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48. 우리나라 네 번째, 강원도 처음의 풍수원 성당

by 마정 posted Oct 25,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48. 우리나라 네 번째, 강원도 처음의 풍수원 성당

 

 

  풍수웡성당-02-01.jpg

                              <풍수원성당>

    

 

 

풍수원본당(豊水院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21097)

1907년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자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며, 강원도 최초의 성당이다.

이보다 앞선 성당은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1892),

전북 완주 되재성당(현 고산성당 1896), 서울 명동성당(1898)이다.

 

 

지금까지 잘 보존된 이 성당은,

1896년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鄭圭夏 아오스딩) 신부가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 1905년에 착공해서

1907년에 건평 120평의 벽돌 건물을 준공했고,

2년 뒤인 1909년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신자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나무를 해 오는 등

건축 소재를 스스로 조달했다.

 

 

 

 

풍수원성당이 설립된 것은 1888620일이다.

18875월 한불조약 비준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당시 서울교구장 뮈텔(Mutel, 閔德李)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원 르 메르(Le Merre, 이유사 李類斯 1858~1928) 신부를

풍수원에 파견, 본당을 창설하고 초대주임으로 임명했다.

초가집 20여 칸을 성당으로 사용하여 미사를 올렸다.

당시 관할 지역은 12개 군() 29개 공소, 신자는 약 2,000명이었다.

    

                                     풍수웡성당-03-01.jpg

                                <풍수원성당 전면>

    

 

 

풍수원에 신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의 박해에서 피난해 오면서부터였다.

피난처를 찾아 헤매던 중 산간벽지인 이곳이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에 알맞은 곳이라,

여러 지방에서 모여든 신자들이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촌락을 이루어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간 것이다.

<풍수원성당 성지 홈페이지 등>

 

 

일설에 이곳 풍수원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용인에 살던 신태보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40여 명의 신자가

8일 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가 정착한 교우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나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의하면

신태보가 신자들을 이끌고 강원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고만 되어 있고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므로

향후 본격적인 고증을 요하는 곳이다.

<가톨릭사전>

 

 

 

 

처음 성당을 지은 한국인 정규하 신부

    

정규하 신부 흉상 - 01 - 01.jpg                  정규하 신부-02.jpg

        <정규하 신부 흉상>                       <정규하 아오스딩>

 

 

 

 

충남 아산군 신창면 남방리(忠南 牙山郡 新昌面 南方里)에서

정기화(鄭基化) 마태오와 한 마르타의 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한

정규하 아오스딩(1863~1943 )신부는,

병인박해로 가족과 함께 충청도 일대를 유랑,

음성(陰城) 장호원을 거쳐 15세 경 충주 근방 소탱이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화재로 인해 재산을 전부 잃고는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주,

그 뒤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

명동 주교관 내 글방[韓漢學校]에서 공부하다가

18843명의 동료와 함께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로 유학하였으나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1891년 신학생들과 함께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896426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강성삼(姜聖三 라우렌시오)과 함께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고

바로 풍수원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선종할 때까지 47년간을 그곳에서 사목하였다.

<가톨릭사전>

 

 

- 가톨릭사전에는 세례명이 바오로,

   서품받은 곳이 종현성당(현 명동대성당)으로 돼 있으나,

   풍수원성지 홈페이지와, 정 신부 묘소에는

   세례명이 아오스딩으로 되어 있어서 이를 따르며,

   세례 장소도 가톨릭사전 강도영, 강성삼 편과

   다른 자료들에는 약현성당으로 나와 있습니다.

 

    

정규하 신부 묘소 - 01.jpg

                             <정규하 신부 묘소>

 

 

 

 

정 아오스딩 신부가 풍수원본당에 부임하였을 때는

동학혁명의 실패, 민비시해사건, 아관파천 등으로

전국에 의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였다.

정 신부는 천주교 신부 중 드물게 의병에 지원하고,

오지인 풍수원에 의병들이 피신해 오자

이들에게 침식을 제공하는 등 적극 후원하였다.

그 결과 풍수원본당의 신자들 상당수가 의병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성당 사랑방에 삼위학교(三爲學校)를 개설,

논산에서 박 토마스를 선생으로 초빙하여 신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하도록 했다.

1942년 노환으로 휴양하다가 이듬해인 1943102381세로 선종,

풍수원성당 뒷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강원도에 교우촌을 만든 복자 신태보 베드로

    

                                    신태보 베드로-01.jpg

                                             <신태보 베드로 복자>

    

 

 

신태보 베드로에 대한 인적 사항은 자세한 기록이 없고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져 온다.

그의 출생도 ‘1768’ <가톨릭 사전>, ‘1768?’ <풍수원성지 홈페이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로 특정되지 못한 상태이다.

 

 

1791년 이전부터 경기도 이천의 동산밑(이천시 호법면 동산리)에 살던

양반 가문으로, 11녀를 두었으며,

183911()에 순교한 복자 최증애(崔曾愛) 바르바라는 그의 며느리이다.

천주교는 1791년 이전 남인 계통의 양반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알게 되어

1795년 무렵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끝난 뒤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조선의 신자들은 신유박해 이후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성직자를 다시 영입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 베드로와 함께 입교한 이종사촌 이여진(李如眞 ? ~ 1830) 요한이

1811년과 1813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으로 가서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리고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전하였다.

신태보는 이때 경비를 마련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많은 서적을 베껴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천주교인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가톨릭 사전>

 

 

신 베드로는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전교하여

많은 사람을 입교케 함으로써,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발생하자

은둔하고 있던 경상도 상주 잣골에서 체포되어 전주 진영에 수감 되었는데

혹독한 형벌에도 끝내 배교치 않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곧 집행되지 않고 13년간이나 옥중생활을 하다가

1839417() 전주 장터에서 4명의 동료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20148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諡福)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성모 동산-01-01.jpg

                                                     <성모 동산>

    

 

 

풍수원 성지가 있는 서원면(書院面)

횡성 남쪽의 원주시 호저면(好楮面) 산현리(山峴里)

일곱 봉우리의 칠봉(七峰)이 있고,

마을에 칠봉서원(書院)이 있어서 서원면이라 불렸다.

 

 

유현리(楡峴里)

이 지역에 느릅나무가 많으므로 느루개 또는 유현(楡峴 느릅나무 유)이 되었다.

<두산백과>

 

 

풍수원(豐水院)

()이란 조선 시대에, 관원이 공무로 다닐 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물이 풍부한 골짜기에 설치된 원이란 의미가 아닐까...

 

 

  왼쪽이 십자가의 길, 오른쪽 건물이 옛 사제관-01.jpg

                                                 <왼쪽이 십자가의 길, 오른쪽은 옛 사제관>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