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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77 도미니코 성인


신부가 바에 들어서서는 첫 번째 만난 사내에게 물었다.

‘당신, 천당에 가고 싶어요?’

“네, 가고 싶고말고요.”

‘그럼, 저쪽 벽 앞 의자에 앉아계세요.’


신부가 두 번째 손님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천국에 가고 싶으냐고.

“네, 신부님, 꼭 가고 싶습니다.”

‘음, 저 벽 쪽 의자에 앉으세요.’


세 번째 사나이에게도 천국에 가고 싶은지 물었다.

그 사나이가 대답했다.

“아니요.”

놀란 신부가 다시 물었다.

‘아니, 당신은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지가 않단 말입니까?’


“물론 죽어서 천당엘 가고 싶지요.”

사나이가 큰 소리로 답했다.

‘그런데 아까는 왜 아니라고 했나요?’

신부가 묻자 사나이가 설명했다.

“아까는 신부님이 당장 천국에 데려갈 사람들을 모으는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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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세기의 교회는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리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여러 가지 이단 운동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특히 가타리(Cathari)파 같은 경우는 프랑스 남부 지방에 광범위하게 퍼져

기사 귀족 영주 심지어 일부 성직자들까지 추종세력화 하기에 이르렀다.


가타리파는 상당히 이교도적인 교파였는데

마니교 (창시자의 이름을 따라 조로아스터교라고도 한다.)의 이원론적인 교리를 지닌다.

세상을 창조한 신은 선신(善神)이 아니라 악신(惡神)인데

왜냐하면 이 세상, 물질계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 악한 세계에 '선한 영혼'과 '악한 육체'를 가진 이원론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악한 세계를 벗어나 선신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은

육체를 부정하고 영혼을 맑게 하는 고행을 통해서이며,

물질계를 벗어나 선신이 지배하는 비물질계, 천국으로 가는 것이 이 종파의 목적이다.


이들은 교회를 부정하고 교계제도의 불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순회 설교를 통해 신자들을 모았다.


가타리파가 성행했던 알비 지역의 가타리파(알비파라고도 불린다.)는

성직자제도도 거부하였다.


이들의 세력 확장은 교회는 물론 국가의 질서마저 무너뜨리는 우려를 낳게 했고

1208년 이단 조사를 위해 파견한 교황대사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십자군을 조직하여 7년간 토벌 전쟁을 벌였다.


이들의 이단에 맞서 교회 정통 교리를 전파하고,

교회 쇄신을 위해 활동한 이가 성 도미니코이다.


그는 1170년 스페인 카스틸랴 지방 칼레루에가 마을에서

성주였던 펠릭스 데 구즈만과 신앙적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 요안나의 아들로 태어나,

1184-1194년 팔렌시아의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195년 사제에 서품된 것으로 알려졌다.


성인은 사제가 된 뒤 이단이 횡행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말로만 하는 설교는 아무런 힘이 없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게 순례하며

몸소 실천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택했다.


1199년 오스마에서 주교좌성당 참사회원으로 임명되었고,

1203년 오스마의 복자 디에고 데 아제베도 주교를 수행,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로 가서 알비파 이단을 상대로 설교하였다.


도미니코를 따르는 알비파 여성들을 위하여

1206년 프루이유(Prouille) 수도원을 마련하면서

도미니칸 봉쇄 수녀회를 설립했다.


1208년부터 7년간의 대 알비파 십자군전쟁 때는

종군하며 이단자들에게 설교하였다.

1214년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알비파의 회개를 위하여 활동할

수도회를 세웠다.

이 수도회는 그 다음 해에 툴루즈(Toulouse)의 주교로부터

교회법적으로 승인 받았다.

1216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의 승인으로

도미니코 수도회, 일명 설교자회가 설립되었다.


도미니크 수사의 CD 굽기.jpg

<도미니크 수사의 CD 굽기--- 문서를 CD 에 일일이 적어 넣는다. ㅋ ㅋ ㅋ>


그 후 성 도미니코는 수도회의 조직을 위해 여생을 보내면서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고 프랑스 등지를 다니며

순회 설교를 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지성적인 생활과 대중들의 요구를 잘 조화시켜

회개운동을 꾸준히 전개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헝가리 순회설교 때 병을 얻어 1221년 8월 6일 볼로냐(Bologna)에서 선종했다.

그 해 서유럽 8개 관구에 500여명의 수사들과 60여개 수도원이 있었으며,

1300년 경에는 500여 수도원에서 1만여명의 회원이 활동하였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청빈과 겸손을 강조하였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며 살 것을 강조했다.


두세 번이나 주교로 선임되었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다.

주교직을 갖기보다 자기 형제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아가기를 더 원했다.

일생을 통해서 내내 흠 없이 순수성을 간직했다.


“마음의 겸손으로 그는 가장 작은 자였고, 성덕으로는 첫째였으며,

 밤낮으로 자주 성당에 갔고, 끊임없이 기도에 몰두하였고,

 수도원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하느님과 함께 생각하는 데에서 큰 즐거움을 발견했다.“ 


12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은 8월 8일이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