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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95 병인박해 丙寅迫害

 

1864년 고종 1년, 그리고 이듬해 음력 9월 러시아인 수십 명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로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다.

막 집권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당황하여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천주교를 믿고 있던 고종의 어머니, 이하응의 부인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민씨(1818-1897)는 프랑스의 도움이 있으면 러시아인들을 물리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천주교 신교의 자유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에게 베르뇌 주교를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박 마르타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거처하는 집 주인 홍봉주(洪鳳周) 에게

그 말을 전하고, 홍봉주는 승지(承旨)인 남종삼(南鍾三 요한)에게

청원서의 작성을 부탁했다.

 

 

남종삼은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프랑스황제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프랑스인 선교사의 힘을 빌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요지의 청원서를 대원군에게 올렸다.

 

 

남종삼-01.gif 

  <남종삼>

 

 

 

대원군은 남종삼을 불러 친불 외교와 천주교에 관해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황해도에 나가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면담할 뜻을 전하도록 했다.

 

남종삼은 곧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서울에 오도록 연락했다.

주교들이 서울에 도착한 이틀 뒤 1866년 1월 31일(음 12월 15일)에

남종삼은 대원군을 또 만났다.

지난번 면담 이후 한 달 정도가 지나서였다.

 

 

대원군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냉랭한 태도로 그를 맞았다.

남종삼이 주교들 상경 소식을 말하려하자 “그대는 왜 아직 서울에 남아 있는가.

부친에게 인사차 시골로 내려간 줄 알았는데.” 하며 말문을 막았다.

남종삼이 “중요한 일이 있어서 서울에” 하고 말하자 대원군이 또 가로막으며

“이젠 급한 일이 없네. 부친에게 가서 모든 것을 상의하게.” 하고 남종삼을 내보냈다.

 

 

대원군의 태도가 표변한 원인은 중국에서 벌어진 양인살육(洋人殺戮)의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1860년 10월 영불(英佛) 연합군에 의한 북경 함락은 종교 자유의 계기가 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그들은 무서운 보복을 받게 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중국 도처에서 벌어져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신부,

신자들이 닥치는 대로 살해되었다.

 

 

한국 사신의 서한으로 이러한 내용이 전해지자,

천주교에 반대하는 고관들은 대원군의 대천주교 교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과거 중국에서의 영불군의 승리를 상기시키면서,

조선도 그런 침략의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고관들은 그것이 기우(杞憂)라고 주장하고,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를 죽였다고 누가 복수를 했으며

 이로 인해 우리가 받은 손해는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했다.

 

또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趙大妃 - 신정왕후 神貞王后 1808~1890. 헌종의 어머니)까지

천주교도의 책동을 비난하기에 이르자,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결심하고 선교사의 체포령에 서명하였다.

 

 

베르뇌 주교-01.jpg 

  <베르뇌 주교>

 

 

 

고종 3년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2월 23일(음 1월 9일)

베르뇌 주교, 홍봉주, 이선이(李先伊) 등이 체포되었다.

이선이가 남종삼을 비롯, 프랑스 신부 3명과 평신도인 정의배(丁義培),

전장운(全長雲), 최형(崔炯)등을 불었다.

이선이는 홍봉주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베르뇌 주교의 사환으로 일한 자로서

선교사, 교회, 신자 등 그가 아는 모든 것을 고발하고 철저히 배교했다.

 

3월 1일(음 1월 15일) 남종삼이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체포되었다.

3월 4일에는 천주교 서적과 그 판본(版本)을 국정(鞠庭)에서 불태우라는

왕명이 내렸고, 전국의 천주교 서적을 압수 소각하라고 명하였다.

 

3월 7일 남종삼과 홍봉주는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참수되고,

같은 날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Breteniere, 白)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등

4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3월 11일에는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와 프티니콜라(Petinicolas, 朴) 신부가 새남터에서,

3월 30일 다블뤼 주교, 위앵(Huin, 閔) 신부,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 등이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각각 순교하였다.

 

 

피신해 있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는 7월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 천진(天津)으로 가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제독에게

조선의 박해 상황을 알렸고, 로즈 제독은 이해 10월 7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다.

 

 

대원군은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양화진(楊花津, 현재의 切頭山)에서

이의송(李義松), 김이쁜 부부와 아들 이붕익(李鵬翼)을 비롯한

수천 명의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지방에서도 박해는 치열해져 11월 경상도 문경(聞慶),

12월에는 전주 숲정이에서, 1867년에 접어들어서도 전국에서 수많은 천주교인이

사형당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말살 정책은 1868년 4월(음)에 일어난

오페르트의 남연군(南延君)묘 도굴사건으로 인해 더욱 굳어져 갔다.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 12. 5. - 1903. 9. 19.)는

  독일의 상인이자 항해가이다.

  1866년 영국인 모리슨과 함께 충남 아산만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해 다시 강화도의 갑곶진에서 통상을 요구하려 했으나 병인박해로 실패했다.

  1868년 다시 조선에 와서 아산만 덕산군에 상륙하여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 시신을 담보로 통상을 요구하려다 무덤 위의 생석회층을 못 깨 실패했다.

  그는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이라는 책을 썼다.]

 

 

박해는 다시 가열되었다가 1869년과 1870년 2년 동안 잠시 가라앉았으나

l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로 다시 치열해졌고, 대원군은 전국의 각 요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1873년 실각할 때까지 천주교를 탄압했다.

이 기간 동안 처형된 신자는 8천명 - 2만 여명으로 추정된다.

 

1890년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아 ‘치명일기’를 간행했다.

여기 수록된 877명의 순교자 중 24위는 1968년 복자위(福者位)에,

그리고 1984년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