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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이 주: 커톨릭 사이트에서 퍼온 글이다.  서평으로 쓴 글이지만 책의 내용이 매우 잘 요약되어 있다.  아래 표시된 대로 이 책은 140여 페이지의 짧은 책이다.   퍼온 이도 읽어 보았는데 아래 서평에서 크게 보탤 것이 없어 보인다.  조금 오래된 글이지만 한번 읽어볼만 하다고 생각되어 올려 본다.  특히 좌파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한번 읽고 생각해 볼 일이다.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지은이 : 복거일   출판사 : 삼성경제연구소
143쪽



착한 사람에 대해 무정하게 굴어 괴롭히는 세상의 음모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자본주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성당 강론의 말씀이나 교구주보의 글 가운데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자유시장경제』라는 단어는 별로 그런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자본주의』와『자유시장경제』는 똑같은 것인데도 후자를 별로 비난하지 않는 점을 보아도 냉철한 판단 대신 감성적 직관이 우리 태도를 좌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가 경제나 경제학사(經濟學史)쪽에서 주로 쓰는 용어라면『자유시장경제』는 정치나 언론에서 주로 쓰는 용어지만 똑같은 것이다.
  
  우리 주변의 세상 사람들의 생활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원죄를 짓고 끊임없이 회개해야 하는 인간을 어찌 나쁜게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가장 덜 나쁘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소박하고 착한 사람들의 걸어가는 길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나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을 얼마나 넉넉하게 해주느냐 얼마나 자유롭게 해주느냐의 잣대로 재어보니, 인류가 시험해본 시스템 중에서 가장 덜 나쁜 제도임이 거듭 거듭 입증되고 있다.
  자본주의를 다른 시스템 예컨대 사회주의에 비하여 불의하다고 보는 지식인들의 착오를 분명히 밝혀주는 책을 한권 소개하고자 한다.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라는 제목의 책이다.
  저자 복거일은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무역회사에서 근무하였으며 소설가이며 동시에 이론가이다.
  자기의 경험과 통찰력으로 픽션의 방법으로 인생을 논하는 소설가이다.
  그는 경제, 사상, 역사, 심리학, 인문학, 자연과학에 걸쳐 깊은 통찰력을 축적하고 있으며, 영어로부터 한문고전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어휘력으로 남이 들어가지 않는 미답의 경지에서 글을 쓰고 있는 이론가이다.
  복거일을 몸소 만나보면 천성적으로 과장과 선전과 선동과는 가장 먼거리에 있는 선비이다. 그의 조용한 말에 누구든지 마음이 편해진다.
  그렇지만 복거일은 이 시대의 가장 중대한 이슈를 붙잡고 이치를 따지고 있다. 그가 요사이 쓴『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삼성경제연구소 연구에세이 014, 144쪽)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 책머리에 복거일은 1923. 노벨문학수상자이며, 아일랜드 시인인 W.B 예이츠의 경구를 써놓고 시작한다.
  『가장 좋은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지 못하지만, 가장 나쁜 사람들은 열정적 강렬함으로 차있다』
  
  복거일은 서문에서『이 책은 자본주의가 효율적이어서 사회적 번영과 개인적 자유를 함께 허여할 뿐 아니라 자연스럽고 정의로운 체제라는 사실을, 실은 그런 자연스러움과 정의로움에서 그것의 효율이 나온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시도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지킬 수 없다』고 미리 자기의 뜻을 밝히면서,『자본주의에 관한 논의에서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사람의 천성에 관한 이론이다』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는『자본주의 체제는 비자본주의 체제들보다 효율적이다』『1990년대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져 비참한 모습을 드러낸 뒤, 자본주위의 효율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은 드물어졌』음에도 불구하고『그리고 자본주위의 반대자들이 되도록 자본주의의 효율을 얘기하지 않고 다른 결점들을-실재하는 것들이든 아니면 근거 없는 것들이든-들어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것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부의 분배가 평등하지 못한 체제이므로,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의롭지 못하다는 얘기다』라고 자본주의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하늘이 무너져도 정의가 시행되도록 하라(Fiat justitia et pereat mundus)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드 1세의 좌우명(motto)보다 더 힘찬 구호가 있었던가?』라고 반문한다.

  그는『자본주의는 효율적이지만 정의롭지 못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는 현상에 대하여『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른 생각이다. 자본주의는 정의로운 체제다. 실은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체제보다 정의롭다』『자본주의 사회들에서 사람들이 풍요와 자유를 누리지만, 공산주의나 국가사회주의 사회들에선 사람들이 풍요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와 법의 보호를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명백하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일단 공산주의나 국가사회주의와 같은 체제들보다 정의롭다는 결론은 피할 길 없다』고 한다.
  
  먼저 복거일은『자본주의의 자연스러움』에서 정의로움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대부분 재산을 시민들이 소유한 경제 체제를 뜻한다. 반면에, 자본주의에 대한 대표적 대안인 사회주의에선 거의 모든 재산들을 사회가 정부를 통해서 직접 소유하고 시민들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공동소유라는 형태로 간접적으로 소유한다.』『소유권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누구도 자신의 힘과 시간과 돈을 들여서 재산의 형성에 착수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질서로 삼는 자본주의는 자연스럽다.』『자본주의가 자연스러우므로, 사회가 부를 축적해서 문명이 어느 정도 발달하면, 으레 원초적 자본주의가 나온다.』『반면에,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복잡하다. 디폴트 스테이트인 자본주의를 많이 허물고 대신 인위적 구조를 세워 유지하려면, 개인들의 선택들은 대신할 사회적 선택들을 내놓을 기구들과 개인들에게 그런 사회적 선택들을 강제할 수 있는 기구들이 필요하다. 그런 기구들은 많은 비용이 들어서 경제에 큰 짐이 될 뿐 아니라 강대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어 시민들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대조해본다.

  『물론 순수한 자본주의는 나온 적도 없었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가 사회를 이루어 사는 한, 사회적 선택은 필수적이고 따라서 순수한 자본주의는 실재할 수 없다. ‘혼합 시장 경제(mixed market economy)'라는 말이 일깨워주듯, 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경제 체제들도 지금 사회주의적 특질들을 짙게 띠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우월성에 대한 반론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음에 복거일은 자본주의의 핵인 재산, 재산권의 본질을 논한다.
  
