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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처벌 교육’을 실천한 요한 보스코 성인

2013. 2. 6.

 

 

‘학창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라는 주제로 얘기를 하거나, 경험담을 쓴 글들을 많이 봅니다.

대부분 ‘학생들을 이해하고, 눈높이를 같게 하려고 애쓰시던 선생님’

아니면 ‘무슨 트집을 잡아서든지 체벌을 자주 하시던 선생님’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저희의 성장기에는 ‘체벌’이 아무렇지도 않게 가해졌습니다.

초등학교 때 가장 심했고, 중고등학교 때도 늘 자행됐습니다.

군대에서는 말할 것도 없어서, ‘기합(氣合 - 체벌)으로 날이 새고

해가 지는’ 세월이었습니다.

입영 첫 날 한 교관은 ‘현존하는 1백 30여 기합을 다 맛 보여주겠다.’

고 호탕하게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기합이라는 말 자체가 일본어 ‘기아이’에서 왔듯이,

‘일본식 교육’의 잔재로 체벌이 지속된 것입니다.

 

‘청소년의 아버지이자 선생님’으로 불렸던 요한 보스코 성인

(St. Giovanni Melchior Bosco - 존 보스코 또는 돈 보스코 1815년 8월 16일 - 1888년 1월 31일)은

‘무처벌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그는 ‘참는 것보다 화를 내는 것은 더 쉽고,

젊은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설득시키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지하고 예의를 모르고 불충실했던 사도들의 태도를 참아주셨고,

죄인들도 자비와 애정 어린 지극한 친밀성으로 대하셨습니다. ‘ 라고 설명하면서

’처벌‘ 보다는 ‘예방 교육’을 주창했습니다.

 

이성, 종교, 사랑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기반으로 교육함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예방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밝혔습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이탈리아 피에몬트주의 작은 마을 베키에서

가난한 부모의 3남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두 살 조금 지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어머니 마가레타가 생계를 책임졌고, 요한은 목동이 되었습니다.

 

본당 신부로부터 처음 공부를 배운 요한은 1835년 키에리의 신학교에 입학,

6년 뒤 사제가 되었습니다.

토리노시 ‘보호소’ (Rifugio = Refuge)의 사제가 된 요한 보스코는,

교도소등을 방문하여 교리 교육을 시키는 일도 병행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나쁜 짓만 배운 버려진 아이들을 보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합니다.

 

1841년 거리의 부랑아들을 모아 가르치는 예배당(Oratory)을 열었고,

이것이 ‘성 프란치스코 드 살회’(살레시오회)의 기원입니다.

1842년 2월 20명이었던 원생은 3월에 30명으로 늘어났고,

1846년 3월에는 4백 명이 되었습니다.

 

요한 보스코는 작업장을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구두 제작,

양재, 목공기술을 가르쳤고, 인쇄소를 차려 인쇄 및 제본의 기술을 가르쳤으며,

이 단체는 몇 년 후 공업학교로 발전합니다.

 

돈 보스코는 교육생들 중에서 협력자들을 찾아내 1859년 살레시오회를 창설하여

광범위한 선교 및 교육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1863년 미라벨라 몽훼라토의 소신학교가 설립됨으로서

살레시오회의 사업은 토리노 밖으로 지역을 넓혔고,

뒤를 이어 여러 지역에 예배당들이 세워졌습니다.

 

요한 보스코 생존 시 이미 6개국에 64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회원은 77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1872년엔 살레시오 여자 수도회인 ‘도움의 마리아 딸 수도회’가

창설되었습니다.

1875년 11월에는10명의 살레시오회원들이 남미에서

해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에 조직된 ‘협력자회’는 청소년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와 함께

경제적인 도움을 베풀고 있습니다.

 

1888년 1월 31일 요한 보스코는 세상을 떠나 하느님에게로 갔습니다.

1929년 6월 2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4월 4일 시성되었습니다.

 

1월 31일 축일을 맞아 성인의 일생을 간단히 추려보았습니다.

자료는 ‘가톨릭 백과사전 (Catholic Encyclopedia)’과

위키 백과 영문판(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을 주로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