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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83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조선에 사제를 보내달라고 정하상이 1825년에 보낸 대교황청원문(對敎皇請願文)은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다.

전교담당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편지를 읽고 깊이 감동했다.

보고를 받은 레오 12세 교황 또한 조선인들의 자생적 신앙을 높이 평가하며,

추기경에게 항구적인 대책을 빨리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가장 큰 문제는 파견할 사제의 선발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국력이 떨어져서 외국에 선교사를 보낼 형편이 못 되었고,

대혁명 동안 많은 사제들이 죽은 프랑스는 신부 수가 부족했는데,

터키, 태국, 필리핀 등 에서는 신부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카펠라리 추기경은 조선에 독립된 포교지를 설치하여 교황청에 직속시키고

포교사업은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조선에 가겠다는 신부가 없었다.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거기로 갈 뱃삯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추기경은 조선의 평신도들이 쓴 편지를 불어로 번역해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포교지의 주교가 있는 곳에 다 보냈다.

 

 

브뤼기에르 주교-01.jpg

 

 

이때 샴(태국의 옛 이름) 교구에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신부가

보좌주교로 있었는데, 그는 이 편지를 읽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미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조선에 사제를 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던

브뤼기에르 신부는 교황께 파리외방전교회의 주장을 반박하는 편지를 썼다.

 

첫째, 돈이 없어서 못 간다.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돈이 필요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을 것이다. 그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도 복음을 전했는데

그를 본받아 복음을 전한다는 이들이 어떻게 돈이 없어서 무엇을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진짜 없는 것이 무엇인가? 돈인가, 아니면 신앙인가?”

 

둘째, 보낼 신부가 없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할 때 제자는 열두 명이었다.

지금의 사제 수가 몇 명이냐, 열두 명은 더 되지 않느냐?"

 

셋째, 조선이라는 데가 어디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 모른다.

"그들은 사제도 없는 곳에서 이미 순교를 하며 목자가 있는 곳을 찾아

그 어두운 곳에서 편지까지 보냈는데, 목자라는 사람들은 양떼의 편지를 받고도

그게 어딘지 몰라 갈 수 없다니 말이 되느냐?"

 

넷째, 조선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신부를 보내 봐야 붙잡혀 죽을 것이다.

"사제가 양떼를 만나면 사목을 해서 좋고, 가서 죽는다면 순교자가 되는 영광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도 갈 사람이 없다면 나라도 가겠다." 고 덧붙였다.

 

 

편지가 교황청에 가는데 1년이 걸렸다.

이미 레오 12세 교황은 돌아가시고 그레고리오 16세가 새로운 교황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에서 온 편지를 받고 가장 감동했던

바로 그 카펠라리 추기경이었던 것이다.

 

 

교황은 1831년 9월 9일 두개의 교서를 발표했다.

"조선 교구를 독립된 교구로 설정한다."는 것과,

"조선교구 초대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브뤼기에르주교 문장.jpg 

 

<브뤼기에르 주교 문장>

 

 

교서는 보통 '시스티나 성당'에서 발표되는데 이 교서는 '마리아 성당'에서 발표되었다.

이는 한국교회의 주보가 마리아가 되는 원인이 되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근 1년 뒤인 1832년 7월 25일, 발령을 받고 3일 만에 즉각 출발한다.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말레시아 페낭의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왕요셉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홍콩행 배표를 사려고하자 돈이 모자라 거절당하고,

대신 필리핀 마닐라행 배를 타게 되었다.

필리핀에 있던 세 명의 주교가 여비를 주어 브뤼기에르는 중국을 향해 떠났으나

상해 도착 전에 해적에게 잡히고 말았다.

많은 돈을 빼앗은 해적들은 주교를 인질로 더 많은 돈을 털 수 있을 것 같아

꽁꽁 묶어 배 밑에 처넣었다.

 

온갖 고생 끝에 중국 땅에 풀려난 주교는 조선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다.

천문, 지리, 풍토, 통과하는 지역의 민속, 그리고 식물들도 채집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가야 한다. 내 양떼가 기다리는 곳으로.

내가 가야 할 곳이 얼마나 멀고 얼마나 험난한지 모른다.

내가 아는 오직 하나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내게 맡기신 당신의 양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가야한다는 것뿐이다."

 

 

1년이 지난 뒤 그의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가지고 왔던 마지막 차도 다 마셨다. 먹을 것은 하나도 없다.

몸무게는 샴을 출발하던 때의 절반으로 줄었다."

 

2년이 지난 어느 날의 일기는 이렇다.

"몸무게가 출발할 때의 3분의 1이다. 몸에 털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다 빠졌다.

온갖 짐승과 곤충들과 기후 변화로 피부가 성한 곳이 없다. 내가 갈 수 있을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나는 다만 양떼가 기다리는 곳을 향하여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가고 있다."

 

 

샴을 떠난 지 2년 2개월 17일 만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만주의 펠리구(Pie-li-keou)라는 교우촌에 도착했다.

내몽고의 마가자(馬架子, 지금의 적봉시 송산구 ‘동산’) 였다.

 

교우들이 먹을 것을 주는데 먹지를 못했다.

"호박 삶은 물을 두 모금 마셨다.

지금 나무 밑에서 자둬야 오늘 밤에 또 출발할 수 있다."

그의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다.

 

잠든 그는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도착한 다음날, 1835년 10월 20일이었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