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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94 북한의 가톨릭

 

가톨릭교회는 예수의 제자들, 즉 12사도(使徒)의 후계자인 주교들에 의하여

관할되는데, 이를 교구(敎區)라고 한다.

교구는 작은 신자 공동체인 본당(本堂 - 단위 교회)으로 나뉘며,

이 본당에서는 주교가 파견한 사제가 주교의 대리로서 사목한다.

하나 이상의 교구가 관구(管區)를 이루어 대주교(archbishop) 혹은

수도주교(metropolitan)가 관할한다.

 

 

우리나라에는 다음 세 개의 관구가 있다.

 

서울관구 : 서울대교구, 의정부교구, 춘천교구, 원주교구, 인천교구, 수원교구, 대전교구,

               평양교구, 함흥교구.

 

대구관구 : 대구대교구, 청주교구, 안동교구, 부산교구, 마산교구.

 

광주관구 : 광주대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교황청 직속 교구 : 군종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

 

 

남북한 정부는 둘 다 유엔에 가입한 독립국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북한의 가톨릭교회들은 엄연히 서울 관구에 소속돼 있다.

 

 

평양교구는 194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노기남 주교가 5대 교구장이 된 이래

6대 홍용호 주교(1943. - 1950.) 7대 안 제오르지오 몬시뇰 (1950. - 1975. 서리)

8대 김수환 추기경 (1975. 6. 10. - 1998. 4. 3일. 서리)

9대 정진석 추기경 (1998. 6. 6. - 현재. 서리) 이 교구장이다.

 

함흥교구의 역대 교구장은 초대 신상원 주교 (1920. 8. 25. - 1950. 2. 7.)

2대 이성도 몬시뇰 (1952. - 1981. 5. 22. 서리)

3대 이동호 아빠스(수도원장) (1981. 5. 22. - 2005. 11. 21, 서리)

4대 장 익 주교 (2005. 11. 21. - 2010. 1. 28. 서리)

5대 김운회 주교 (2010. 1. 28. - 현재. 서리) 이다.

 

 

해방 당시 한국 교회에는 5개의 교구 <대목구 - 代牧區 : 교계(敎階) 제도가 설정되지 않은

구역을 교황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교구. 정식 명칭은 ‘교황 대리 감목구(監牧區)’>와

3개의 지목구<知牧區 : 포교지교구 또는 준교구의 하나로서 대목구보다 규모가 작은 것>,

1개의 수도원 교구<면속구 - 免屬區 : 지역교회에 예속되지 않고 교황청에 직속되어,

대수도원장 혹은 고위 성직자가 교구장에 준하는 재치권을 행사하는 자치지역.>가 있었고,

신자 수는 대략 18만여 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남한에는 서울교구, 대구교구, 전주지목구, 광주지목구, 춘천지목구에

11만여 명, 북한에는 평양교구, 함흥교구와 덕원수도원교구에 5만여 명,

그리고 만주의 연길교구에 2만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1946년 교황청은 중국에 정식 교계제도(敎階制度)를 설정하면서

연길교구를 조선 교회에서 분리하여 중국 교회로 이관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평양교구에서 신자들의 노력으로 대성당을 건설하는 등

활발한 종교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북한 교회는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된다.

종교는 일종의 미신이며 아편과 같은 것이어서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혁명 의욕을 상실케 하며, 종교의 기능은 노동자 농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도구이자 제국주의적 침략의 사상적 도구 역할이 전부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종교관을 따랐다.

 

1949년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가 체포되어 행방불명되었고,

함경남도 덕원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사우어 주교도 잡혀 옥사했다.

이 밖에도 거의 모든 성직자들이 육이오 전쟁 직전 체포되거나

전쟁 중 피살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교회는 폐쇄되었고 종교는 사라졌다.

 

 

1972년 7 · 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뒤 조국 해방과

통일을 위한 통일전선론이 강화되면서

북한은 종교 신앙의 존재를 인정, ‘조선기독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등 종교단체의 공식 활동을 재개시키고,

주요 사찰을 복원했다.

 

1983년에는 성경, 찬송가 등 기독교 관련 서적이 출판되었고,

1985년에는 평양에서의 미사와 예배가 허용되었다.

 

 

장충성당-03-01.jpg

 <장충 성당>

 

 

 

1988년 9월 평양시 선교구역 장충동에 ‘장충 성당’이 세워져

이후 매주 일요일 오전 9시와 10시, 11시 세 차례 미사를 보고 있으며,

‘조선 천주교인 협회'가 창설되었다. (1999년 ‘조선 카톨릭 협회'로 개칭)

 

 

1987년 6월, 북한이 평양에서 개최한 비동맹특별각료회의에 바티칸대표단을 초청했는데,

한국 교회는 이 대표단에 장 익 주교(전 춘천교구장. 당시 서울대교구 사제)를 파견했다.

장 주교는 5명의 가톨릭 신자를 찾아냈고, 이들 중 박덕수 홍도숙 부부는

이듬해 1988년 부활절 바티칸에 초청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했다.

 

그해 10월 장 주교와 정의철 신부는 새로 건축된 장충 성당에 가서

축성하고 미사를 봉헌했다.

 

 

 

장충성당 제대-02-01.jpg

 <장충 성당 제대>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1982년 12월 10일 ‘북한선교부’를 출범시켰다.

1984년 2백 주년 사업이 끝나자 북한선교부는 주교회의 직속기구로 개편되고,

1985년 10월 북한선교위원회로 이름을 바꿔 본격적인 대북선교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1995년 서울대교구는 ‘민족 화해 위원회’를 조직하여 북한 문제를 총괄하고 있다.

 

1995년 북한에 수해가 나자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를 통해

9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8천만 원의 긴급 구호 자금을 북한에 전달함으로서

북한 주민을 위한 지원이 시작됐다.

이후 국수, 감자, 옥수수, 연탄, 어린이 영양제, 백신 등 다양한 형태의 지원이 계속되어,

1997년에는 약 4억5천만 원 상당의 식량 및 의류를 보냈고,

같은 해 12월 북한동포 겨울옷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민족 화해 위원회에서는 북한 돕기 캠페인을 통해서 모금된 자금으로

식량과 비료 등을 꾸준히 보내주고 있다.

 

 

포스트 김정일 체제는 당장은 몰라도

점진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리라 예상된다.

 

그러나 빠른 시일 내의 북한 선교 전망은 불투명하다.

중국 정부는 교황청의 주교 임명을 ‘내정간섭’으로 받아들여 강력히 거부하고 있다.

중국보다 ‘자주성’에 훨씬 민감한 북한이 “남한 인을 비롯한 외부 임명 사제”를

받아들이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 분명하다.

 

 

진행하고 있는 인도적 지원을 늘려 북한 주민 접촉을 확대하고,

이를 통해 간접 선교를 하는 것이 현재로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북한 사람들이 ‘천주교는 좋은 일 하는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 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되, 동포에 대한, 인간에 대한 사랑의 진정성을

느끼게 해야만 한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의 향기’를 갖추도록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할 일이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