  『그래서 노직은 “노동의 소득에 대한 세금은 강제노동과 비등하다(Taxation of earnings from labor is on a par with forced labor)"고 말했다』
  『재산권은 흔히 인권이라 불리는 것에 필수적이며 핵심적이다』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며 인권이 없다. 그러나 노예가 주인에게 진 의무가 명확하게 규정되고, 그래서 그가 만들어낸 것들 가운데 그 의무를 이행하고 남은 것들을 자신의 재산으로 삼을 수 있게 되면, 그는 자신의 몸의 일정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 주인이 되고 자신의 인간성과 인권을 회복하기 시작한다』고 간명하게 쓰고서,『재산권은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만일 재산권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다른 면들에서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정의로울 수 없다』라고 설명한다.
  
  그는『재산권의 정의로움』을 이렇게 말한다.
  
  우선 재산권은 어디서 나와야 정의로운가에 대하여 그는『자본주의 사회들에서 재산에 대한 권리는 기본적으로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어떤 재산의 형성에 공헌한 사람들이 공헌도에 따라 그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그런 관행은 아주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우리는 그것말고 다른 어떤 기준도 이내 생각해낼 수 없다.

  실은, 사유재산이나 재산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이념들이나 사회들도 재산의 소유는 그것의 형성에 대한 공헌을 근거로 삼아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가 노동가치설에 바탕을 두었다는 사실에서 이 점이 또렷이 드러난다.

  노동가치설(labor theory of value)은 재산의 가치가 본질적으로 노동에서 나온다는 주장이다. 노동가치설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사회주의가 바탕을 둔 노동가치설은 애덤스미스에서 비롯되었다. 혼란스럽게도, 그는 실제로는 세가지 가치 이론들을 주장했으니, 노동량가치설(labor-quantity theory of value), 노동비효용설(labor-disutility theory), 그리고 생산비설(cost-of production theory)이 <국부론>에서 언급되었다.

  리카도(David Ricardo)는 이 세 이론들 가운데 노동량가치설을 받아들였고, 마르크스를 포함한 사회주의 주류는 리카도의 학설을 그들의 경제 이론의 근본으로 삼았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모두 그것들을 생산하기 위해 사람의 노동력이 쓰였고, 그것들 속에 사람의 노동이 축적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들 모두에 공통된, 사회적 물질의 결정들로서, 그것들은 가치다-상품 가치다” 그리고 그 이론에 따라, 재산은 그것의 생산에 기여한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사회주의자들은 주장했다』라고 해설을 먼저 하고나서,『노동량가치설은 물론 그를 뿐 아니라 아주 원시적인 이론이다. 실은 리카도에 의해 주장되었을 때 이미 원시적이었던 이론이다. 객관적 가치가 아니라 주관적 효용으로 가격의 결정과정을 밝히려는 노력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부론>의-그리고 특히 리카도의 <정치경제와 조세의 원리>의 - 영향이 뚜렷해지기까지 풍미했던 것은 ‘주관적’ 또는 ‘효용’ 가격 이론이었음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국부론>이 출간된 1776년 뒤에도 그 이론은 유럽 대륙에서 우세했으며, 페르난도 갈리아나와 장 바티스트 세이 사이엔 끊어지지 않은 발전의 계보가 있다. 케네, 베카리아, 튀르고, 베리, 콩디약, 그리고 많은 덜 중요한 학자들이 그것을 점점 확고하게 세우는데 이바지했다. 그들은 모두 가격과 가격 결정 메커니즘을 그들이 경제활동의 근본적 목적이라고 생각한 욕구들의 충족에 직접 연결시켰다.

  1730년 또는 1731년에 쓰여진 논문에서, 스위스의 수학자이자 자연과학자였던 다니엘 베르누이는 한 개인에 대한 추가적 1달러의 경제적 중요성은 그가 이미 가진 달러의 수에 역비례한다는 가정을 제시했다. 이것을, 베르누이가 한 것처럼, 한 개인의 순자산 전체의 화폐가치가 아니라 소득에 적용하면, 우리는 이 추가적 달러를 후세의 용어로 한계 달러라고 불리게 된 것과 이내 동일시하게 되는데, 한계효용의 통계적 측정은 우리 시대에 어빙 피셔와 랑나르 프리시에 의해 시도되었다.
  
  리카도가 푸는데 실패한 잉여 가치(surplus value) 문제는 본질적으로 노동량가치설이 그른 이론이었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마르크스는 그 문제를 착취 이론으로 풀려고 했다. 경제학이 발전하자, 노동량가치설은 논파되었고 끝내는 마르크스의 경제학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슘페터는 그런 사정을 이렇게 기술했다.

  1920년대에 점점 많은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이, 마르크스에 대해 최상의 존경을 표하면서도, 그의 순수한 경제학은 노후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본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들의 신조로 남았고, 마르크스주의자는 그들의 충성으로 귀속처로 남았지만, 순수하게 경제적인 문제들에 있어선 그들은 비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주장하기 시작했다. 말을 바꾸면, 그들은 경제이론이 추리의 기술이고, 그런 기술은 성격상 중립적이며, 마르크스주의 가치설을 위해서 또는 한계효용 가치설에 맞서 싸움으로써 사회주의를 위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잘못이라는 진실을 깨달았다.』고 소개한다.
  
  복거일은『이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 이론은 논파되었고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주장인 착취이론도 이론적 바탕을 잃었다. 그러나 재산은 그것의 형성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옳다는 사회주의의 근본적 가정은 오롯이 남았다』고 쓰고서 아울러『사회주의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회주의의 그런 근본적 가정보다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더 잘 옹호하는 것도 드물다』고 지적하고 있다.
  
  복거일은『재산권과 도덕심』의 상관관계도 파고들어서
  
  『원시 공동체들에선 재산들이 공유되는 정도가 현대 사회들에서보다 훨씬 크지만, 재산권은 공헌의 원칙을 존중한다. 사냥을 했을 경우, 짐승을 잡은 사람이 고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즉 어떤 물건의 생산에 기여한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고 분배하는 권리를 지닌다.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그런 원칙을 본능적으로 따른다. 아주 어린아이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의사표시는 자신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몸짓들이다. 그런 몸짓들은 어른들의 재산권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훨씬 이전에 나온다』고 쓰고 있다.
  
