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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병인양요 유발자들을 처형한 진무영(鎭武營)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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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무영 순교 성지>

 

1866년 고종 3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병인박해는 그 규모, 가혹함, 희생자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천주교 대 박해였다.

 

병인박해의 원인은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부터 비롯된다.

1864년 고종 1년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로 와서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 정권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대책은 무책이었다.

18659(음력) 러시아인 수십 명이 또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다.

 

천주교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 대원군의 정부인에 대한 작호(爵號).

흥선대원군의 부인 여흥(驪興) 민씨.>은 나라를 구하고,

신앙의 자유도 얻는 호기(好機)로 여겨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를 불러,

노국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프랑스인 주교를 불러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박 마르타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거처하는 집 주인 홍봉주(洪鳳周)에게

그 말을 전하고, 홍봉주는 승지 남종삼(南鍾三 요한)에게 알렸다.

 

남종삼은 한불조약 체결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으니

그를 위해 프랑스인 선교사의 힘을 빌리자는 청원서를 작성하여

대원군에게 올렸다.

대원군은 주교를 만나겠으며, 러시아를 물리치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고

응답했다. 이때가 1865년 양력 12월 말경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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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종삼 성인 초상 - 강화도 일만위 순교자 성지 내

                                                                   남종삼 기념관에 전시>

 

공교롭게도 18661월 하순, 북경에 있던 조선 사신에게서

편지가 도달했는데 그 내용은, 1860년 영불연합군에 의한

북경 함락의 보복으로 중국 도처에서 양인살육(洋人殺戮)이 벌어져,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신부, 신자들이 닥치는 대로 살해되었으나

외국으로부터 아무런 군사 행동이 없다는 것이었다.

 

천주교나 외세에 반대하는 정부 고관들은 이를 근거로

천주교 및 외국과의 교섭을 중단하라고 건의했다.

또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풍양조씨(豊壤趙氏)인 조대비까지 천주교도의 책동을 비난하기에 이르자,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결심하고

주교를 만나는 대신 선교사의 체포령에 서명하였다.

박해가 시작되어 37일 남종삼과 홍봉주가,

39일 최 형과 전장운이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참수되고,

새남터에서는 37일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Breteniere ) 신부,

도리(Dorie )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등

4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군문효수(軍門梟首) 되었으며,

311일 푸르티에(Pourthie ) 신부와 프티니콜라(Petinicolas ) 신부가 새남터에서,

330일 다블뤼 주교, 위앵(Huin ) 신부, 오메트르(Aumaitre ) 신부,

장주기(張周基), 황석두(黃錫斗) 등이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각각 순교하였다.

 

박해가 치열해 지자 피신해 있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는

이해 7월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 천진(天津)으로 가서

머무르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제독에게

조선에서의 박해 상황을 알렸고,

로즈 제독은 이해 107척의 군함을 이끌고 와 강화도를 점령,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다.

 

그러나 대원군은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프랑스 함대가 진출했었던 양화진(楊花津, 현재의 切頭山)에서

이의송(李義松), 김이쁜 부부와 아들 이붕익(李鵬翼)을 비롯한

수천 명의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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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무영 성지 - 01>

 

최인서 요한 (崔仁瑞 1811~1858)은 프랑스 함대가 왔을 때 배에 올라

리델 신부를 만났고.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에는 교우들과 함께

리델 신부를 따라 중국 상해로 갔다.

18674()에 장치선, 김계쇠 등과 함께 귀국한 그는

서울 산막리로 이사하여 쌀장사로 생활하던 중

1868410() 아내 주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어

522()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1830~1911)의 형 박서방,

조 참봉의 부친 조서방과 함께 강화도 진무영에서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장주기(요셉)의 조카 장치선(張致善1830~1868)5세 때

경기도 양지 언리에 사는 오자현에게 천주교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자라서 수많은 서적을 보고 외웠으며 국내의 모든 선교사를 다 만났다.

그는 리델 신부를 탈출시켜 프랑스 함대를 불러들였으며

국내 정세를 중국에 있던 리델 신부 등에게 긴밀히 연락하는 등의 일을

도맡아 실행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713일 진무영에서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진무영에서 순교한 사람은 이들 네 명밖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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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무영 성지 - 04>

 

 

진무영(鎭武營)은 조선 시대에 해상 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軍營)으로

1700(숙종 26) 강화부(江華府)에 그 본영이 설치되었다.

특히 병인양요 이후 외국 선박의 출입이 빈번하여

쇄국정책을 쓴 당시로서는 수도의 관문을 지키는 국방상 중요 군영이었다.

 

강화읍내 중심 도로에서 고려 궁지 쪽으로 약 100m 올라가면

왼쪽에 있는 은혜교회가 진무영 건물 자리이고,

200m 더 위의 강화성당 부근 까지가 진무영 터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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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성당-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