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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92 한국인 세 번째 사제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 순교한 이후,

6년이 지난 1845년 3대 페레올 주교가 입국했다.

페레올 주교가 1853년 의병 선종하자 4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베르뇌 주교는

1856년 서울에 입국하여 10년여 간 활약하다가

1866년 3월 7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 당했다.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을 봉직한 다블뤼 주교는

베르뇌 주교가 죽자 제5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22일만인 3월 30일 참수된다.

리델 주교는 1869년 6월 25일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돼, 1876년 입국했다가

1877년 체포돼 사형당하지 않고 중국으로 추방당해 1884년 선종했다.

 

1876년(고종 13년) 입국한 블랑 신부는 리델 주교와 함께 추방되었다가

1884년 6월, 주교로 승품되면서 제7대 조선교구장으로 부임했다.

1890년 블랑 주교가 선종하자 뮈텔 신부가 주교가 되어

제8대 조선교구장에 취임했다.

 

 

조선 기독교 박해는 1886년 한불조약에 종교의 자유가 포함되면서

역사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한편 김대건이 1845년 8월 17일 최초의 사제가 되고,

두 번째 신부 최양업이 1861년 병사한 이후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신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 한국인 세 번째 신부는 언제 탄생했는가?

 

 

강도영 신부가 세운 김대건 신부 경당.jpg 

<강도영 신부가 세운 김대건 경당>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1850년(철종 1년) 조선교구 신학교를 세웠고,

그해 9월 교장 다블뤼 신부(후에 제5대 교구장)는 배티 교우촌에 신학교를 정착시켰다.

다블뤼 신부의 뒤를 이어 최양업 신부가 신학교를 맡았고

1854년 3월까지 임 빈첸시오, 김 사도요한, 이 바울리노의 세 신학생을

페낭으로 유학을 보냈다.

1858년에는 다시 세 학생을 파송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학교는 폐쇄되었다.

 

1876년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점차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블랑 주교는 1882, 1883, 1884년

3차례에 걸쳐 21명의 신학생을 유학 보냈다.

 

서울을 떠난 이들은 인천 부산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 - 홍콩 - 싱가포르를 지나

50여일 만에 페낭에 도착했다.

유학생들은 언어와 풍습 기후와 음식이 다른 땅에서

풍토병에 시달리는 등 갖은 고생을 다 했다.

병사자도 일곱명이나 나왔다.

 

강도영 신부(앞줄 왼쪽 3) 은경축 - 정규하 신부(앞줄 왼쪽 2) - 1921년 미리내 성당.jpg 

 

<강도영 신부(앞줄 왼쪽 3) 은경축, 정규하 신부(앞줄 왼쪽 2)

  - 1921년 미리내 성당 >

 

 

 

그러나 조선의 명예를 위해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분투해

2~3개월 만에 라틴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고 한다.

이들은 10여 개국의 다른 나라 유학생들과 함께 4∼9년 동안

교양과정, 철학과정, 신학과정을 공부했다.

 

 

1885년 10월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 7명의 신학생으로 개교했다.

이듬해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자

1887년 3월 현재의 성심여고 자리를 매입, 부엉골 신학교를 이전하고

유학생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

 

 

드디어 1896년 4월 26일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에서

세 번째 한국인 신부가 탄생했다.

뮈텔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은 세 신부 중 나이순에 따라

강도영(1863~1928) 신부가 세 번째, 정규하(1863~1943) 신부가 네 번째,

강성삼(1866~1903) 신부가 다섯 번째 사제로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후 35년 만에 맞은 조선인 사제들이다.

 

 

페낭 유학생 중 강도영(姜道永) 강성삼(姜聖參) 김문옥(金紋玉) 김성학(金聖學) 김승연(金承淵) 김양홍(金洋洪) 김원영(金元永) 이내수(李廼秀) 이종국(李種國) 정규하(鄭圭夏), 한기근(韓基根) 홍병철(洪秉喆) 의 12명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에서 34년간 사목하면서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묘소를 단장하고 기념 경당을 건립했으며

애국계몽운동 일환으로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양잠과 농업기술을 가르쳐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정규하신부-01.jpg 

<정규하 신부>

 

 

정규하 신부는 본당 부임과 함께 노름에 빠져 있는 신자들을 바로잡는 일에 힘썼으며

아름다운 풍수원 성당을 건립했다.

 

강성삼 신부는 밀양 본당에서 진양 양산 언양 등 14개 공소와

500여명의 교우를 대상으로 사목하던 중 6년만에 37세로 요절했다.

페낭 신학생 시절 얻은 풍토병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