  그는『상호 이타주의』의 개념으로 도덕적 감정을 논하고 있다.
  『개체들의 이기적 행위들은 상호적 이타주의를 낳는다. 그러나 이 과정은 아주 단순하고 직선적이진 않다.』『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내 애덤 스미스의 잘 알려진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이처럼 상호적 이타주의는 본질적으로 개체들의 자기 이익 추구에서 나왔다. 그것은 복잡한 사회의 성립과 유지를 가능하게 한 힘이었다. 자연히, 상호적 이타주의는 도덕심과 성격과 유래에 관해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라는 도덕감정의 원류를 논하면서,『여기서 주목할 것은 상호적 이타주의의 수단이 본질적으로 재산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에게 잘해주려면, 누구나 자신의 시간과 정력과 구체적 재산을 들여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기회비용을 뜻하며, 그런 뜻에서 이타적 행위는 자신의 재산을 상대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추리를 요약하면, 상호적 이타주의는 양 당사자들이 재산을 서로 제공하는 것을 뜻하고, 그런 재산의 상호 제공 약속을 어긴 사람들에게 대한 도덕적 분개가 사람들이 지닌 정의감의 본질이자 원초적 형태였다.』라고 쓰고 있다.
  
  복거일은 분배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재산권을 핵심적 제도로 삼는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의롭다.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을 재산에 대한 권리의 근본으로 삼는 제도보다 더 정의로운 제도를 우리는 생각해내기 어렵다.』『재산권이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견해는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에 관한 ‘역사적 원칙들(historical principles)'을 따른다.』『자연히, 자본주의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결정적 놀림감으로 꼽는다. 그리고 구성원들 사이의 평등을 보다 잘 이룬다는 점을 들어 대안적 체제들을 내세운다. 그러나 평등은 좀처럼 모습을 또렷이 드러내지 않는 개념이다. 그래서 그것은 정의하기가 무척 어렵고 쓰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것을 뜻한다.』『사회주의의 이상인 “각자의 필요에 따라 (to each according to his needs)"는 … 보기보다는 평등하지 못하니,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각자의 몸무게에 따라”나 “각자의 목청의 크기에 따라”와 같은 구조를 가졌고 그것들만큼 평등하다.』는 것이다.
  
  『평등을 추구하는 정책들의 정당성에 대한 반론은 먼저 공리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다. 공리주의자들은 정부는 사회 구성원들의 효용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맨큐는 우화를 통해서 공리주의적 반론을 멋지게 요약했다.
  『피터와 폴을 사막의 다른 곳들에 갇힌 목마른 여행자들이라고 가정하자. 피터의 오아시스엔 물이 많다 ; 폴의 오아시스엔 물이 조금밖에 없다. 만일 정부가 비용을 치르지 않고서 한 오아시스에서 다른 오아시스로 물을 옮길 수 있다면, 정보는 그 두 곳들의 물을 양을 같게 함으로써 물에서 얻는 전체 효용을 극대화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새는 물통만을 가졌다고 가정하자. 정부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물을 옮기려고 시도하면, 물의 상당 부분이 옮기는 사이에 샌다. 이 경우, 폴이 얼마나 목이 마른가 그리고 물통이 얼마나 새는가에 따라, 공리주의 정부는 그래도 상당한 물을 피터에게서 폴로 옮기려고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새는 물통만을 가졌을 때, 공리주의 정부는 완전한 평등에 이르려고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떤 정부든 가진 것은 “새는 물통”뿐이다.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한 미국 경제학자 아서 오쿤(Arthur Okun)은 “평등과 효율 사이의 갈등은 우리의 가장 큰 사회경제적 맞바꾸기이며, 그것은 사회 정책의 수십 개의 차원들에서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는 시장의 효율이라는 과자를 갖고 그것을 평등하게 나누어 가질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평등주의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복거일은『자본주의가 왜 정의로운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계속한다.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이 재산에 대한 권리의 결정적 요소라는 원칙은 자연스럽고 정의로운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진다.』『아울러 ‘성장 대 분배’라는 오래된 논쟁도 본질적 문제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대체적으로 효율에 관한 논의임이 드러난다.』『효율에 관한 한, 자본주의는 다른 어떤 대안 체제들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성장 대 분배’라는 논쟁도 이미 실질적으로는 결론이 난 주제다. 2차대전 뒤에 경험은 경제 성장이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절대적으로 높일 뿐 아니라 상대적 빈곤도 차츰 줄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에, 분배를 강조하여 정부가 소득의 이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경우엔 사회가 근본적으로 흔들렸고, 가난한 사람들은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처지가 나빠졌다. 그래서 빠른 경제성장은 공평한 분배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이 이의의 여지가 거의 없음 만큼 증명된 셈이다.』『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다른 대안적 체제들보다 더 풍요로울뿐 아니라 더 평등한 소득분포를 보인다는 사실엔 또 하나의 까닭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다른 대안적 체제들에서보다 권력이 훨씬 널리 분산되므로, 민주주의가 훨씬 튼튼하게 뿌리를 내린다. 민주적 사회에선 가난한 사람들도 투표권을 지녔으므로, 집권한 정치 집단들은 가난한 사람들도 투표권을 지녔으므로, 집권한 정치 집단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늘리는데 마음을 쏟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것처럼, 보통선거는 아주 강력한 평등실현자(equalizer)였다』『반면에, 대안적 체제들에선, 공산주의든 국가사회주의든,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이 “평등의 이념과 야만적 강제의 편리한 동거(the easy cohabitation of egalitarian ideology and savage coercion)"라 부른 질서가 탄생했고, 그 질서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물임이 드러났다. 그러한 질서 속에서,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려면 강제적 소득 이전이 필요하고, 강제적 소득 이전을 위해선 강력한 국가권력이 필요하고, 그런 권력은 소수 정예 집단에 집중되고, 그렇게 소수에 집중된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므로, 결국 권력을 쥔 정예 집단만 잘살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을 함께 맞는다.』
  
  복거일은『재산권의 중요성』으로 돌아가 본다.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사실은 분명히 자본주의가 높은 효율을 보인다는 사실과 아주 근원적 수준에서 관련이 있다. 구성원들이 정의롭지 않다고 느끼는 체제가 활발하게 돌아갈 수는 없다.』『재산권은 경제적 자유의 핵심이어서, 재산권이 제대로 지켜지는 사회에선 경제적 자유가 저절로 보장되지만, 재산권이 나쁘게 설계되거나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는 사회에선 경제적 자유가 위축된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경제적 자유는 자유의 핵심이다. 경제 활동의 자유 없이는 정치나 문화 분야의 자유는 공허하며, 경제적 자유는 조만간 다른 분야들의 자유를 불러온다.』『페루 경제학자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는 제3세계의 경험들을 통해서 재산권의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토지에 대한 재산권은 사람들의 재산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미국에서 그것은 가족 자산의 40% 이상을 차지하며, 나의 조국과 같은 개발도상국들에선 가족 자산의 70% 가량이 토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페루에선 지방의 토지 재산권의 90% 이상과 도시의 토지 재산권의 반이 공식화된 권리증서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다. 즉 그런 재산권은 ‘비공식적’이다. 나머지 제3세계에서도, 알제리아든 브라질이든 인도네시아든,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공식적 권리증서의 부재는 이 나라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자산들이 시장 경제 밖에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이 공식화된 권리들을 갖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이 자신들의 법적 통제 아래 있다고 느끼고, 따라서 그들은 그것의 개선에 그들의 지능과 작업을 투자할 유인을 지닌다.』『노르웨이의 농업 전문가들인 트리그베 베리(Trygve Berg)와 미칼 앙스레이히(Michael G. Angstreich)도 아프리카의 농민들에 대해 같은 진단을 내렸다.

