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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익산 여산성지 2 – 숲정이성지, 백지사 터

by 마정 posted Dec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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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익산 여산성지 2 – 숲정이성지, 백지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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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정이성지>

 

병인박해 때 여산의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 찼다.

갖가지 형벌을 당했고, 이들은 대부분 동헌 앞마당에서 백지사(白紙死) 하거나

또는 숲정이, 장터 등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병인박해의 연속인 1868년 무진년에는 여산 군의 속읍인

고산, 진산, 금산 등에서 체포되어 온 수많은 신자가 처형되었다.

 

이곳 순교의 특징은 공동체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잡혀 온 교우들은 옥중에서도 항상 쉬지 않고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면서

서로를 격려하였고, 무수한 고문과 매질의 고통과 굶주림을 견디어 내다,

마침내 차례차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여산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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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정이성지>

 

숲정이성지

 

칼 쓴 ‘죄인’들은 형장인 풀밭에 가서 칼이 풀렸다.

그들은 얼마나 굶주렸던지 양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전해진다.

 

순교 후 그 시신들은 형장 곁에 있던 미나리꽝에 던져졌다.

이를 보고 있던 신자들은 야음을 틈타 시신들을 건져냈는데,

입고 있던 솜옷 속에는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배가 고파 솜을 다 뜯어먹어 버린 것이다.

신자들은 시신을 일단 한 곳에 가매장 하였다가

훗날 일부를 찾아내 천호산(天壺山 전북 익산시 여산면과 

완주군 비봉면에 걸쳐 있는 산) 에 안장하였다.

완주의 천호성지에 이들 10명의 묘소가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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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정이성지>

 

여산 숲정이는 지금은 논과 밭 가장자리가 되어 있지만

박해 당시에는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고 한다.

 

숲정이란, 농촌 마을의 배후 산지 비탈면에 육림(育林) 되는

전통문화적인 숲으로, 상수리나무 소나무 왕대 등과

버섯 약초 산나물 등이 어우러진 다층(多層)의 식물사회로서

마을 뒷산에 숲정이를 이루는 것이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다.

<한국식물생태보감>

 

전주교구는 1983년 12월 숲정이 일대(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295)를 매입,

성지 조성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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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지사 터>

 

백지사(白紙死) 터 성지

 

여산 백지사 터 성지는 병인박해 당시의 천주교 탄압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소이다.

여산 지역에 천주교 성지가 다수 존재하는 것은

이 지역이 충청도와 전라도 경계에 위치하여 행정적 중심지였고,

천주교의 전파가 다른 지역보다 앞섰기 때문이었다.

특히 대둔산과 천호산 지역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조성하고자 했던

교우들이 모여듦에 따라 신자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순교자도 많이 나온 것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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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지사 터 - 성모상>

 

백지사형이란 죄수를 평좌시켜 말뚝에 묶은 뒤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품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시키는 사형 방법이다.

얼굴에 종이를 여러 겹 바르니 죽고 사는 것이 캄캄하다는 뜻으로

도모지 사형(途毛紙死刑)이라고도 불리는데

현대 표기 '도무지'가 여기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네이버 사전에는, ‘도무지 ← 도모지(塗貌紙) :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아주.

황 현(黃 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보면

엄격한 가정의 윤리 도덕을 어그러뜨렸을 때, 아비가 눈물을 머금고

그 자식에게 비밀리에 내렸던 '도모지(塗貌紙)'라는 사형(私刑)이 있었다.

자식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고 물을 묻힌 조선종이,

즉 창호지(窓戶紙)를 얼굴에 몇 겹이고 착착 발라놓으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말도 못 하는 상태에서 종이에 물기가 말라감에 따라

서서히 숨조차 쉬지 못하게 되어 죽게 하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도무지'는 이런 끔찍한 형벌에서 비롯하여

전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의미로 쓰게 되었다.’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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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지사 터>

 

 

백지사 터 성지 내에는 십자가상과 십사처로 조성한 십자가의 길이 있다.

십자가 아래 백지사를 당하던 천주교 신자의 모습을

화강암으로 형상화한 조각이 놓여 있어.

병인박해 당시의 비극적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983년 동헌 자리 아래, 부사의 집터를 매입하여 성지로 조성하였다.

 

 

여산 옥 터

감옥 터는 동헌 맞은편 여산초등학교 종합 학습장 부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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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산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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