년들에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과도하게 작용하면 청소년들의 심성이 파괴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사실이다. 스트레스가 없으면 무사안일에 빠지게 되니,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의 상태가 中庸之道에 있도록 청소년들을 지도하고 올바르게 평가하여 올바른 진로에 있게 하고 그들의 창의력을 북돋아 주어야 우리도 G7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百年大計라고 말할 수 있는 교육정책이 설정되어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 입시위주의 교육은 하루 속히 청산 되어야 할 것이다.

대학생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정직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투기에만 신경을 쓰게 되고, 자신감과 협동심이 대학에서 배양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이곳 서울대학교 학생들 가운데 많은 학생들이 장학금 신청을 할 때 보면 극빈자에 가까운 경제상황으로 집의 월수입을 기재하고, 숙제를 베끼어 제출하는 학생들도 많다. 최근에는 중앙도서관 안에서 자기 자리에 앉았다고 폭력을 휘두른 사건도 있었다. 언제부터 지정좌석이 생겼는지…. 바로 인의의 결핍증 노출 현상이다. 그러나 백혈병 친구를 도와주기 위하여 발벗고 나섰던 학생들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일들이 더 많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미덕을 믿는다. 서울대학교는 누구나 자녀를 입학시키고 싶어하는 선망의 대학교이다. 따라서 서울대학교에서 앞으로 더욱 많은 미담들이 나오고 더욱 많이 능력의 배양이 이루어져서, 사회에서 나쁜 의미의 학연이나 학벌 운운의 말이 소멸되도록, 사회에 진출하여서도 계속적으로 자질 향상을 통하여 능력발휘를 하여야 될 것이다.

나 자신도 교육을 맡고 있는 교수의 입장에서 우리집 가훈과 좌우명을 연결 지어 생각할 때가 많다. 학생들을 보면서, 교직원간, 너무 많은 회의나 모임 등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나는 우리 가족과 토의하여 정한 가훈과 좌우명을 적용시켜 보면 마음이 편하여 질 때가 많다. 학생들을 성실하게 가르치고 그들에게 학문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인 인의를 심어주고 정직함을 고착시켜 졸업시킨다면, 언젠가는 임기응변의 많은 ‘구호’, 거창한 ‘교육이념’, ‘홍익인간’, ‘교육헌장’ 등을 외우게 하느라고 고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언제나 상대방을 대할 때에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그 사람과 나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말한다면 많은 오해가 이해로 전환되고 따스한 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많은 경우에, ‘아, 내가 이 일을 맡아보니 나라도 그렇게 했겠구나.’ 하며 불신과 의문을 없애게 될 것이다. 물론 전제조건으로 상대방이 성실성과 정직성으로 나를 대할 때의 이야기이다.

회사에서도 회의와 토의를 거쳐 방향 설정을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내 자신의 의사만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회의나 토의가 불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잘 훈련되고 교육을 잘 받은, 성실한 구성원들의 인의와 각자 개인의 정직함이 어우러져, 안건이 도출되고 토의 된다면, 그 결과는 회사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노사 분규나 인사문제, 업무상 불합리성이 거론될 여유도 없을 것이다. 상호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여기에 내가 5년여 동안 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공정연구실에서 모셨던 故 윤창구 박사[경기 59회 윤관구의 4촌형]의 ‘공장과 기계와 사람과’ 라는 시를 인용하겠다.

공장과 기계가 엔지니어들 생각대로 돌아간다면
      세상에 노동자가 필요 없겠지요
생산과 관리가 사업가들 생각대로 돌아간다면
      세상에 엔지니어가 필요 없겠지요
사업과 거래가 경제학자들 생각대로 돌아간다면
      세상에 사업가가 필요 없겠지요
산업과 경제가 정치가들 생각대로 돌아간다면
    세상에 경제학자가 필요 없겠지요
사회와 정치가 사람들 생각대로 돌아간다면
    세상에 정치가가 필요 없겠지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기의 적성과 본분이 주어져 있으니, 이를 교육을 통하여 개발하고, 적재적소에서 긍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근무하면서 협력하고 회사발전에 기여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끝으로 능력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올바른 소리를 올바르게 전파시키고 능력개발에 힘쓸 때에, 회사는 물론 가정과 사회에, 나아가서 국가에, 또한 우리의 후손에 기쁨과 번영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1994년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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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딸
                                                                  김유현
                                                        [21회 최창균 동문의 부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동창회 발행 “화공회보 37호 18-19쪽 (1993.10)”