  믿을 만한 시장들과 매력적인 가격이 없으므로, 에티오피아의 농민들은 그들의 가족들에게 당장 필요한 만큼만 생산한다. 그리고 안정된 토지 사용권이 없으므로, 그들은 날씨의 변덕으로 볼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개량들에 투자할 의욕이 적다. 그런 구조적 장애들이 오늘날 많은 아프리카의 나라들을 괴롭힌다. 그런 사정을 바꾸는데 필요한 개혁들과 투자들은 상당한 자원이 든다.

  그런 문제들을 안은 나라들이 미국의 유전공학 기술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필자들의 답은 기아의 구조적 원인들을 풀지 않고는 아무리 많은 양의 기술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만일 구조적 문제들이 풀리고 농업이 생존할 수 있는 경제적 활동이 되면, 농민들은 그들을 더욱 생산적으로 만드는 기술들에 대한 요구로 반응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분명한 역사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재산권이 역사적으로 약자들을 위한 장치였다는 사실이다.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이 주장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법이 없는 곳에선 힘이 궁극적 심판자가 되고, 자연히, 약자들은 늘 강자들에게 지배되고 수탈당한다. 그래서 무법보다는 악법이 늘 낫다. 재산권도 그러하니, 비록 요즈음 우리 사회에선 재산권이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민중주의적 인식이 널리 퍼졌지만, 역사적으로 재산권은 인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나왔다.』

  역사에 있었던『재산소유에서의 불의』를 시정해야 한다는 논거에 관하여 복거일은 이렇게 통찰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옛적부터 압제적이고 부패했으므로, 조선조 말기엔 특히 그러했으므로, 재산 획득 과정에서의 불의는 뿌리가 깊고 널리 퍼졌었다. 이어 일본의 식민 통지, 해방 그리고 전쟁이 이어졌으므로, 재산 획득 과정에서의 불의는 아주 널리 퍼지고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정은 당연히 ‘재산 소유에서의 불의의 시정(rectification of injustice in property ownership)'이라는 문제를 낳는다.
  불행하게도, 이 문제에 큰 도움이 될만큼 깔끔한 이론이나 현실적 정책은 없다. 이 문제가 품은 논점들은 무척 많고 모두 복잡하기 때문이다. 노직은 그런 문제들 가운데 몇을 언급했다.
  
  만일 과거의 불의가 더러 확인될 수 있고 더러는 확인될 수 없는 갖가지 방식으로 현재의 재산 점유의 모습을 다듬어냈다면, 이런 불의들을 바로잡기 위해, 만일 해야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불의를 저지른 사람들은 그 불의가 저질러지지 않았을 경우보다 처지가 나빠진 사람들에 대해서 무슨 책무들이 있는가? 또는, 보상이 이내 이루어졌을 경우보다, 수혜자들과 피해자들이 불의의 행위의 직접적 당사자들이 아니고, 예컨대 그들의 후손들이라면, 사정은, 어떻게 바뀌는가? 역사의 칠판에서 불의들을 깨끗이 지우는 일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가? 불의의 피해자들은 그들에게 행해지는 불의들을, 그들의 정부를 통해 행동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그 많은 불의들을 포함해서,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하도록 허용되어야 하는가? 그런 논점들에 관한 철저한 또는 이론적으로 세련된 논술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노직은 언급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과거의 불의들이 쉽게 바로잡힐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심중한 경고를 한다.』『과거의 불의들을 바로잡는 일을 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풀 수 없는 문제들을 안는다. 과거의 불의들을 바로잡는 일이 워낙 어렵고 복잡하고 악용되기 쉬우므로, 현실적으로는 현재 상태(status quo)를 유지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은 길임을 가리킨다.』

  복거일은『‘재산 소유에서의 불의’를 들어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불의의 시정이 어렵다는 사정을 들어 맞서는 것은 그들에게 도덕적 고지를 내주는 일이고, 자연히, 우리 체제를 제대로 변호할 수 없다.』고 보면서, 정면으로『다행히, 자본주의는 ‘재산 소유에서의 불의’주장에 맞서 자신을 변호하는데 충분한 실적을 이미 쌓았다. 자본주의에선 다른 대안 체제들에서보다 재산 획득 과정에서의 불의가 덜하다. 그런 대안 체제들은 청사진으로는 그럴듯하지만, 그래서 무지한 사람들을 열렬한 추종자들로 거느리지만, 실제로 시행되면, 청사진과는 너무 다르고 체제로서 오래 존속하기엔 너무 억압적이고 비효율적이고 불평등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국가사회주의 실험과 소련과 위성국들의 공산주의 실험은 이 사실을 이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뚜렷이 보여준다.』고 역사의 현실인식을 제시한다. 아울러『자본주의가 대안 체제들보다 덜 부패하고 훨씬 정의로운 까닭으로서
  
  1) 불의한 재산 획득의 주요 원인은 정부 권력의 오용과 부패다. 자본주의의 사유재산 제도와 ‘작은 정부’는 사회적 선택과 정부의 크기를 줄인다. 자연히, 자본주의에선 부패와 자의적 결정의 여지가 원천적으로 적어서, 불의한 재산 획득이 다른 체제들에서보다 적다.
  
  2) 재산권은 계약들을 통해서 재산을 자유롭게 이전할 수 있는 권리를 본질적 요소로 삼는다.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로운 재산 이전은 불의한 재산 획득이나 이전이 나올 여지를 크게 줄인다. 분업이 극도로 진전된 현대 경제에선 재산의 획득은 거의 모든 재산들이 많은 이전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자연히, 자발적 계약들을 통한 재산 이전은 불의한 재산 획득을 원천적으로 줄인다.
  
