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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김대건 신부가 뱃길로 도착한 나바위성당

by 마정 posted Oct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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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김대건 신부가 뱃길로 도착한 나바위성당

나바위성당-01.jpg

                                                   <나바위 성당>

 

전라북도 익산의 나바위성당(익산시 망성면 나바위1길 146. 화산리 1159-2)은

상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가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고국 본토에 첫발을 내디딘 곳을 기념하여 세워진

역사적인 성당이며 가톨릭의 거룩한 성지이다.

 

라파엘 호의 수난

김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고(高)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은 직후인 8월 31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

교우 및 선원 등 14명과 함께, 라파엘 호로 이름한 작은 목선을 타고

조선을 향해 상해 항을 떠났다.

배 이름은 ‘여행자의 수호천사 라파엘’에서 따 온 것이다.

 

그러나 라파엘 호는 서해에서 풍랑을 만나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한경면 용수리)에 표착하게 되었다.

일행은 2∼3일 동안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출항,

마침내 10월 12일 금강 하류 황산 포구의 나바위 교우촌에 도착했다.

서해에서 28일의 표류, 제주도에서 나바위 까지 12일간 사투의 항해,

얼마나 힘들고 위태로운 귀국 길이었을지 머릿속으로만 유추할 뿐이다.

라파엘 호 모형.jpg     요셉신부 공적비 (2).JPG

        <라파엘 호 모형 – 성당을 보며 왼쪽으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면 라파엘 호의

            모형을 만난다. 실물 크기로 만들었다.>                          <베르모렐신부 공적비>

 

새로운 성당 건축

1897년 나바위에 본당이 설립되고,

베르모렐(Vermorel 장약실 요셉 張若瑟 1860~1937)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장 신부는 1906년 중국 인부를 동원,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해서 1907년에 완공했다.

명동성당과 전주 전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네루 신부가 설계하고

건축 양식은 한옥에 전통 양식을 택했는데,

그 뒤 1916년~17년에 흙벽은 양식 벽으로, 용마루 부분 종탑은 헐고

성당 입구에 벽돌조를 붙여 고딕식 종탑을 세웠다.

나바위성당 성전-남녀석을 가르는 열주..JPG

        <성전 – 복판의 열주(列柱)들 사이를 칸막이로 막아 남녀 자리를 격리했다.>

 

성당 내부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 관습을 따라

남녀 교우가 서로 구별하여 앉을 수 있도록

남녀 입구를 달리하고, 복도 복판의 기둥 사이를

칸막이로 막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우암이 쓴 글자-화산.JPG

    <화산 바위에 새겨진 ‘華山’. 우암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화산과 나바위의 유래

나바위성지는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華山里)의 화산 기슭에 있다.

화산이란 이름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이 산을 보고

매우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 준 이름이다.

<한국 지명 유래집>

송시열의 또 다른 호가 화양동주(華陽洞主)인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화산 남쪽의 나바우 마을에는 고운 바위(羅岩)가 많다’고 한 데서

<한국지명총람> 나바위란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있다.

김대건 순교탑 (1).JPG      김대건 소나무.jpg

                       <김대건 신부 순교비>                                    <김대건 소나무>

 

복자 김대건 신부 순교비

화산의 정상에 ‘복자 안드레아 김 신부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1955년에 라파엘 호의 형상과 크기를 본떠 만들었다.

비석을 밀어 눕히면 라파엘 호의 모습이 된다.

목선 길이 15자가 순교비의 높이가 되고, 넓이 6척이 순교비의 둘레가 된다.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에 세웠다.’는 나바위성당 홈페이지의 설명은

그 근거를 잘 모르겠다. 김대건 성인의 순교는 1846년, 탄생은 1821년이다.

순교 100주년은 1946년이니, 1955년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비를 ‘익산시 향토유적으로 지정’한 기사의

‘김대건 신부 상륙 110년을 기념하고자 건립됐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김대건 소나무

정상 오르는 길에는 ‘김대건 소나무’가 있다.

‘170여 년 전, 금강을 거슬러 조선에 들어온 스물다섯의 김대건 신부님은

 밤의 어둠을 뚫고 이곳 화산에 첫발을 내딛으셨다. 바로 이 자리에서

 신부님을 맞이했던 어린 소나무는 지금 이렇게 굵고 단단한 줄기를 자랑하며

 서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던가.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뿌리를 심어주시고, 순교의 피로

 그 거름이 되어주셨다. 그 뒤를 따르는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신앙의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순교자의 얼을 지켜나가기 위해

 다짐해 본다. 그러면서 굳건한 신앙,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김대건 신부님의 통공을 청하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아름다운 설명문이 순례자의 마음을 다잡아 준다.

