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57. 고도(古都) 강릉의 성지 칠사당(七事堂)과 객사문(客舍門)

by 마정 posted Jul 25,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57. 고도(古都) 강릉의 성지 칠사당(七事堂)과 객사문(客舍門)

 

강릉대도호부 관아 (1)-01-01.jpg

                                               <강릉대도호부 관아>

 

 

강원도 강릉은 BC 2세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오래된 도시이다.

독립된 사회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예국(穢國) 땅이었으나

후에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지배를 받았다.

‘국(國)’이라는 명칭은 오늘날 의미의 ‘나라’라기 보다는

국가 성립 이전의 ‘군장사회(君長社會)’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 - 키워드사전>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가 되었다.

도독부는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점령한 뒤

그 고토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지방 최고 군사행정기구였다.

<명주의 명(溟)은 ‘바다 명’.>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강릉부(江陵府)로 개칭하고,

공양왕 원년(1389)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

 

조선 세조 때 진(鎭)을 두었으며, 효종 때는 현(縣)으로 강등했다가

후에 다시 부로 승격시켰다.

정조 6년(1782)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같은 왕 15년(1791)에

도호부로 환원하는 등 정치적 파란을 수차례 겪었다.

<문화원형백과 - 강릉대도호부>

 

조선 시대에는 처음에 안동·강릉·영변(寧邊)에 대도호부를 두었다가

후에 영흥(永興)·창원(昌原)을 추가하여 5개 지역에 설치했다.

수령인 대도호부사는 정3품으로 관할 지방에서 전권을 행사했다.

<두산백과 – 대도호부>

 

칠사당 정문.jpg

                                     <칠사당 정문>

 

이렇듯 큰 고을에서 천주교 박해가 조용히 지나갔을 리가 없다.

사학자들의 연구와 구전에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가 강릉 관아에서 심문 끝에 순교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원도 지방, 특히 춘천교구 내 영동 지역의 순교 기록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많아, 연구는 아직 시작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춘천교구 홈페이지 ‘강릉 심능석(沈能錫) 스테파노 피신처 성지’ 의 기록이다 :

- 강릉지역에서는 이유일, 김성렬 등 많은 분이 순교하였지만

  치명일기에는 스테파노만 남아 있다.

“본디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년(1868년) 오월, 경포(京捕 - 서울 포교) 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 바오로와 함께 갇히었다가 치명하니

 나이 사십구 세 된 줄은 알되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

《치명일기 - 뮈텔주교 1895년》

 

병인박해 때 많은 순교자의 행적을 듣고 목격한 것을 증언해

순교자들의 유해발굴에 큰 기여를 한 <박순집 증언록>에는 ;

“스테파노는 강원도 강릉 굴아위에 살았다. 무진년(1868년) 오월 단옷날

 이 안토니오와 함께 동네 사람들이 놀고 있는 정자에 갔는데

 서울 포교 앞잡이로 다니는 자가 교졸들을 데리고 와, 저 사람이 안토니오라고 일렀다.

 포교가, 안토니오가 누구냐고 묻자 심 스테파노가 나서서, 내가 안토니오라고 하니

 포졸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그를 결박하려 했다.

 심 스테파노가 다시, 나는 결박하지 않아도 도망갈 사람이 아니다,

 내 집에 가서 동네 사람에게 진 빚을 갚은 다음 잡아가라고 한 후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마을에 진 빚들을 모두 갚고 포청에 잡혀갔다.”

 

 

1820년 횡성에서 태어난 심능석은 1838년 경기도 광주의 박성고(朴成皐)에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 샤스탕(Chastan) 신부를 만나 영세하고

1845년 입국한 페레올(Ferrèol) 주교에게서 견진을 받았다.

1862년경 용인에서 강릉 계촌(季村)으로 이주했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도피 생활을 하다가

1868년 5월 5일 이유일 안토니오(李惟一 1819~1868)와 함께 잡혀 서울 포청에서 치명했다.

심 스테파노는 포도청에서 “배교는 할 수 없고 아는 교인은 없으며

빨리 죽기를 바란다"고 진술하고는 5월 11일 순교했다.

심 스테파노는 시복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돼 있다.

