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84 유방제 신부의 입국과 추방

 

1831년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은 브뤼기에르(Burguiere, 蘇) 주교를

조선교구장으로 임명, 조선에 파견한다.

 

이때 이탈리아 나폴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신학교’에서 7년간 수업하여

사제 서품을 받은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도 조선에 가기를 지원했다.

포교성성은 이를 수락하고 유 신부가 먼저 조선에 들어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유방제 신부는 1833년 겨울(양력 1834년 1월 3일), 유진길과 조신철을

봉황성 책문(柵門, 중국측 변문)에서 만나 조선에 입국,

16일에 서울 정하상의 집에 도착했다.

1801년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지 33년 만에 신부가 다시 들어온 것이다.

 

 

유신부는 1836년 12월 2일 모방 신부에 의해 추방되어 서울을 떠날 때까지

3년간 활약했다.

성 베드로 이호영,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 김테레사, 남경문,

동정 순교자 김효임과 김효주 자매, 남명혁, 남이관 등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신도회장을 삼아 함께 일했다.

1836년에는 죽음을 맞는 정약용에게 병자성사를 주기도 했다.

홀로 신부로서 3년간을 사목했으나 그의 업적은 별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나쁜 기록만 퍼져있다.

 

 

한국교회사의 대가 최승룡 신부는 주문모 신부에 관해 연구하던 중

처음 들어보는 어느 중국 신부의 서한에 조선에 관한 기사가 자주 나오는 것을 이상히 여겨

살펴보다가 그것이 유방제 신부로 알려진 선교사의 서한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중국인 신부들을 양성하던 나폴리 성가정 신학교의 자료를 검토하여

그 학교 출신 중국인 신부들의 중국 이름과 세례명, 출신, 출생 및

서품 연도가 기록된 자료를 찾았다.

 

자료에는 유방제라는 이름이 없고 여항덕 신부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Pactificus Ju(Yu), 余恒德, 陝西城固(섬서 성고) 출신, 1795년 출생,

1821년 9월 1일 입학, 1821년 9월 16일 착복, 1830년 12월 5일 사제 서품,

1831년 1월 27일 섬서 고려(陝西固麗:조선)로 파견, 1854년 사망.

 

 

‘유방제’는 여항덕 신부가 조선에서 쓰던 별명임이 확인된 것이다.

‘여’와 발음이 같은 ‘유’를 성으로 하고, 이름은 ‘방제’ (방지거 - 프란치스코의 한국식 발음)로

지은 것이다.

 

 

여 신부는 24세 때 나폴리로 유학을 떠날 당시

교황청에 보내는 조선교회 밀사의 편지를 갖고 갔다.

이 편지는 조선에 사제를 파견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여 신부 자신도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을 지켜나가는 조선 신자들에게 감동해

신학생 시절부터 조선 선교의 꿈을 키웠다.

그는 신학교 학장 갈라톨라 신부에게 "포교성성 추기경에게 얘기해

조선 선교사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청원했다.

 

 

그는 조선 선교의 소망을 이루었으나 1835년말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가

도착하면서 바로 추방이라는 오욕의 길로 들어섰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방해한 사실과, 선교에 뜻을 두지 않고 사리사욕만을 추구했다는

죄목으로 1836년 12월 2일 조선교구장 직무대행 모방 부주교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

 

프랑스인 샤를르 달레(pere 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 신부는

1874년 발간한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여 신부가 ‘조선말을 배우려 하지 않고’

‘지방 교우촌을 돌보지 않고 서울에만 안주하며’ ‘성직을 남용해 돈을 모으고’

‘권진이 아가타와 친밀한 관계로 사제직을 훼손했다’고 폄하했다.

 

 

 

역사는 어차피 ‘승자의 기록’일 수밖에 없는가.

패자에게는 ‘변명의 장’도 주어지지 않는가.

 

쓸쓸히 떠난 유방제 신부의 해명은 학자들의 연구로 조만간 전해질 것이나,

여기서는 그가 왜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방해죄를 썼는지 그 배경을 살피기만 한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이르는 때를 ‘대항해 시대’ 또는 ‘지리적 발견 시대’라고 한다.

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주도와 경쟁으로 전개되었다.

교황청에서는 새로 발견된 지역에서 예상되는 두 나라의 분쟁을 예방하고,

원주민 선교를 추진하기 위해 두 나라에 일정한 경계를 정해주어서,

두 나라가 관할 구역 내에 교구를 설립하여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를 ‘선교 보호권’이라 한다.

 

얼마 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식민지 경쟁 대열에서 탈락하고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새로운 나라가 해양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선교를 추진할 힘이 없는데도 선교 보호권을 앞세워

자신들 지역에 대한 다른 나라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금지시켰다.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재위 1621-1623년)는 포교성(현재의 인류복음화성)을 설립,

‘교황 파견 선교사’를 새로운 전교지역에 파견하고, 그들이 교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대목구(代牧區) 제도를 시행했다.

이는 종전의 주교나 교구에 대칭되는 제도이므로 두 나라는 이에 맞섰다.

 

 

이러한 세계 교회사의 흐름은 동아시아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포르투갈은 1558년 고아에 대교구를 설정하여 인도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1566년 중국 마카오에 전진기지를 마련했으며,

교황청은 1576년 마카오 교구에 내린 대칙서에서

그 관할구역을 ‘중국 일본과 인접지역’으로 규정했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1679년 중국에 난징(南京) 대목구를 설치,

그 관할구역을 ‘난징과 조선 및 인근 성’으로 설정했다.

또 1690년 난징 대목구에서 베이징(北京) 대목구를 독립시키면서

조선 선교의 책임은 막연하게나마 베이징 대목구 관할로 넘어갔다.

베이징의 감목 대리 구베아(Gouvea)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했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대목구를 독립시켰고,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부탁했다.

포르투갈의 관할 아래 있던 마카오 교구에서는 선교 보호권에 의거해

조선은 자신의 관할구역에 속한다고 판단하여 조선대목구 설치에 반대했다.

 

 

유방제 신부는 베이징 대목구에서 파견한 선교사였다.

당연히 베이징 주교의 지휘를 받았을 것이며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견한 사제들과는

반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방 신부 또한 조선대목구의 독립을 위해 유 신부를 쫓아내는 강수를 두었으리라.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