망금정 (1).JPG

                                                       <망금정>

 

망금정

나바위성당이 건립되었을 당시 전라도 교회는 대구교구 소속이었다.

초대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주교는 해마다 5, 6월에

화산 정상에 있는 나바위에서 연례 피정을 가졌다.

베로모렐 주임신부는 주교님을 위해 1915년 정자를 지어 드렸다.

주교는 이 아름답고 조용한 정자를 망금정(望錦亭)이라 이름 붙였다.

사랑의 딸 수녀회 발현 성모 상.JPG      십자바위 (2).JPG

          <사랑의 딸 수녀원에 발현한 성모상>                      <십자 바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

화산 절벽 아래 십자가의 길에 자그마한 성모 동산이 꾸며져 있다.

여기 성모상은, 1830년 프랑스 파리 뤼드박의

성 빈체신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수녀원에서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발현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의 모습이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폭풍으로 침몰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 상본을 들고 기도하였다.

 

“저는 폭풍 속에서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성모님의 기적 상본을 내보이면서, ‘겁내지 말라. 우리를 도우시는

 성모님이 여기 계신다.’는 등등의 말로 가능한 대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1845년 김대건 신부 편지 중)

​<안내판에서>

 

십자 바위

‘십자가의 길 제6처’에 깊고 선명하게 십자가 형태로 갈라진

바위가 있다. 이곳이 김대건 신부가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안내판>

       

평화의 모후  (3).JPG     평화의 모후 야외성전 입구의 김대건 신부.JPG

           <평화의 모후>                                         <야외 성전>

 

평화의 모후

성당을 바라보며 왼쪽에 넓은 야외 성전이 있고

그 제단 뒤에 평화의 성모님이 서서 내려다보고 계신다.

이곳은 전라북도 3대 명당자리 중 하나라고 한다.

베르모렐 장약실 신부가 성당을 지을 때 큰 걸림돌이 있었으니

그것은 화산에 있는 암자였다.

장 신부는 암자의 스님을 찾아가, 이곳에 성당을 세우려 하니

암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실 수 없겠느냐고 정중히 물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쫓겨났다.

장 신부는 여기에 성당을 짓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를 바쳤다.

두세 달이 지난 어느 날 스님이 바랑을 지고 찾아와서는

‘이제 나는 이곳을 떠나니 암자는 신부님 마음대로 하세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뜻밖의 일에 놀란 장 신부가 어찌 된 영문인지 묻자 스님은,

‘신부님이 다녀가신 다음 날부터 매일 밤 제 꿈에 웬 여인이 나타나

 “이 자리는 내 자리이니 빨리 나가거라.” 라고 말하셨다.’는 것이다.

장 신부는 무사히 성당을 건립할 수 있었고,

1960년대, 그 자리에 평화의 모후가 모셔졌다.

성모님은 언제나 순례자들의 기도를 전구해 주시리라.

<안내판>

치유의 경당-001.JPG       나바위성당-치유의 경당 (1).jpg

                         <치유의 경당>                                         <치유의 경당 제단>

 

치유의 경당

성당 바로 앞의 건물은 1956년에 지은 강당 겸 진료소였다.

성 바오로 회 수녀들이 운영하였으며, 단순히 약을 나누어주는 시약소의 단계를 넘어

소규모 의원에 못지않은 의료기구를 갖추고, 간단한 수술도 가능했다.

2016년 재정비사업으로 2층 강당을 수리하여 ‘치유의 경당’으로 탄생시켰다.

 

입구의 예수님은 사형 선고를 받고 기둥에 묶여있다.

경당에 들어가는 참배객들은 예수님의 공로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상처와 고통에 대한 치유를 청할 수 있다.

나바위-마애삼존불.jpg

                           <마애삼존불상>

 

​마애삼존불상

화산 절벽 바위에 마애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다.

포구를 향한 이 불상은 백제 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지는데,

어선의 만선(滿船)과 항해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마애(갈 磨, 낭떠러지 崖)란 '암벽이나 석벽에 글자나 그림을 새김을 말하고,

삼존불은 본존불(本尊佛)과 좌우에서 시립하는 보처불보살(補處佛菩薩)을

합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석가모니를 본존불로 모신 대웅전에는 일반적으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좌우에 시립하는데

이곳 불상 좌우의 협시보살(夾侍/脇侍 시립하는 보살)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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