  3) 재산 점유에서의 불의와 기회의 불평등을 바로 잡는 일은 엄청난 자원이 드는 일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사회가 부유할수록 정의와 평등을 위한 노력의 성과가 커진다. 근년의 경험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한 나라의 경제가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장하면, 그 사회 구성원들의 삶이 절대적으로 나아질 뿐 아니라 빈부 격차도 차츰 줄어든다. 그리고 경제 성장에 관한한, 가장 뛰어난 체제는 자본주의다.』의 3가지를 들고 있다.
  
  복거일은 『자본주의에 대한 내재적 위협』이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다.
  
  그는 미국 프리드먼의 탄식을 인용하고 있다.『자본주의의 위대한 업적은 재산과 부의 축적이 아니라 “그것이 사내들과 여자들에게 제공한, 그들의 능력을 넓히고 발전시키고 향상시킬 기회였다”는 그의 믿음을 공유한 사람들이 적다는 것을 탄식하면서,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그는 자본주의로부터 얻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뚜렷한 예들만을 들면, 흑인들, 유대인들,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처럼 아주 쉽게 다수파의 불신과 적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소수 집단들이,” 흔히 그것의 가장 거센 비판자들이었다는 것을 슬퍼했다.』고 소개한다.

  복거일은 오킨스의『밈의 관점-meme's-eyeview』을 소개하고 있다.
  『밈의 예들은 곡조들, 생각들, 구호들, 의복 유행들, 냄비들을 만들거나 홍예들을 쌓는 방식들이다. 유전자들이 정자들이나 난자들을 통해서 몸에서 몸으로 건너뛰면서 유전자 풀에서 자신들을 전파하는 것과 똑같이, 밈들은 넓은 뜻에서 모방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과정을 통해서 뇌에서 뇌로 건너뛰면서 밈 풀에서 자신들을 전파한다.』

  복거일은 여기서 직관의 한계를 설명하고 있다.『복제가 쉽고 전파력이 큰 밈들을 살피면, 그것들은 모두 사람들의 직관에 맞는 것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직관을 통해서 세상을 살피고 직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판별한다. 그래서 직관으로 이내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생각들이나 직관을 거스르는 생각들은 사람들의 뇌들에게 복제가 어렵고, 자연히 전파력이 약하다.

  불행하게도, 직관은 세상의 움직임을 깊이 이해할 힘이 없다. 그래서 흔히 그르다. 사람의 뇌가 일상적 현상들에 대처하도록 진화한 기구이지 세상의 움직임을 총체적으로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 나온 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직관에 의존하여 형성된 밈들은 거의 언제나 그르다. 천동설은 누구에게나 직관에 맞는 이론이지만, 지동설은 지금도 아주 어려운 지적 작업 뒤에야 받아들일 수 있다.

  사회적 논점들 가운데, 이 점이 잘 드러나는 것은 보호무역주의와 자유무역주의의 대립에서다. 보호무역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것을 떠받치는 주장들 가운데 가장 충실한 실체를 갖춘 ‘유치산업보호론’은 특히 사람들의 직관에 대해 큰 호소력을 지녔다. 반면에, 자유무역의 이점은, 특히 다른 나라들이 자유무역을 추구하지 않는 경우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을 떠받치는 강력한 이론인 ‘비교우위론’은 아주 어려울 뿐 아니라 반직관적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노동조합에 관한 생각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약한 노동자들이 뭉쳐서 강한 자본가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은 사람들의 직관에 맞는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노동자 전체의 복지를 늘릴 힘은 없고, 노동조합은 다만 약한 노동조합에 속하거나 노동조합의 보호를 아예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로부터 강한 노동조합에 속한 노동자들에게는 소득을 이전하는 효과만 지녔고, 실제로는 노동조합이 누리는 노동 공급에서의 독점적 지위는 사회의 소득을 줄이고, 사회 전체의 일자리들이 고정되었다는 생각은 그르며, 노동자 전체의 복지를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시장의 가격 기구라는 사실을 설명하기는 어렵고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다. 아마도 직관에 가장 부합해서 늘 문제가 되는 밈은 개인들의 이기심에 관한 것일 터이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조화를 이루어 잘 움직일 수는 없으므로, 사회가 정부와 같은 기구를 통해서 개인들의 활동들을 엄격하게 규제해야 된다는 생각은 직관에 맞고 그래서 복제 능력이 뛰어나다. 반면에, 개인들의 이익 추구라는 미시적 현상에서 사회적 조화라는 거시적 질서가 나오는 과정은, 즉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진화 생물학자들의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는, 설명이 어렵고 본질적으로 반직관적이다.』『정보의 생산, 유통, 저장 및 처리에 드는 비용이 아주 낮아진 현대 문명은 밈들의 복제와 전파에 아주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런 정보 시장에 참여하는 대중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민중주의의 세력은 엄청나게 커진다.』는 것이다.
  
  복거일은 『부러움의 정치학(politics of envy)』을 쉽게 설명한다.
  
  『시장 경제에선 모든 경제 주체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며, 사회는 그런 경쟁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보다 나은 길들을 찾는다.』『그리고 정부는 경쟁에서 처진 사람들을 사회안전망을 통해서 돕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 전체는 최대한의 복지를 누리며, 불운하거나 가난한 사람들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을 얻는다.』『이런 시장 경제는, 비록 불완전하지만, 인류가 지금까지 생각해낸 경제 체제들 가운데에선 가장 낫다. 그래서 우리를 포함한 많은 사회들이 시장 경제를 통해서 가난으로부터 벗어났다.』