[이 당시 동창회(회장 장홍규 대림 사장) 간사장으로 열심이었던
박헌렬 교수(중앙대)가 동창회의 활성화 방안의 하나로,
동문소식에 동문가족란을 신설하고, 요청하여 쓴 글임]



우리 주변에는 '어머니'를 주제로 쓴 글이나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다. 나도 중학교 시절에 방학 숙제로 '어머니’란 글을 써서 교내 신문에 실리게 되었는데, 내 어머니는 그 신문이 누렇게 변색될 때가지 백(bag) 속에 넣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딸 자랑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어머님 은혜, 어머니 날이란 용어가 퇴색되면서 어버이란 단어가 부각되고, '부권상실 ' '아버지가 없다 ' 등의 많은 슬로건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는 너무 마르셔서 갈비씨란 별명을 가지신 분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화공'이란 단어를 써왔다.
"아버지 직업은? "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이십니다."
"사범 대학 나오셨니? "  
"아닙니다. 공대 화공과 나오셨어요."
이러한 물음이 오갈 때부터 나는 화공이란 단어와 인연을 맺어 왔다. 아버지는 내가 무릎에 기어 오르면,
"고명딸 오냐 오냐 하면, 상투 꼭대기까지 오른다."
하시면서 나를 내려 놓으시고는 하셨지만 내가 다리가 아프다면 다리를 주물러 주셨고, 개구쟁이, 욕심쟁이 두 남동생들에 치어 먹을 것도 못 먹는다며, 과일을 몰래 숨겨 부엌 뒤로 나를 불러 먹여주시는 자상한 아버지이셨다. 교통이 불편한 변두리에서 시내로 다니는 우리 가족은 새벽 4시면 집을 나오는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내 책가방이 무겁다며 전차 타는 곳까지 꼭 내 가방을 들어주시고 나는 아버지의 빠른 걸음에 보조를 맞추느라고 뛰다시피 쫓아가고는 하였다. 아버지보다 먼지 전차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가면서, 그러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금방 잊어버리는 일들이 어린 나에게 생기고는 하였다. 까만 세단 차 뒷좌석에 앉아 양말을 신는 친구들, 그렇게도 어느 지점까지만 차로 와서 걸어오라고 조회 시간마다 훈계하시는 체육 선생님의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 곁을 스쳐가는 자가용 차들에 나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연결 지을 때가 적지 않았다.
"왜 나는 부자인 아버지 - 사장님의 딸이 아닐까?"
"우리 아버지처럼 가난한 선생은 되지 말아야지......"
이러한 원망과 비난 섞인 망상을 안은 채 고교시절을 보냈다. 과외며, 학원이며 하면서 돈을 자유스럽게 쓰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출세', '명예', '돈', '야심'이란 우리 아버지와는 너무 먼 쪽으로 마음을 보낼 때가 많았다. 대학시절 내가 아르바이트로 탄 월급으로 학교 앞 상점에서 넥타이를 사서 매어 드리면 아버지는
"딸 덕분에 여선생님들이 나를 젊어졌다고 야단이다."
하시며 환하게 웃으시고는 하셨다.

아버지는 자식과 가정, 학생들과 학교 외에는 모르시는 분이다. 이러한 아버지 곁을 떠난 후, 나는 아버지와의 행복하였던 나날을 잊은 채 둘째 아이를 낳게 되었다.