<춘천교구 홈페이지 - 강릉 심능석 스테파노 피신처 성지>

 

칠사당-01-01.jpg

                                                <칠사당>

 

독특하고 단아한 조선 관아 건물 - 칠사당

 

강릉대도호부 건물들은 일본 강점기 이 자리에 강릉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면서

대부분이 철거되었고, 칠사당(七事堂)과 객사문(客舍門)만이 남아 있다.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인 칠사당은, 조선 시대에 부윤(府尹)이 주재하면서

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에 관한

일곱 가지 정사(政事)를 베풀던, 동헌(東軒)과 같은 관공서이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 10년(1632년)에 중건하고,

영조 2년(1726년)에 중수했으며, 고종 3년(1866년)에는 진위병(鎭衛兵)의 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 화재로 타 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가 중건했다고 한다.

 

 

칠사당-02-01.jpg                          칠사당-03-01.jpg

    <교인들이 묶였던 은행나무>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가 순교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칠사당 마당 한가운데에는 천주교인들을 묶어 갖은 고문을 가하며

심문했던 것으로 전하는 고목이 아직도 푸르름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강릉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인 칠사당은

한쪽이 다락 형식으로 된 ‘ㄱ(기역)자’ 형태의 건물로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단아한 조선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성지 자료실 - 강릉 동헌, 칠사당, 객사문>

 

 

고려말 건축된 현존 최고(最古)의 문 – 임영관 삼문

 

임영관 삼문-001-03.jpg

                                   <임영관 삼문=객사문>

 

칠사당 뒤편에 있는 국보 제51호 ‘임영관 삼문(臨瀛館 三門)'은

고려 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 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건물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전대청(殿大廳)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문의 옛 명칭은 '강릉 객사문'이었는데,

2010년 4월부터 '임영관 삼문'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영은 강릉의 옛 이름 중 하나이다. (임영의 瀛=바다 영.)

 

조선 영조 때인 1750년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임영지(臨瀛誌)』에 의하면,

임영관은 936년(고려 태조 19)에 창건되었고, 1627년(인조 5) 화재를 당하여,

1633년 부사 유문화(柳文華)가 다시 건축하였다.

 

일제시대에 학교 건물로 쓰이다가, 1967년 학교를 헐고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면서 객사문만 남아 있게 되었다.

강릉 남산의 오성정(五星亭), 남대천 옆 월화정(月花亭),

경포의 방해정(放海亭)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춘천교구 홈페이지 : 강릉 동헌과 객사>

 

헐린 건물들을 복원, 사적지 공원 조성

 

임영관 터는 1993년 경찰서 철거로 빈터가 되었다가

관상수를 옮겨심기 위하여 캐내던 중 건물 유구가 노출됨으로써

곧 발굴 조사에 착수, 대부분의 윤곽이 드러났고,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06년부터 객사문을 비롯해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동대청(東大廳), 낭청방(郎廳旁), 서헌(西軒)과

관아지(내아 동헌...) 등을 복원해 사적지 공원으로 조성했다.

(강릉시 용강동, 임영로131번길 6)

 

전대청-01-01.jpg

                                        <전대청, 임영관 편액>

 

1366년 공민왕이 낙산사 관음에 후사를 빌러 왔다가

길이 막혀 열흘 동안 강릉에 머물렀을 때 이곳에 들러 ’임영관(臨瀛館)’ 편액을 썼다.

임영관 철거 때 객사문에 옮겨 걸었던 것을

2006년 10월 복원 준공 후 본래 위치인 전대청에 달았다.

그러나 현재 걸려있는 편액은 1970년대에 모사 제작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호수와 산의 훌륭함이 유람하기에 좋은 곳, 의운루(倚雲褸)”

 

 

의운루 (2)-01-01.jpg

                                                       <의운루>

 

강릉 출신의 조선 초기 문신 박시형(朴始亨)은 기문(記文)에 쓰기를 :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으로 말미암고, 물화(物華)는 하늘이 내린 보배인 것으로서

그 절묘하고 장함이 대관령 동쪽에서는 집대성(集大成)하여, 유독 으뜸이 되게 한 것이로다.

그 호수와 산의 훌륭함이 유람하기에 좋은 것은 이곳의 어디를 가든 그러하나,

그중에서도 한두 가지를 든다면, 관도(官道)에 있는 누각은 의운(倚雲) 이라 현판 하였고,

연당(蓮塘)에 있는 누각은 이름이 운금(雲錦)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강릉대도호부 편>

 

객관 남쪽에 있던 의운루는 칠사당 뒤쪽 언덕 위에 복원되었다.

지금은 빌딩 숲에 가려 평범한 정자로 보이겠지만

루에 올라얹아 눈을 감고 조용히 서쪽 하늘을 바라보라.

구름을 허리에 감은 대관령과 태백산맥의 아름다운 모습이

천천히 앞으로 다가올 것이다.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