  여기서 복거일은 해묵고도 우리가 보통 잊고 살아가는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시장 경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흔히 이념에 바탕을 두었다고 여겨지지만, 시장에 적대적인 이념을 그것의 추종자들에 매력적이고 자명하게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생물적 요인이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들의 처지와 늘 비교하며, 자연히, 부러움으로 가득 찼다. 사람의 그러한 행태는 시장 경제에 호의적이 아니다.』『그런 사회들에서 개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회의 전반적 복지가 아니라 자신들의 사회의 위계에서 차지하는 자리였다.』『지금 우리도 그렇게 판단한다. 우리는 자신들이 다니는 회사의 전반적 봉급 수준보다는 동료들의 봉급과 비교된 우리 자신들의 봉급에 마음을 훨씬 크게 쓴다. 입사 동기들보다 호봉이 하나 낮을 때, 그것을 태연히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승진에서 후배에게 추월당하는 것보다 더 속상한 일이, 그리고 자신의 앞날을 더 어둡게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따라서 사람이 사회의 전반적 복지라는 큰 그림을 살피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상대적 지외와 소득만을 살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구조적으로 사람의 뇌는 그렇게 움직이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처지에 관한 판단을 둘레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내린다. 당연히, 사회의 최상층에 자리잡은 사람들을 빼놓으면, 모두 자신의 소득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게 되고, 그런 불만은 곧 자신들보다 사회적 지위나 소득이 높은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미움으로 바뀐다. 자신의 처지를 보다 낫게 만들기는 아주 어려우므로, 그런 부러움과 미움은 자연스럽게 그런 결과를 낳은 시장 경제에 대한 반감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보다 평등한 사회의 청사진을 내놓는 사람들의 추종자들이 된다. 분배의 문제가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일정이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놀랍지 않게도, 부러움의 정치는 큰 폐해들을 낳았으니, 처음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소득의 재분배가 사회적 목표였지만, 근년에는 ‘평등 자체를 위한 평등’이 목표가 되었고 필연적으로 재산권에 대한 비합리적 침해가 점점 심해졌다. 여기서도 자본주의는 자신에 대한 내재적 위협을 키운 셈이다. 부러움의 정치가 가장 거센 분야는 교육이다. 교육의 기회는 절대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만 거센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회들에서 교육은 소득과는 별다른 관련 없이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따라 배급된다.』『그래서 자신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와 낮은 상대 소득을 참아온 사람들도 그런 처지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단호히 거부하고, 그런 가난의 세습을 불러올 열등한 교육도 당연히 거부한다. 시장 경제의 논리를 따라, 교육을 시장에 맡겨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을 통해서 효율을 높이고, 그런 경쟁에서 뒤진 소비자들에겐, 즉 가난한 학생들에겐, 정부가 사회 안전망인 공교육을 제공한다는 체제는 다수파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기 자식들의 사회적 지위지 사회의 전반적 교육 수준이 아니다. 그들이 외치는 것은, 아주 거칠게 말하면, “내 자식이 가장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의 자식들도 그것을 받을 수 없다”이다. 새무얼 브리턴에 따르면, 비슷한 구호가 영국에서 큰 매력을 지녔었다 ; “누구도 그가 돈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자식에게 특별한 교육을 받도록 해주거나 더 좋은 의료를 받아선 안 된다.” 이른바 ‘교육의 하향 평준화’가 그리도 뿌리를 든든하게 내린 까닭이 바로 거기 있다.』
  
  복거일은 자본주의 대한 반감에서 나오는『대안적 체제들』중 제대로 존속하는 것이 있느냐는 점을 따지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은 우리 마음에 내재한다. 불행하게도, 그런 반감은 다른 요인에 의해 증폭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물리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를 높이 여긴다. 안타깝게도,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물질만을 숭상하는 체제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대안적 체제를 꿈꾼다.』『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대안적 체제는 사회주의였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 뒤 사회주의는 실제로 현실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70여 년에 걸친 공산주의 실험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도덕적, 물질적, 그리고 지적 측면에서 모두 실패한 총체적 실패였다. 사정이 그러했으므로, 공산주의 명령 경제 체제를 버린 나라들은 모두 시장 경제 체제를 도입하려 애쓰고 있다.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가장 먼 길(The Longest road from capitalism to capitalism)"이라 부르는 씁쓸한 농담은 이 사실을 더할 나위 없이 유창하게 말해준다.』『공산주의 체제가 그렇게 흉측한 모습을 드러낸 채 무너지고 명령 경제의 문제점들이 밝혀져도, 여전히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대신, 정신적 가치에 바탕을 둔 ‘제3의 길’을 열심히 찾기 시작했고, 때로 그런 체제의 청사진도 내놓았다. 그러나 정신적 가치를 물리적 가치보다 앞세우는 대안적 사회들 가운데 실제로 세워진 것들은 드물었고 제대로 기능해서 오래 살아남은 것은 없었다.』

  그는 대안적 체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감추어진 모순을 밝혀준다.
  『대안적 사회들이 실패하는 까닭은 여럿이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들에 존재하는 모순들이다. 비록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런 모순들은 그들의 주장을 근본적 수준에서 부실하게 만들고 그런 주장에 바탕을 둔 대안적 체제를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새무얼 브리턴은 눈에 자주 띄는 모순 둘을 지적했다.』즉『진보적 평등주의자들 사이에서 지금 유행하는 형태로는, 반물질주의적 태도는 무척 많은 모순들을 포함한다. 아사르 린드벡이 그의 호의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연구서 <신좌파의 정치경제학>에서 지적한 것처럼, “추가적 소비가 그렇게도 중요하지 않다면, 소득과 소비에서의 평등이 왜 그렇게도 중요한가?”또한 소비자 사회에 대한 공격과 대부분의 신구좌파가 노동조합의 임금 요구들에 대해 보이는 거의 자동적인 지지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Brittan, 1988)』『모든 사회들이 맞는 표준적 문제들은 시장이나 관료 기구의 명령에 의해서만 풀릴 수 있다. 아직까지 다른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아사르 린드벡이 요약한 그러한 표준적 문제들은 아래와 같다.

