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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0 09:47

Old Town of Saraje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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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사라예보(7)

제1차 세계대전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

100주년을 맞았다.(2014.6.28)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에서는 기념식이 반쪽짜리 행사로 치러져

이 사건을 둘러싼 민족간 갈등과 반목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1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지 1세기나

흘렀지만 그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는 셈이다.

-2014.6.28 세계일보-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는

전쟁 전엔 모스크와 가장 아름다운 전경을 가진

터키식 바자르가 있는 풍부한 역사의 장으로 유럽에서 가장

동양적인 도시였다.

사라예보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동방정교의 문화권이 공존하여
이 문화권들의 건물이 뒤섞인 보기 드문 광경을 볼 수 있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것으로,
그해 7월 28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이어져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이 암살사건은 남(南) 슬라브민족의 통일을 부르짖고,
오트트리아 헝가리제국의 황태자를 그 장애물로 본
세르비아 민족주의적 비밀결사대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 배후에는 세르비아 군부가 관련되었다고 본 오스트리아 정부는
즉각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을 보내고 그 해 7월 28일에
전쟁선포를 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었다.

***** *****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3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분리·독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슬람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민족 간의 분쟁으로 사라예보는 또 다시 내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1992년 3월부터 1995년 11월까지 약 3년 8개월에 걸쳐 일어난

보스니아 민족 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끔찍하고 처참한 민족 분쟁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곳은 1973년 4월 개최된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정현숙 선수 등이 여자단체전을 석권하여 처음으로 한국탁구가
세계제패를 이룬 곳이다.
그리고 1984년에는 이 도시에서 제14회 동계 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다.
참고-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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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9%2014;12;34.jpg 보스니아 무슬림의 세르비아인에 의한 집단학살 묘지-

UN이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세르비아군이 '스레브레니차'에서

수천 명의 무슬림들을 학살했다.

1993년 4월, 스레브레니차는 UN에 의해 "안전 지역"으로 선포되었으나

1995년 7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을 대표하는 레푸블리카 스르프스카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후 수일 동안 8,000명 이상의 무슬림들이 살해되었다.

"빵을 구하기 위해 모여든 시민들에게도 포탄이 쏟아졌다.

현장에서 무려 2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식이다.

1993년 3월 이래

3년 8개월 동안 사라예보는 죽음의 공포가 일상이 되었다.

그 때,

사라예보는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슬픈 장소가 되었다.


2014-05-24%2023;50;12.jpg 유럽에서 가장 동양적인 도시이자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수도 사라예보-

사라예보는,

보스니아계 이슬람 문화와 세르비아계 그리스 정교, 크로아티아계 카톨릭 등

3개 민족과 3개 종교가 섞여 눈으로 보는 모습도 특이하고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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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시청사로 사용되다가 1949년부터 국립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의 전쟁 동안 10000명의 사람이 죽었고, 5000명이 부상당했다.

잔인한 공격을 당했던 전쟁에도 불구하고 사라예보는 현재

트램이 움직이고 많은 까페와 호텔들이 다시 문을 열어 여행객들을

다시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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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동안 사라예보는 이슬람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터키인과 유대인과

또 다른 이민족이 평화적으로 공존했었으나 세르비아의 침략으로 또 다시 내전의 중심지가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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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밀리야카 강(Miljacka River)위의 라틴다리-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비극의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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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비극의 현장 라틴다리-

이 라틴다리는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곳으로,
그해 7월 28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이어져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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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다리-

이 암살사건은 남(南) 슬라브민족의 통일을 부르짖고,

황태자를 그 장애물로 본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적 비밀결사대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사건에 세르비아 군부가 관련되었다고 보아

즉각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914년 6월-

다리 건너편 오른쪽, 이 박물관 1층은 당시 카페였다고 한다.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적 비밀결사 대원들은 일층 이 카페에서

오스트리아 황제의 일행이 지나는 것을 지켰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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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6월-

이 박물관 1층은 당시 카페였다고 한다.

1914년 6월 28일,

이슬람계 보스니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이 카페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일행이 지나길 지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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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다리 주변 목욕탕 건물의 잔해-

22년 전, 당시의 참상이 아직 그대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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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의 세르비아계 그리스 정교회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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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계 그리스 정교회 성당 내부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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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계 정교회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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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계 정교회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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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의 이슬람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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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기독교 상징, 로마 카톨릭 대성당(예수 성심성당)-

1889년 파리의 노틀담을 기반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내부는 수리 중이어서 관람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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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의 로마 카톨릭 대성당(예수 성심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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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수도인 사라예보는

15세기 중엽 오스만제국에 정복당하여 16세기 데브시르메 출신의

보스니아주지사인 가지 휴스레우 베이(1541 죽음)의 시대 이후,

아드리아해와 발칸 내륙부를 연결하는 상업도시였다.

근접한 산악부에서 생산되는 철·동 등을 원료로 한 수공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정복전 동방교회의 이단 보고밀(Bogomil: 이원론자)파에 속해 있었던

주민의 대다수가 정복후 이슬람으로 개종했기 때문에

이 도시는 발칸의 손꼽히는 이슬람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합병되었는데

현재도 주민의 약 33%는 무슬림이고, 모스크와 바자르 등이 많이 남아

이슬람 도시의 특징을 보존하고 있다.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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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도들의 안식처 '가즈 하스레브베이'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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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의 가즈 하스레브베이 모스크-

몇 사람의 청년 이슬람 교도들이 예배 드릴 준비를 하고 있다.

주민의 약 33%는 무슬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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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슈카르지아(Bascarsija), 터키인들의 거리로-

세르비아계 그리스 정교회, 크로아티아계 카돌릭 성당, 보스니아계 이슬람 모스크를 지나

바슈카르지아(Bascarsija), 터키인들의 거리로 들어섰다.

그곳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만나는 곳!

양쪽이 완전히 다른 도시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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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러번(무역거래상)들의 숙소였던 모리차한(Moricahan)-

2층은 캐러번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이 건물은 16세기~17세기에 걸쳐 건축된 건물로 2층에는 40여 개의 방이 있어

300명이 묵을 수 있었고, 1층은 상품 창고, 말과 낙타의 마굿간이 있었다.

현재는 1층은 가게와 레스토랑, 2층은 사무실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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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러번(무역거래상) 숙소-

300명이 묵을 수 있는 40여 개의 방이 있다.

현재는 사무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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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 카페-

그곳에는 젊은이들이 진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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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슈카르지아(Bascarsija), 터키인들의 거리에 있는 가게-

오스만제국의 힘은 강하였다.

15세기 중엽 오스만제국에 정복당했었던 사라예보는 오늘날까지도 그 문화는 그대로 남았다.

종교, 건축물 양식, 음식문화 등 그들(오스만제국-터키)의 문화가 그대로 남아있다.

터키스타일의 주석, 청동으로 된 주물들... 터키 냄새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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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지 한 가게에서 주석으로 된 기념품을 만들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거의 장인 수준(?)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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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는 어찌나 독촉을 하여 데려다 주는 가게 한 곳 이외엔

느긋하게 구경하고 기념품 1개 살 여유가 없었다.

가게 마다 어찌나 구경거리가 많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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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뒤돌아봐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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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무덤들의 상처가....!!

보스니아계 무슬림들의 희생자들 무덤은 마을 곳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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