연년생 큰 딸애를 돌보는(?) 남편 대신 방학 중인 아버지가 제왕절개로 입원한 나를 돌보기 위해서 병원을 드나드셨다. 망원동에서 서울대 병원까지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버스로 아침에 오셨다가 저녁에 가시고는 하였다. 사흘째 되던 날 아버지는 저녁 무렵에 가시면서 위급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여 달라고 옆의 산모 남편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신 모양이다. 링겔 주사기를 꽂고 끙끙 앓고 있는 나에게 밤 9시쯤 젖이 돌기 시작하였고 나의 신음 소리는 둘째도 딸을 낳아 시름에 잠긴 소리와 합세하여 높아만 갔다. 옆 산모 남편이 내일 일찍 오시라고 우리 친정에 전화를 하니 지금 아버지가 귀가하셔서 저녁 식사를 하신다고 하였는데, 밤 10시가 넘어 깜깜한데 젖 짜내는 축유기 2개를 사들고 아버지가 급히 병원에 오셨다. 아버지를 뵙는 순간 나는 목이 메었다. 아버지는 뜨거운 찜질을 하여야 한다고 뜨거운 수건을 짜서 밤새 나에게 건네주셨다. 뜨거운 수건을 가슴에 대고 누워있을 때 흘러내리는 젖보다 내 눈에서 나오는 뜨거운 눈물이 더 많았을 것 같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더 풍요로운 富를 갈구하였던 나의 이기심‥‥‥. 밤새 한없는 반성과 후회의 눈물이 뜨거운 수건을 함께 적셨다.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내가 약대를 나와 아버지가 정년 퇴임하시면 소일거리로 약국에 나오시게 해 드려야지‥‥‥”
하고 먼 훗날 일로 생각하고 살아온 나에게 어느 날 백발이 되셔서, 아버지는 정년퇴임식 단상에 꽃을 달고 앉아 계셨다. 또 한번 아버지의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을 절감하며 나는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자꾸 손수건에 적셨다.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나를 위하여,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 손녀들의 귀가 시간에 꼭 전화를 걸어 아이들을 달래주시는 아버지 -나는 그 사랑 앞에 굴복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 부모의 말도 잔소리로, 사랑도 부담으로 여기는 이 세태 - 권모술수로 출세, 명예, 돈을 함께 소유하려는, 또한 법을 어기면서도 거침없이 남을 핍박하는 일부 지성인들을 가끔 본다. 그러나 깨끗하고 욕심없이, 헌신전인 사랑을 베풀어 딸의 마음속에 이렇게 진정 어린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하여 간혹 눈물을 핑 돌게 하고, 또한 진한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여 주는 아버지는 과연 ...... 아버지에 대한 나와 같은 이미지를 나의 두 딸도 갖고 살기를 기도 드리고 있다.

우리 딸들의 아빠도 화공인이다. 나는 우리 애아버지도, 내 아버지처럼, 출세나 명예보다는 사랑으로 이 가정, 우리 사회, 학교를 화합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화공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다. 화공인이란 오랜 인연속에......



註] 최창균 부인은 경기여고 59회이며, 한독약품(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이사로 근무하다가 정년 퇴직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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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을 읽고 미국에 있는 친구가 보낸 서신]

How are you?


Read yours and your wife's article on KG 59.

Becoming old (?), your wife's article wetted both of my eyes and my
wife's. Very moving one!

Wish my sons could understand Korean, so they could read them.

Hope your health becomes better. Will contact you, once I visit there in
May.


Best rega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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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



THE RAINY DAY
by Longfellow


The day is cold, and dark, and dreary
It rains, and the wind is never weary;
The vine still clings to the mouldering wall,
But at every gust the dead leaves fall,
  And the day is dark and dreary.

My life is cold, and dark, and dreary;
It  rains, and the wind is never weary;
My thoughts still cling to the mouldering Past,
But the hopes of youth fall thick in the blast,
  And the days are dark and dreary.

Be still, sad heart! and cease repining;
Behind the clouds is the sun still shining;
Thy fate is the common fate of all,
Into each life some rain must fall,
  Some days must be dark and dreary.

< 비 오는 날 >

          날은 춥고 어둡고 쓸쓸한데
          비 내리고 바람은 그칠 줄 모르네
          담장넝쿨은 한사코 낡은 벽에 매달리나
          모진 바람 불 때마다 죽은 잎새 떨어지고
          날은 어둡고 쓸쓸하기만 하네

          내 인생도 춥고 어둡고 쓸쓸한데
          비 내리고 바람은 그칠 줄 모르네
          내 생각은 여전히 사라지는 과거에 매달리나
          청춘의 희망은 우수수 떨어지고,
          나날들은 어둡고 쓸쓸하기만 하네

          진정하거라, 슬픈 마음이여! 한탄하지 말아라
          구름 뒤에 태양은 아직도 빛나나니
          그대 운명도 뭇사람의 운명과 다름 없고
          누구에게나 얼마만큼의 비는 내리고
          어둡고 쓸쓸한 나날들 있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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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ROW  AND THE SONG
by Longfellow
                            

I shot an arrow into the air,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For, so swiftly it flew, the sight
Could not follow it in its flight.

I breathed a song into the air,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For who has sight so keen and strong,
That it can follow the flight of song?

Long, long afterward, in an oak
I found the arrow, still unbroke;
And the song, from beginning to end,
I found again in the heart of a friend.

< 화살과 노래>

나는 하늘을 우러러 화살을 쏘았네
화살은 빛살처럼 날아서
어딘가로 사라지고
화살이 머무는 곳 아는 이 없었네

나는 하늘을 우러러 노래를 불렀네
노래는 하늘을 맴돌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노래가 머무는 곳 아는 이 없었네

먼 훗날 참나무 등걸에
화살은 부러지지 않은 채 박혀 있었고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