  1) 사람들의 선호들에 관한 정보의 획득 ;
  2) 사람들, 기계들, 토지, 건물 그리고 다른 자원들을 이들 선호들에 맞게 배치하는 일 ;
  3) 사용할 생산 기술의 결정 ;
  4) 불필요한 비용이 드는 방법들을 피하고, 투자하고, 새로운 기술들과 제품들을 개발하기 위한 인센티브를 만들어 내는 일 ;
  5) 수백만 개인들, 기업들 그리고 가정들의 욕구들을 조정하는 일
  위에서 든 다섯 가지 문제를 시장이나 관료 기구의 명령을 통하지 않고 풀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안적 체제들이 실패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복거일은 아주 비근한 예를 들어본다.
  『근년에 우리 사회에선 ‘대안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시골에 모여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서 소박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에 대한 책들과 신문 기사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 삶은 복잡하고 경쟁이 심한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겐 늘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는 늘 자본주의 체제와 대조된다. 따라서 대안 공동체의 본질과 실상을 살피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나 판단하는 일은 긴요하다. 대안공동체는 역사가 오래다. 삶이 복잡해지면 사람들은 소박한 삶을 그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대안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노력은 주기적으로 나온다. 마지막 노력은 1960년대 말엽에서 1970년대에 걸쳐 미국을 중심으로 일었던 히피 공동체 운동이었다. 그들 ‘꽃 아이들(Flower Children)'의 시도에 비기면, 요즈음의 대안 공동체 실험은 아주 조심스러운 편이다. 히피 공동체가 가르쳐준 교훈은 그런 대안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주목을 받는 공동체들도 조만간 실패할 것이다. 깨어진 꿈들과 폐가 몇 채를 남기고서』『대안 공동체의 근본적 문제는 낮은 생산성이다. 모든 사회들은 비교 우위에 바탕을 둔 분업을 조직 원리로 삼아서 생산성을 높인다. 그래서 원시 사회에서도 사내들은 사냥을 하고 여자들은 과일과 벌레들을 채집했다. 그런 원리를 거스르므로, 대안 공동체는 생산성이 아주 낮다. 게다가 규모가 작아서, 어차피 분업의 효과도 작을 수밖에 없다. 자연히, 외부 세계와의 거래에서 수입이 수출보다 훨씬 많고, 그런 적자는 궁극적으로 파산을 부른다. 실제로 수많은 히피 공동체들이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구성원들이 가져온 돈이 떨어지고 외부로부터의 송금이 끊어지면, 모두 옛 집과 직장으로 돌아갔다. 아니면, 대안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포기하고 외부 세계에 스스로 편입되었다.』

『대안 공동체들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닫힌 체계(closed system)'가 아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외부와 끊임없이 거래한다. 그들의 생업은 대부분 농사나 관광객들을 위한 수공예품들의 제작이다. 그래서 삶에 필수적인 물자들은 거의 모두 외부에서 조달된다. 집을 짓고 고치는 데 필요한 못, 돌쩌귀, 페인트와 같은 물건들이나 도구들,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씨앗들과 기계들은 모두 외부에서 들여온다. 자동차의 기름과 부품들도 그렇다. 누가 아프면, 도시로 나가서 치료를 받고 약을 사야 한다. 그렇게 외부에서 구하는 물자들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서 쓸 때보다 무척 싸다. 실은 그런 물자들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도 없다. 그래서 시골의 ‘소박한 삶’은 도시의 ‘복잡한 삶’보다 기회비용이 엄청나게 크다. 마하트마 간디는 소박한 삶을 상징하지만, 그의 설교에 넌더리가 난 측근이 “당신이 소박하게 하는데 얼마나 큰 비용이 드는지 알기나 하십니까?”라고 핀잔을 주었다는 일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해준다.』『물자만 그런 것도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야 관심이 없다 치더라도, 농사를 지으려면, 일기예보는 들어야 하고, 심심하면, 음악도 들어야 한다. 그들이 라디오에서 듣는 그런 정보와 음악은 외부의 소비자들이 비용을 부담하는 광고 덕분에 무료로 쓸 수 있는 재화다. 그래서 정보의 수출입에선 일방적으로 외부에 빚을 지는 셈이다. 게다가 세금은 한 푼도 안내지만, 그들은 국방과 치안의 혜택은 모두 누린다. 이렇게 보면, 대안 공동체들은 외부 세계에서 생산한 가치들을 아주 싼 값으로 또는 거저 얻는다. 즉, 그들은 외부 세계의 노력에 편승한 ‘무임승차자들(free-riders)'이다. 외부 세계를‘속물들의 지옥’이라고 비웃지만, 그들의 세계는 실은 ‘무임승차자들의 천국’이다.』『대안공동체들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잘하면, 복잡하고 경쟁이 심한 현대 사회에서 지친 사람들이 잠시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피난처 노릇은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 피난처가 사소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대안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다. 보다 일반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안’이란 말은 너무 가볍게 쓰인다. 현존하는 관행, 질서, 풍습, 규칙, 법, 기구, 공동체 또는 사회에 대한 ‘대안’을 선뜻 내놓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것들이 많은 대안들 가운데서 가장 나은 것들로 판명되어 사회적 진화를 통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게다가 ‘대안’이라고 제시된 것들은 거의 모두 이미 오래전에 시험되어 버려진 것들이다. 대안 공동체도 그렇게 버려진 것이다.』

『대안 공동체에 대한 그렇게 비현실적인 호감과 기대 너머엔 문명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 자리잡고 있다. 문명과 야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로 단순하고 상투적이다. 그래서 흔히 야만이라 불리는 상태가 실은 원시적 문명이며, 문명과 야만 사이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흔히 잊혀진다. 그래서 문명과 야만을 지나치게 대립시킨다.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들은 대체로 문명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야만에 대해 비현실적인 호감을 보인다. 그들은 현대 사회가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만들며, 반면에 문명이 덜 발전했던 원시 사회나 고대 사회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었다고 여긴다. 이것은 순수한 환상이다. 문명이 발전되지 않은 사회들에서 사람들은 사람답게 살 수 없었었다. 지식이 적고 낮았으며 기술이 원시적인데, 어떻게 잘살 수 있었겠는가? 과학적 지식과 높은 수준의 기술 대신 미신과 원시적 기술만이 있었는데, 어떻게 건강한 몸과 여유로운 마음으로 삶을 즐길 수 있었겠는가? 노예제도와 인신 공양과 마녀 사냥이 사회의 기본 제도인 상태에서, 사람들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을까? 문명이 크게 발전했던 중세에도 대부분의 사회들에서 평균 수명은 20세 정도였고 유아 사망률은 엄청나게 높았다.

