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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현감(縣監)이 마구잡이로 신자를 처형한 해미읍성(海美邑城)

by 마정 posted Apr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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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현감(縣監)이 마구잡이로 신자를 처형한 해미읍성(海美邑城)

 

해미읍성-02-01.jpg

                                                        <해미읍성-성 안>

 

성지로 지정된 해미읍성(海美邑城 충남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은

고창읍성(전북 高敞邑), 낙안읍성(樂安邑城 전남 순천)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읍성 중 하나로 꼽힌다.

 

읍성이란 지방의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서 쌓은 성으로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해미읍성은 왜구의 출몰에 대응하기 위하여 1417년(태종 17년)에 착공하여

1421년(세종 3년)에 완공,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주둔했다.

1651년(효종 2년)에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이전하자

해미현 관아가 옮겨와 문무를 겸한 겸영장이 관할하는 호서좌영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호서 지방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해미읍성이란 명칭도 이때 개명된 것으로,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海美內廂城)이었다.

<내상성이란 조선 시대 절제사(節制使)의 군영(軍營)이 있던 성이다 – 한국고전용어사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는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종2품 무관직,

   고려 때의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1466년(세조 12) 병마절도사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 두산백과>

 

성의 둘레에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다 하여

달리 ‘탱자성’이라고도 불렸다.

 

                    남연군 묘소-01.jpg         

                                        <남연군 묘> 

 

179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 도굴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졌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이란 : 독일인 오페르트(Oppert, E. J., 載拔)가

   흥선대원군과 통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구(南延君 球)의 묘를 발굴,

   탈취한 유해와 부장품으로 통상 흥정에 이용하려던 시도이다.

   오페르트는, 배후인물로 자금을 전담하였던 미국인 젠킨스(Jenkins, F.),

   프랑스 신부 페롱(Feron), 선장 묄러(Moeller), 조선인 모리배 2명,

   유럽 필리핀 중국 선원 등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했다.

 

    이들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머스킷 소총과 도굴용 도구를 산 다음,

    1868년 5월 10일 1천 톤급 기선 차이나호(China號)와 그레타호(Greta號)를 이끌고

    충남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 아라사인이라 사칭하며 남연군 묘로 행군하였다.

    그들은 덕산 군청을 습격해 군기를 탈취하고, 민가에서 발굴 도구를 약탈하여

    가동(伽洞)의 남연군 묘에 도착, 밤에 도굴을 시작했으나

     묘광(墓壙)이 견고하여 실패하고, 날이 밝아오자 철수하였다.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미국인에 의하여 고발당하였고,

      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했다.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에 대해 더욱 부정적으로 되어

      쇄국양이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 탄압을 가중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호서좌영 정문-01.jpg

                                                              <호서좌영 정문>

 

내포 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던 해미 진영 겸영장은

천주교 신자들을 마구 잡아들여 해미읍성에서 처형했는데

그 수가 무려 3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겸영장 해미현감은 종6품으로, 홍주 진관(洪州鎭管) 영장(종3품)의 지휘를 받으므로

체포한 신자 중 지체가 높은 자들은 홍주 영장 및 충청 감사가 있는 공주로 이송하고,

신분이 낮은 서민들만 해미에서 처단했다.

 

진남문-01-01.jpg

                                                          <진남문>

 

정부에서는 1970년대부터 해미읍성 복원 및 정비공사를 시작하여

성내에 있던 건물들을 철거하였고

2000년대 들어 동헌, 객사, 내아, 감옥 등을 정비했으며

2021년 현재에도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성벽은 길이 1,800m, 높이 5m로서

성벽 밖에 2m 깊이의 해자를 팠었다.

북한산성, 남한산성 등이 산에 쌓은 산성이라면,

진주성, 공산성, 사비성은 강을 낀 산에 건설되었는데

해미읍성은 평지에 달걀 모양의 타원형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동헌-01-01.jpg

                                                               <동헌>

 

남쪽 정중앙에 있는 진남문은 해미읍성의 호서좌영 관아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 형식 건물로

아래층 3칸에 달아 그 문으로 통행하고

상층은 누각을 만든 전형적인 관아문이다.

 

동헌은 해미읍을 관할하던 관아이다.

책실은 책과 문서를 보관하며 현감의 자제가 거처하였고

객사는 관찰사 등의 귀빈이 숙박하던 곳이다.

 

감옥-01-02.jpg         옥사-01-02.jpg

                               <감옥>                                                               <옥사>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쌓은 울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1935년 간행된 ⟪해미순교자약사⟫를 토대로 복원되었다.

 

병인박해 때 감옥 사정을 목격한 이주필(李周弼)씨는 이렇게 증언했다고 한다.

"성 중앙에 담을 길 반이나 넘도록 쌓아 올린 3간 와가가 있으니 그것이 옥이다.

  그 속에 30~40명가량이 갇혀 있었다.

  그 담 밖에 큰 고목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 나무에 교우들의 목을 옭아 매여 죽였다.

  그 옆에 또 바깥옥이 있는데 역시 3간 와가이다.

  그 안에는 십자패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는데

  문을 열어 놓아도 도망치는 사람이 없었다."

 

회화나무-01-01.jpg

                                                       <회화나무>

 

 

큰 고목이라고 지칭된 나무는 회화나무(일명 호야나무)로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72호이며 수령 3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삿줄에 움푹 패여 있다.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때리며 고문하던 흔적으로

옛 임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는 것이다.

 

동헌 뒤쪽 언덕 위에는 읍성을 내려다볼 수 있는 청허정(淸虛亭) 정자가 있다.

<대전교구 : 해미읍성>

 

청허정-01-01.jpg

                                                                                  <청허정>

 

해미읍성은 두 위인과 인연을 가지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1576년(선조 9년) 무과 급제한 뒤

1579년(선조 12년)에 충청 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간 이곳에서 근무했다.

 

다산 정약용은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가주서(假注書 - 조선시대 승정원의 대리 임시관직)를 거쳐

검열(檢閱 - 조선시대 예문관과 춘추관에 소속된 관직)이 되었으나,

천주교의 교인이란 죄명으로 해미읍성에서 귀양을 살았다.

다산은 열흘 만에 풀려나 지평(持平 사헌부 소속 종오품)으로 등용됐다.

 

해미는 1407년(태종 7)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이 병합하여

탄생한 이름이다.

『고려사(高麗史)』 권56 지10 홍주(洪州) 정해현(貞海縣) 조에

“태조 때 한씨 성을 가진 몽웅역(夢熊驛 현 해미면 동암리)의 역리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그에게 대광(大匡) 벼슬을 주고

  고구현(高丘縣) 땅을 분할하여 정해현을 설치하고

  그의 관향(貫鄕 = 본관, 本貫)으로 삼게 하였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운주(運州 현 홍성군) 전투(934년 왕건과 견훤이 직접 맞붙어 왕건이 대승.)

승리의 전공으로 생긴 고을이 정해현인 것이다.

 

여미현은 충남 서산시 음암면과 운산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현(縣)이다.

본래 백제의 여촌현이었는데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여읍으로 고쳐졌고

고려 초기에 다시 여미로 개명되었다.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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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읍성-동쪽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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