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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5일장과 이효석 문학관 탐방기

Posted at 2008-04-14 Mon 09:16

 

지난 금요일, 4월11일 오전 10시경에 김래현 교수가 정선에 함께 가자고 전화를 하였다. 나는 흔쾌히 혼자라도 가겠다고 답하였다. 후에 연락이 된 집사람도 같이 가겠다고 하여 두 부부가 우리집에서 오후 1시30분에 정선으로 출발하였다. 우리부부는 작년 2월 사북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는 사돈의 퇴임식에 참석하였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선읍에 들러 아라리촌을 보고 읍내를 한바퀴 돌아보고 읍을 떠난 적이 있었다. 조양강 연변에 위치한 읍이 깨끗하고 조용하여 인상 깊었었다.

진부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떠나 산골길로 들어서자 이른 봄 날씨로 격변하여 진달래꽃이 보이는 곳이 드물었다. 이제는, 수해의 상처가 보였던 작년과 달리, 예쁜 신축 민가들이 보이는 조양강을 따라 오후 4시가 지나 정선읍에 도착하였다.  우선 읍 북쪽에 위치한 숙소에 짐을 풀고 우리는 아라리촌을 방문하였다. 정선의 옛 주거 문화를 재현한 아라리촌은 여전히 입장료가 없었다. 양반을 희화시킨 작품들이 재미 있다. 돼지족발로 유명한 음식점에 들어가 나는 오랫만에 족발을 실컷 먹은 후에 궁합이 잘 맞는다는 메밀국수는 조금 들었다. 많이 먹어야 되는데 ---

밤 7시가 지나 숙소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않아 김교수 부부가 맥주와 과자류, 토마토를 가져 왔다. 요즈음 거의 술을 먹지 않는 나는 냉수로 함께 건배를 하였다. 내가 꾸벅꾸벅 조는 것을 본 김교수 부부가 떠난 8시경부터 나는 아침 6시30분까지 내쳐 잤다. 이렇게 내가 오래 잔 것은 오랫만이었다.

4월12일 아침에 기상 후, 숙소 근처의 시골길을 1시간 넘게 걸었다. 예전의 시골집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집이 깨끗한 도시형이고, 버스 정거장도 있고 길도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어서 이곳 농촌의 발전을 실감하였다. 수탉 울음소리는 여전히 다정한 느낌을 주었으나 개 짖는 소리는 여전히 듣기 싫었다. 개 때문에 근처 작은 저수지 위의 숲속에 있는, 작은 산장 방문을 포기하였다. 오늘 작은어머니 생신잔치가 점심에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우리는 아침식사 후 바로, 기존 정선선 기차의 종착역인 북평면 구절리에서 아우라지역까지 운행하는 레일바이크 표예매를 하기 위하여 구절리 매표소까지 일찍 갔으나 마지막으로 운행되는 바이크의  저녁표 두 장만 남아있다고 하여 포기하고 아우라지로 향하였다. 양수인 송천(북쪽)과 음수인 골지천(동쪽)이 만나 "어우러진다"는 뜻의 아우라지는 오래전 서울로 뗏목이 출발하던 곳이다. 지금은 수량이 적어 뗏목이 계속 떠내려 갈 수가 없게 되었으니 ---

정선 전래의 토속적인 5일장(1966년 2월17일 개장; 매월 2, 7, 12, 17, 22일, 17일)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지나서였다. 이때 광장에서 "정선아리랑" 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정선이리랑은 고려왕조가 망하자 不事二君을 다짐하고 남면 거칠현동에 은거한 7현(고려 충신인 전오륜,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신안, 변귀수, 김우)이 당시에 전해지던 정선아라리 곡조에 한시를 지어 율창한 것에서 기인하였다고 한다. 정선문화예술관에서는 2000년부터 장날(오후 4:40 - 5:20)에 정선아리랑창극이 공연되고 있다. 장날인 오늘, 시장의 야외공연장에서는 순두부와 엿이 무료 제공되고 있었다. 11시30분경 시장을 떠나 반가운 할미꽃 모종을 산 후, 원래는 아우라지역 근처의 동박골식당에서 점심을 들 예정이었으나, 우리는 평창으로 향하였다.

효석문화마을에 오후 1시에 도착한 우리는 주음식으로 막국수, 그리고 메밀말이와 메밀묵을 들었고 집사람이 음식값을 지불하였다. 집사람이, 회사 정년퇴임 후, TV에서 고향관련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아, 이 마을에서 메밀국수를 들고 싶어하여 여기까지 왔으니 ---. 이효석문학관에서는 성인 1인당 2춴원을 받고 있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선배이신 可山 이효석(1907-1942)은 평창군 봉평면 출생으로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대의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교육자가 된 가산은 초등학교까지의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을 잊지 못하고 이를 배경으로 대표작인 "모밀꽃 무렵" 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용평에 오는 도중 장평을 지날 때 이 소설 이야기가 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었다. 문학관 근처에 있는 그의 생가를 본 후 우리는 서울로 향하였다.

1박2일동안 지방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산 증거들을 보고 나서 나는 매우 흐뭇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또 김 교수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