지금도 남아 있는 풍습인 ‘백일 잔치’나 ‘돌 잔치’에서 옛날엔 갓난아이들이 살아남기가 무척 힘들었다는 사실을 엿보고, ‘환갑 잔치’에서 60세가 될 때까지 사는 사람들이 아주 드물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도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 점은 문명과 야만이 지녔다고 일컬어지는 ‘자연에 대한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근년에 자연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문명의 자연에 대한 악영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야만적 사회는 자연친화적이고 문명 사회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널리 퍼졌고 별다른 이의 없이 통용되지만, 이런 인식은 너무 단순하고 비현실적이다. 문명의 근본적 특질은 발전된 지식이다. 발전된 문명일수록 축적된 지식의 양이 많고 수준이 높고 과학적 지식의 비중이 크다. 따라서 문명 사회에선 야만 사회에서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훨씬 높은 수준의 삶을 누린다. 그리고 그렇게 높은 수준의 삶을 누리므로, 자연환경에 해를 덜입히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이 가리키는 것처럼, 배고픈 사람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거나 자연 환경의 중요성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근년에 열대 우림들이 많이 없어졌는데, 가장 큰 원인은 열대 우림 지역들에선 문명이 덜 발전했고 사람들이 가난했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목재를 팔려고 나무를 베어내고 화전을 일구거나 농토를 얻기 위해 열대 우림에 불을 지르는 광경이 텔레비전에 자주 나온다. 딱한 것은 그렇게 열대 우림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달리는 먹고 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잘사는 사회들에선 사람들이 자연을 보호하려고 큰 자원을 쓴다. 자연을 지키려고 큰 비용을 들이고, 비용이 더 들더라도 자연에 덜 해로운 생산 방식을 채택한다. 환경 오염을 막기 위해서 ‘오염세’라는 세금까지 고안해서 부과하고 있다. 문명과 야만의 본질과 실상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원시적 문명이 발전된 문명과 만난 상황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이 발전된 문명에 밀려 전통적 문명이 쇠퇴하는 현상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런 견해는 당사자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놓쳤다. 원시적 문명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한 문명보다 훨씬 발전된 문명을 받아들이고 누리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들의 그런 선택을 누가 어떻게 비판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런 ‘현대화’나 ‘세계화’엔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따른다. 전통적 문명보다 훨씬 발전했고 복잡한 문명을 받아들이는데, 어떻게 부작용들이 나오지 않겠는가? 사회의 구성 원리가 바뀌고, 생활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는데, 어떻게 사회적 혼란이 작겠는가? 개인 중심의 제도들과 관행들을 받아들이는데, 어떻게 부족이나 가족을 단위로 삼은 전통적 인간 관계가 그대로 보존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부작용들을 들어서, 발전된 문명의 도입을 비난하거나 문명의 산물들을 외면하라고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부작용들로 인한 손실도 작지 않지만, 발전된 문명의 도입으로 사람들이 누리는 혜택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문명의 폐해를 소리 높여 지적하는 사람들 가운데 문명의 이기들을 하나라도 버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텔레비전의 폐해를 역설하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텔레비전을 없앤 사람들은 드물고 ‘휴대 전화 중독증’을 거론하는 사람들 가운데 휴대 전화를 쓰지 않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은 전통 문화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덜 발전된 문명에 속한 사회는 더 발전된 문명을 흡수해야 한다. 전통 문화를 보존하는 데는 큰 비용이 든다. 그런 큰 비용을 마련하려면, 사회가 발전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야 한다. 고대 문명이 발전했던 중동에선 지금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고대 문명의 유물들도 도굴하여 외국인에게 팔아서 연명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이 물려받은 문명을 어떻게 연구하고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 문명 이전의 상태를 이상으로 여기고서 그런 상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문명의 본질과 지식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데서 나왔다.』
  
  복거일은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이야기한다. 그것이 바로『격심한 경쟁』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는 경쟁을 본질적 원리로 삼는다. 경쟁 없이는 자본주의도 시장 경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하이에크가 갈파한 것처럼, 우리는 경쟁을 통해서 가장 나은 길을 찾는다. 그러나 경쟁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그리고 끊임없는 경쟁은 가장 강인한 사람들도 지치게 한다. 실제로 경쟁은 경쟁자들 사이의 싸움이고, 그 싸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치열해진다.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를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가장 큰 까닭이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치열한 경쟁이라는 사실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대안 공동체’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도 큰 매력을 지난 까닭도 바로 경쟁이다.』

『그러면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의 치열한 경쟁을 누그러뜨릴 길은 없는가? 불행하게도, 그런 길은 보이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 까닭은 자본주의가 자연스러운 체계라는 사실이다. 자연이 바로 경쟁에, 실제로는 전혀 사정이 없는 싸움에, 바탕을 둔 체계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은 말했다, “자연은 싸움터입니다, 잘못 생각하지 마시오.(Nature is a battlefield, make no mistake)" 모든 생명체들은 자연이라고 불리는 싸움터에서 살아남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로버트 라이트의 말대로, “우리는 행복한 동물이 아니라 효과적인 동물들이 되도록 만들어졌다.(We are built to be effective animals, not happy ones)" 그러나 우리는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경쟁에서 진 사람들도 너무 불행해지지 않도록 하는 길을 발견했다. 사회안전망이라 불리는 기구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렇게 경쟁에 진 사람들을 돕는 데는 자원이 많이 든다. 다행히,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는 그런 자원을 잘 마련할 수 있다.』
  
  끝으로 복거일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행태를 이렇게 간략하게 지적하고 있다.
  
  『여러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종교적 특질들을 지적했지만, <자본론> 첫 권의 출간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경제학사가 에릭 롤(Eric Roll)이 한 연설의 한 부분은 인용할 만하다. 마르크스가 열여덟이었을 때 씌어진,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현존한 유일한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스위프트의 가슴처럼 거센 의분에 찢긴 가슴을 지닌 채 그가 대학에서 부딪친 문제들과 사상들의 미로 속에서 길 안내를 격렬하게 찾는 자신 없는 젊은이임을 보여준다. 서른 해 뒤 그는 <자본론>의 서문을 쓴 자신만만한 필자가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계시는 받아들여졌고 그것은 교리 속에 신성하게 안치되었다. 이런 사태의 진전을 보면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매력에서 첫 번의 그리고 가장 강력한 성분은 그것이 신념 체계의 확실성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나는, 비록 이 말이 진정한 종교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함께 불쾌하겠지만, 그것을 종교들과 함께 분류할 수밖에 없다.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궁극적 운명의 확실성을 제공할 뿐 아니라, 추종자에게 그런 결말을 위해 나름의 공헌을 할 의무를 지우며 명확한 행동 방향을 제시한다. 하이게이트에 있는 마르크스의 무덤의 비명을 인용한다,

“철학자들은 단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 왔다 ; 요점은 그것을 바꾸는 것이다.”이것은 바로 전투적 신념의 알맹이다. 다른 전투적 신념들처럼, 그것의 초기의 호소력은 주로 젊은이들에게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전투적 신념들처럼, 그것은 이내 편협한 맹신자들과 광신자들을 길러냈다 ;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처음에 그것이 없애려고 나섰던 인류의 비참함의 총량을 줄이는 대신 늘리고 말았다.』

글쓴이 : 임광규 베네딕도 (신관동 본당)
입력 : 2006-08-30, 16:02 조회수 : 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