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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74 두 번째 신부 최양업


TV의 한 인기 코미디 프로그람에 나온 ‘일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 이라는 대사가

크게 유행했었다.

세상이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만 알아주고, 그들 위주로 움직이고 있음을

신랄하게 풍자한 코너였다.

그걸 보면서 깔깔 웃고, 시원해 하고, 분노한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이 코너가 큰 히트를 친 건데, 아마도 시청자의 대부분은 자기가 ‘알아주지 않는 집단’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등만 알아주는’ ‘나와 신분이 다른 집단’에 대해 반감을 느끼고,

그들을 ‘더럽다’고 질타함을 통쾌하게 여겼으리라.


그러나 과연 반드시 그러한가?

우리 자신 또한 ‘일등만 알아주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런 ‘잘 나가는 그룹’에 낀 일이 없으므로 늘 ‘피해자’였지,

‘가해자’가 돼 본 일이 없다고 확신하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그런 ‘더러운 세상’을 만드는데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가톨릭 상식에 대한 문제를 내겠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는 누구입니까?

금세 정답을 맞히시겠지요?

네, 김대건, 정답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신부는 ?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면, 이 글의 제목을 보고 답을 맞히셨나요?

또는 아직도 모르십니까?

우리는 이렇듯 여러 분야에서 알게 모르게 ‘일등만 알아주고’ 있는 것이다.



최양업(崔良業 1821∼1861)은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이다.

양업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세례명 토마스.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경환의 부친 최인주(崔仁柱)는 서울에 살다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다락골에 이주,

정착했었다.

그러나 박해가 지방에까지 미치자 최경환 대에 솔가해서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가,

과천(果川)의 수리산(修理山) 뒤뜸리로 옮겨 담배를 재배하며 교우촌을 이루었다.


 

최양업-01.jpg

 

 

1836년 초 한국 입국에 성공한 파리외방선교회의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 맨 먼저 최양업을 뽑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을 선발했다.


1836년 12월 3일 세 소년은 마카오 유학을 위해 평안북도 의주(義州)로 향했다.

이들은 중국 대륙을 횡단,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최방제는 1839년 11월 26일 병사하고, 남은 두 학생은 공부를 계속하다가

1842년 프랑스 군함의 조선 원정에 통역으로 차출돼 갑자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입국하지 못하고 중국 장춘(長春)의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844년 두 사람은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 연령(만 24세) 미달로 사제품은 받지 못했다.

이 해 김대건은 입국했고,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으며, 

같은 해 연말 입국에 성공했다.

입국 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입국의 시도를 거듭하기 다섯 번만의 성공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5개 도의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교우들을 심방하고 성사를 집전했다.

1년간 7천여 리를 걷고 4천여 명의 고해를 들었다.


철종 연간(1850∼1863)은 천주교가 묵인되던 때여서 정식 박해는 없었으나

전교여행은 어려웠고, 외교인들의 습격으로 체포될 뻔도 했고,

추방되고, 관가에 고발되는 등 도처에서 위험을 겪어야 했다.

그는 바쁜 전교활동 중에서도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로 보냈고

선교사들의 입국을 주선했으며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까지 수집하는 등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혼자서 1천여 명의 예비 신자를 만드는 큰 성과를 거두고 있던 1859년 말에

경신박해(庚申迫害)가 일어났다.

최 신부는 경상도의 한 공소에서 여러 달 동안 외부와 완전히 두절된 채 갇혀 지냈다.


다행히 박해는 곧 끝났고, 그는 밀린 전교활동을 만회하고자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었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났다.

무리를 거듭하던 그는 주교에게 보고 차 상경하던 중 1861년 6월

과로로 경상도 문경(聞慶) -충청도 진천(鎭川)설도 있음 - 에서 쓰러져

보름 만에 사망했다.


그는 12년 간 지칠 줄 모르는 열성으로 사목했다.

김대건 신부의 성성(聖性)이 ‘피의 증거’(순교)였다면

최양업 신부의 일생은 ‘땀의 증거’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19통의 라틴어 서한과 라틴어 작문 2통을 남겼다.

또, 그의 부모의 순교 사적을 위시하여 한국 순교자에 관한 증언과 자료도 수집했는데

다블뤼(Daveluy, 安敦尹) 보좌주교는 그것을 그의 비망기(備忘記)에 수록했고,

달레(Dallet)는 그것을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했다.

“1839년과 1846년에 조선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 현 가를로와 이 도마 수집.

 벨리나 주교의 프랑스 원문으로부터 최 토마스 부제 번역” 이라는 제목의

≪한국순교자전≫을 번역했다.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된 ≪성교요리문답≫과 주요 기도서를 번역한 ≪천주성교공과≫

도 최양업이 기초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향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많은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저술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고증은 돼 있지 않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가세.

      인간 영복(永福) 다 얻어도

      죽고 나면 허사되고,

      세상 고난 다 받아도

      죽고 나면 그만이라.

      아마도 우리 낙토(樂土)

      천당밖에 다시없네.


      - 사향가(思鄕歌) 중에서


<馬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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