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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6 10:16

할배들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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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들의 몰락    2014/02/13 21:32
http://blog.chosun.com/paul6886/7306913 

며칠 전 친구들을 만났을 때 다소 변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몇 년 전만해도 사흘들이 만나다가 몇 달만에 만나선 지 전과는 눈빛부터 달라보였다.

얼굴은 한결 멀쑥해지고 살이 올랐지만, 초롱초롱하던 눈빛은 많이 풀어져 있었다.

만나면 소리가 커서 옆사람들의 눈치를 봐야했지만 목소리 역시 작고 부드러웠다.

 

R은 친구들 중에서도 목소리 크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유난히 소리가 굵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싸우기라도 하는 듯 핏대를 올리고 육두문자를 예사로 입에 올렸다.

간혹 친구들이 "너는 임마 목소리가 와 그리 크노?"하고 핀잔을 주면 싱긋이 웃으며 "야, 내는 이래비도 지리산 정기를 받았다 아이가, 너거놈들 하고는 질이 다리다"하고 목에 힘을 주었다.

 

술이 한 순배 돌면 그의 십팔번이 낭자하게 흘러나왔다.

"너거 알제? 내가 대학 졸업 맟고 서울에서 중학교 선생질 하다가 갑자기 할아부지가 위독하다꼬 연락이 오는 바람에 고향으로 내리간 거 말이다. 가서 봉께 할아부지 위독한 거는 거짓말이고 벌써 신부깜을 정해놓고 장개 보낼라꼬 불렀더라쿵께. 아, 참 환장하겄데. 방에다가 가다놓고 꼼짝을 몬하게 하는기라. 할 수없이 억지 장개 갔다 아이가. 그래서 마느래 꼬라지만 보모 간이 디비진다쿵께."

그래서 우리는 R이야말로 마누라를 손아귀에 쥐고 큰소리 치며 사는 줄로 알았다.

 

몇 년 전만해도 R의 가부장적 권위는 참으로 대단했다.

친구들이 모여 술추렴을 하는데 그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오면 위세가 당당했다.

"봐라, 머땜에 전화질이고. 언성 노파지기 전에 빨리 끈어라 고마. 사람 썽질 도쿠지 말고, 이따 집에 가서 보자." 

우리는 걱정이 되어 "야, 마누라 한테 그리 무작하게 말하고 집에 가서 갠찬나"하면 그는 싱긋 웃으며 "에레기, 빙신 자슥들. 마느래 하나또 몬 후아잡아서 절절 기나. 그래가꼬 세상을 우찌사노"하고 비웃었다.

 

그랬던 R도 지난 1년여 건강 때문에 병원 출입이 잦아지고는 많이 변했다.

이번에 만나 그의 건강을 물으며 "너거 집사람은 별일 없제? 요새도 후아잡고 사나?"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후아잡는기 머꼬, 이 사람들이 간 큰 소리하네. 요새 마느래 한테 잘 못 비모 밥도 몬 얻어묵고 쫒기나는 거 모리나."하고는 "글 안 해도 오늘 너거 만나로 나온다꼬 마느래 한테 허락 받니라 혼났다 아이가. 아침 묵은 설거지꺼정 해주고 나왔다쿵께."

 

그러자 옆에 있던 Y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는다.

"니는 호부(겨우) 설거지 항거가꼬 생색이가. 내는 오늘 여게 나올라꼬 설거지에다 집안 청소까지 했단말이다."

Y의 말에 R은 씩 웃더니 "맹새기 대통령 호위무사(경호실 근무)에다가 포도대장꺼정 하고 나온 놈이 마느래 눈치 본다꼬 설거지에다가 집안 청소꺼정 했다꼬. 니 꼬라지가 우째 그리댔네."하며 염장을 지른다.

Y는 씩 웃더니 "봐라, 지금은 그리싸도 니도 울매 안 남았다. 아매 올 안으로 청소에다가 쓰레기봉투까지 안 갖다내삐능가 내하고 내기하자"하며 약을 올렸다.

 

주거니 받거니 하던 둘의 시선이 한 순간 내게 쏠린다.

부지런히 생선회를 입으로 나르던 내가 손을 멈추고 "와 낼로 쳐다보네"하고 둘을 훑어봤다.

Y가 웃으며 "그래, 니는 너거 마누라 한테 우찌하고 사네?" 묻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는 너것들 해쌋는 거 벌써 몇 년 전부터 하고 있다 아이가"하며 별것 아닌 듯 말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R의 큰소리가 날아들었다.

"치아라, 고마. 우리 서이 중에 한 놈도 사내새끼 겉은 놈이 엄네. 자, 술이나 묵자."

 

셋은 가장으로서의 몰락을 한탄하며 술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