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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93 병오박해 丙午迫害

 

1839년 시작된 기해(己亥)박해는 1841년 마무리가 지어졌으나

살아남은 교인들의 생활은 참담할 뿐이었다.

교우촌은 송두리째 뒤집혀 수천의 신자는 몸 붙일 곳을 잃었으며

흩어져 팔방의 산골로 피해 들어가 골짜기를 일궈 생계를 유지했다.

천주교도들이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알려져

기존 주민들이 돈을 빌려주고 종자를 나눠주어 정착을 도왔다.

 

 

1839년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이후

조선에는 사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샤스탕 신부의 복사 현석문(玄錫文, 가를로),

모방 신부의 정 베드로, 이승훈의 손자로 아내가 죽은 후부터

앵베르 주교의 복사가 되었던 이재용(토마스) 등이 교우들의 신앙을 다시 일으키고

교회의 재건에 힘쓰고 있었다.

 

 

한편 1838년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가 되고, 이듬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페레올 신부(高 Jean-Joseph-Jean-Baptiste Ferreol 1808. 12. 27. ~ 1853. 2. 3.)는

1840년 마카오에 도착, 정크선을 타고 복건성(福建省)으로 건너가 육로로 만주에 이르렀다.

그러나 봉천(奉天)에서 더 나가지 못하게 돼 몽고(蒙古)로 들어가 2년간 머물며

조선인 교우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조선 교우들도 선교사들과 연락을 다시 맺으려고 노력해

1840년 한 교우가 국경을 향해 떠났다가 도중에 죽었고,

이듬해에도 다른 교우가 국경까지는 갔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마침내 1842년 세 번째로 길을 떠난 김 프란치스코가 페레올 신부와 만날 수 있었다.

 

 

1843년 12월 만주에서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페레올 고 주교는

1844년 12월 부제가 된 김대건 신부와 소팔가자를 떠나

중국쪽 국경인 봉황성 변문에 도착, 1845년 1월 1일 이미 와 있던 조선 신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의주 변문 쪽 경비가 삼엄해 입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845년 8월 31일 페레올 주교는 보름 전 사제 서품된 김대건 신부, 안 다블뤼 신부,

그리고 김대건을 따라 조선에서 와 있던 현석문 등 신자들과 함께

길이 25자, 너비 9자, 깊이 7자 짜리 작은 배 라파엘 호를 타고 중국을 출항,

천신만고 끝에 제주도에 표류하고, 다시 떠나 무려 15일 만인 1845년 10월 12일

강경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나바위에 도착했다.

기해박해 이후 6년 만에 주교와 외국인 신부, 최초의 한국 사제가 입국한 것이다.

 

 

페레올 高 주교는 만주에 머물러 있던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부제를 맞아들이려 했으나 육로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바닷길을 찾기 위해 김대건 신부를 황해도로 보냈다.

1846년 5월 13일 서울을 떠난 김대건 신부는 백령도(白翎島)에 다다라,

중국 모인도(毛仁島)를 거쳐 한국에 입국하는 해로(海路)를 살피던 중

순위도(巡威島)에서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어 현석문 등 10여명이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김대건은 온갖 가혹한 추궁에도 굴하지 않고

이미 밝혀진 교인들 이외에는 불지 않았다.

활동 중이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 선교사들이 살아남았고,

천주교회는 큰 희생 없이 박해를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던 중 6월 하순 프랑스의 군함 세 척이 조선에 와서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샤스탕, 모방을 죽인 책임을 물은 사건이 생겨 민심이 흉흉해지자

정부는 김대건 신부 등의 처형을 서두르게 되었다.

 

김대건에게는 반역과 사교(邪敎)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軍門梟首)를 선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하였고 현석문은 9월 20일 처형당했으며

나머지 7명은 옥에서 장살(杖殺)당했다.

이를 병오박해라 한다.

 

 

 

 

현석문-01.jpg

    <현석문 가를로>

 

 

 

현석문은 서울 중인 계급 출신으로 독실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신유박해로 부친 현계흠(베드로)이, 기해박해 때는 누님 현경련(베네딕타)과

아내 김 데레사, 아들 은석이 순교했다.

 

명도회원이 돼 이경언 정하상을 도와 성직자 영입을 도모,

1836년 의주로 가서 앵베르 주교를 맞아들였다.

1837년 샤스탕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자 그의 복사가 되어 교우촌을 순회했다.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하이에 가서 페레올 주교와 함께 입국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회장에 임명돼 앵베르 주교로부터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고 조선교회를 돌보라는 임무를 맡았다.

 

도피에 성공한 현석문은 ‘이재영'이라는 가명으로 선교 활동을 하면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기해일기’ 를 완성했다.

 

 

현석문은 교회 지도자이자 외국을 비밀리에 왕래했다는 죄목 등으로

9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당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수습이 허락되지 않았다.

순교를 목격한 이민식 빈첸시오(李敏植 1829∼1921)등 신자들은

형장을 40 여 일간 맴돌다가 10월 26일 밤 감시를 뚫고 시신을 획득했다.

이민식은 시신을 환자로 위장하여 등에 업고 밤을 도와 산길을 걸어

일주 일만에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 선산에 김 신부를 안장했다.

겨우 17세의 소년이 이룩한 쾌거였다.

이민식은 평생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돌보다가 1921년 12월 9일 사망,

미리내 성지에 묻혔다.

 

 

<馬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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