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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80 기해박해 (己亥迫害)

 

순조(純祖, 1790-1834년)가 11세에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후비인 할머니 정순대비(貞純大妃)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남인(南人)과 노론 시파(老論 時派)의 정적인 노론 벽파(僻派)가 정권을 잡았고,

서학(西學)에 심취한 사람이 많았던 남인 시파를 몰아내기위해

천주교도를 잡아 처단한 것이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1802년 시파인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의 비(妃)가 되자

정권은 시파로 넘어가, 천주교에 관용적인 세도정치가 36년간 이루어졌다.

 

순조는 1827년 2월 28일 아들 효명세자에게 정사를 대신 맡아보게 했다.

그런데 이 세자의 장인이 조만영(趙萬永)이었고 당시 어영대장이었다.

그는 아우 인영(寅永)과 함께 세력을 펴기 시작하여, 안동 김씨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김조순이 1832년에 죽고, 2년 뒤 순조가 죽자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게 되었으며 그 오빠 김유근이 정권을 잡았다.

김유근은 병환으로 1836년부터 말조차 못하다가, 역관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로

1839년 5월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김유근이 은퇴하자 헌종을 보좌하던 조인영과, 그와 절친한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지연은 1839년 3월, 이조판서가 된 형 조만영(趙萬永)과 함께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하여야 한다’고 상소, 천주교 토벌을 시작했다.

43명이 체포되어 대부분 배교(背敎)하여 석방되었으나,

남명혁(南明赫) 박희순(朴喜順) 등 9명은 끝내 불복, 사형당했다.

 

5월 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렸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니 이것이 기해박해이다.

 

 

 

천주교 박해.jpg

 

 

한편 신유박해로 기반이 없어지고 곳곳으로 흩어졌던 천주교는

그 씨앗이 살아나 신자가 늘어났고, 1811년 새 지도자 권기인, 신태보 등이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여진(요한)이 밀사로 1811년과 1813년 두 차례 북경을 왕래했으며,

1816년 겨울에는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 22세의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이

이 일을 맡아 1837년까지 21년 동안 밀사로 활동했다.

 

노력의 결과 1831년 9월 9일 조선 포교지가 독립 교구로 설정되면서

샴(태국) 교구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듬해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그때 샴 교구의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도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교황청 포교성성(지금의 인류복음화성)에서는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본명 여항덕 -余恒德) 신부에게

먼저 조선에 들어가 주교를 맞도록 했다.

유방제 신부는 1833년 겨울(양력 1834년 1월) 유진길과 조신철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내몽고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에서 1년을 기다린 뒤

1835년 10월 7일 조선으로 떠났으나, 11월 21일 서부 달단 요녕성의 '마가자' (馬架子, 일명 펠리구) 교우촌에서

과로로 선종했다.

 

이때 서만자에 있던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주교의 사망 소식에

즉시 마가자로 달려가 주교를 교우들 묘역에 안장했다.

모방 신부는 본래 중국의 사천(四川) 선교사로 임명 받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조선 선교를 희망하여 허락을 받았었다.

그는 주교의 장례를 마치자 곧바로 마가자를 떠나 책문으로 가서

정하상, 조신철 등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836년 1월 13일(음력 1835년 11월 25일) 밤

의주 성벽의 수문을 통과해 조선에 입국했다.

 

샤스탕 신부는 1837년 1월 1일(음력 1836년 11월 25일) 조선에 입국했다.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1837년 12월 18일(음력 11월 21일)

조선에 입국하여, 1838년 정하상 등 4명을 신학생으로 선발,

자신의 거처에서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다.

 

 

기해년 천주교 박해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정하상(丁夏祥)· 유진길· 조신철(趙信喆) 등

중요인물이 붙잡혔으며, 앵베르 주교는 교인이 고초 받는 것을 막기 위해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게 자현(自現)을 권고한 쪽지를 보내고 본인도 자현, 체포되었다.

 

조정에서는 6월에 이광열(李光烈) 이하 8명을, 8월에는 앵베르, 모방, 샤스탕을 군문효수(軍門梟首)하고,

정하상과 유진길도 참형에 처했다.

피해를 입은 교도수는 ‘헌종실록’에 따르면, 배교로 석방된 자가 48명, 옥사 1명, 사형 118명이었다.

 

그러나 현석문(玄錫文)이 쓴 ‘기해일기’에는, 참수된 자가 54명, 교수형, 장하(杖下)에 죽은 자,

병사한 자가 60여 명이었다고 기록돼있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앵베르 주교는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이 곧 체포될 것에 대비하여 정하상과 현석문에게 순교자의 사적을 면밀히 기록하도록 했다.

정하상은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현석문은 숨어 다니며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를 정리하여 ‘기해일기’란 책을 완성하였다.

 

‘기해일기’는 한동안 실전되었다가, 1904년경 당시 제8대 조선 교구장 뮤텔(Mutel)주교에 의해 발견돼

1905년 출판되었다.

이 ‘기해일기’에 의하면 당시 순교자가 모두 114명이 넘었다고 했으나,

78명의 순교사기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사료적 정확성이 입증되어, 기록된 78명 가운데 69명이

1925년 7월 5일에 복자위에 올랐다가,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기해박해는 그 어느 박해보다도 전국적인 것이었다.

교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추적되었고, 체포를 모면한 사람들은 가산을 버리고 피신해야만 했다.

박해는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지에 골고루 미쳤으나,

가장 박해가 심하였던 곳은 경기도와 서울지역이었다.

 

 

1839년 3월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시작되어 10월까지 계속된 기해박해를 계기로

정권을 잡고 있던 안동 김씨가 몰락하고 풍양 조씨가 이를 대신하여,

1849년 헌종이 죽고 철종이 들어설 때까지 세도정치를 계속하였다.

 

<馬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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