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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82 최초로 입국한 신부 주문모(周文謨)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외국의 선교사에 의해 입교되지 않고,

자생적으로 발아한, 이례(異例)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경로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을 통해 기독교를 알게 되고,

그 교리에 공감한 최초의 신자들인 이 벽 권일신 이승훈 등은

그들이 이해한대로 천주교를 믿고, 그들이 상상한대로 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역할을 나누어 신부를 지명하고, 신부역을 맡은 이가 미사를 집전하고,

책에 써 있는 고해성사를 집행한 것이다.

그러나 교리 공부를 계속하면서 자신들의 행위가 과연 천주교 제도에 합치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윤유일(尹有一 1760~1795)을 청나라에 몰래 보내

북경에 있는 주교를 만나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Gouvea, Alexander de. 1571~1808. 수학박사, 북경교구장, 주교.

중국명 탕사선 - 湯士選)는 스스로가 신부가 되는 등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크게 놀랐고, 교회법을 어긴 데 대해 책망하면서도,

그들의 열정적인 신앙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조선에 신부의 주재가 절실함을 느낀 구베아 주교는

1793년 청나라 사람 오요한 신부를 조선에 파견했다.

당시 북경에는 유럽인 선교사가 5명 있었지만, 조선에서 천주교를 탄압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어, 서양인이 잠입해 활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으므로

조선인들과 용모가 비슷한 중국인 신부를 선발한 것이다.

 

그러나 오 신부는 국경에서 조선 신자들과 접촉하는 데 실패하고 얼마 뒤 병사했다.

구베아 주교는 다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년~1801년)를

조선 주재 신부로 임명했다.

 

 

주문모 신부-02.jpg

 

 

주문모는 1752년 청나라 수저우(蘇州) 쿤산현(崑山縣)에서 태어났다.

장쑤성(江蘇省) 쿤산현(崑山縣) 출생 설도 있다. <위키 백과>

7세에 어머니를, 8세에 아버지를 잃어, 고모 슬하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지만 계속 낙방했다.

20살에 결혼했으나 3년 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30대의 늦은 나이에 북경교구 신학교에 들어가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1791~1794년 초 사이에 사제 서품을 받고, 1794년 2월 북경을 떠나

3월에 변문에 도착, 마중나간 조선인들을 만났으나,

압록강물이 풀려 도강이 힘든데다가 수비가 삼엄해 잠입이 어려웠다.

그래서 10개월 동안 만주교회를 순회하면서 겨울이 되기를 기다린 끝에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 지 황(池 璜) 윤유일(尹有一) 등에게 인도되어

의주를 통해 입국할 수 있었다.

 

주문모는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열이틀을 걸어 한양에 도착,

계동에 있는 역관(譯官) 최인길(마티아) 집에 여장을 풀었다.

주 신부는 조선말을 배우며 선교활동에 착수했다.

부활대축일 직전 성목요일에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필담(筆談)을 통해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그의 입국 사실은 북경교구는 물론 조선교회에서도 몇몇 사람만 알고 있었으나

어떻게 소식을 접했는지 많은 신자들이 그를 만나러 찾아왔다.

 

 

1795년 6월 27일(음력 5월 11일) 배교자 한  영익(韓永益) 진사의 밀고로

주문모에게 체포령이 내려졌으며(을묘박해), 그의 얼굴을 그린 벽보가 나붙기도 했다.

그는 여신도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며, 검거된 역관 최인길과 지 황,

윤유일은 순교했다.

최인길 마티아 30세, 지 황 시바 28세, 윤유일 바오로 35세였다.

 

이후 주문모는 강완숙의 집을 사목 활동의 중심지로 삼고 비밀리에 성무를 집행했다.

강완숙을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여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였다.

강완숙은 자신을 모시는 여종을 비롯한 수많은 여인들을 천주교로 인도했으며,

양반신분을 활용하여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가 세례 받도록 했다.

 

서울에서의 전교로 목회에 자신이 생긴 주문모 신부는 지방에서도 전도했는데,

충청도 공주, 온양, 내포, 전라도 전주에서 전교하여 5년 만에 신자 수가

4천여 명에서 1만 명으로 증가했다.

교리 연구회인 명도회(明道會)를 만들어 정약종을 회장에 임명하고,

황사영을 비롯한 홍필주, 현계흠, 홍익만 등을 명도회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의 책임자로

임명, 교리 연구와 전도에 힘쓰게 했다.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라는 고해성사 지침서 등을 저술했는데,

그의 문서선교는 천주교회의 세력 확장에 큰 역할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주 신부는 자신이 조선을 떠나면 박해가 중지될 것이고,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생각으로 중국을 향해 떠났다.

황해도 해주에 이르렀을 때 "나의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고,

모든 박해를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신자들의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음력 3월 12일 한양으로 돌아와 자수했다.

 

주문모 신부에게는 군문효수형이 선고되었다.

'새남터'에서 형리들은 그의 양쪽 귀에 화살을 꽂고 참수했다.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 50세였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