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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85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3년 마카오에서 복건성(福建省)으로 향하는 배에서

모방 신부를 만났다.

주교는 조선 선교에 동참시켜달라는 모방의 청원을 받아들이고 먼저 떠나며,

몽고 서만자(西湾子)나 조선 국경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모방 신부-01.jpg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모방(Maubant, Pierre Philibert 1803-1839 한국명 나백다록 -羅伯多祿 = 베드로)은

어릴 때부터 “세계의 끝까지 가서 포교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29년 5월 13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1831년 11월 18일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연수를 받은 뒤 중국 사천(四川) 교구로 발령 받아 1832년 3월 르 아브르 항구를 떠나

마닐라를 거쳐 9월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리고 배 안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그의 운명은 조선 행으로 바뀌었다.

 

 

사천교구장 폰타나 주교로부터 선교지 변경을 허락받고는 1833년 12월 복건성을 출발,

통행증도 안내자도 없이 파선을 당하면서 1834년 4월 1일 북경에 입성했다.

 

1834년 6월 8일 서만자로 떠나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함께 1년을 지내며 중국어를 배웠다.

1835년 10월 17일 조선으로 먼저 떠난 브 주교는 1835년 10월 20일 병사하기 전에

모방을 부주교로 임명했다.

 

마가자에서 브 주교의 장례식을 치른 모방은 1836년 1월 12일 조선 교우들의 안내를 받아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 담 밑의 수문을 통해 조선 잠입에 성공했다.

 

 

모방 신부는 우선 조선말을 배우는 데 전력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교우들이 교리를 배우고 고해성사 받기를 원하자, 지은 죄를 한문으로 쓰게 하여 성사를 베풀었다.

그는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성사를 집전했고, 부활절을 지낸 뒤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을 방문하여 2백여 명에게 영세를 주었다.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서둘러 이 해에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 신학교로 보냈다.

 

 

1837년 1 월 15일 샤스탕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자 두 신부는 힘을 합해서

그 해에만 1,237명에게 세례성사, 2,078명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

 

 

 

샤스탕 신부-01.jpg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 鄭牙各伯=야고보 또는 사사당 - 沙斯當 1803-1839) 신부는

1803년(1804년 설도 있음) 10월 7일 프랑스의 조그만 마을 마르쿠(Marcoux)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826년 디뉴(Digne)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월 신부가 되었으며

다음해 1월 13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4월 22일 마카오로 파견되었고,

이어 페낭(Penang)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거기서 교직생활을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구장으로 떠나게 되자 샤스탕 신부도 함께 가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고, 1833년 5월 조선을 향해 길을 떠나 중국대륙과 몽고 만주를 거쳐

조선 국경에 다다랐으나 인도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북경으로 돌아왔다.

 

산동(山東)에서 2년간 복무하던 중 마침내 1836년 12월 28일 모방 신부의 기별을 받고

변문으로 간 샤스탕 신부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마카오로 유학 가는 김대건(金大建) 등

세 소년 신학생을 전송하던 조선 교우들을 만나, 국경을 넘어 1837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했다.

 

 

1837년 말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자, 모방과 샤스탕 두 신부의 활동은 더욱 큰 효과를

거두어 모방 입국 때 4천 명이던 신자가 1837년 말에는 8천 명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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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4월 15일 프랑스 까브리에(Cabries) 지방의 조그마한 촌락에서 태어난

로랑 마리 조제프 앵베르 (Laurent-Marie-Joseph Imbert 1796 - 1839 한국이름 범세형 - 范世亨)는 1818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19년 12월 18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20년 중국에 발령되어 부임 중 영국령 말레이시아 페낭의 칼리지 제너럴(College General)에서 1822년 1월까지 강의했고, 싱가폴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통킹에서 2년간 머문 뒤 쓰촨성(四川省)에 도착해 12년간 복무했다.

 

 

조선 교회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갑자기 선종하자,

로마 교황청은 1836년 4월 26일 앵베르 신부를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1837년 5월 14일 조선교구장 주교로 서품되는 성성식을 가진 다음 바로 조선으로 떠났다.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1837년 12월 17일 봉황성 변문에 다다라 이튿날 조선에 입국,

13일 후에는 서울에 도착함으로서, 조선교구는 교구 설정 6년 만에,

그리고 교회 창설 53년 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모방, 샤스탕 신부와 힘을 합쳐 전교에 힘쓴 결과 1839년 초에는

신자수가 9,000명을 넘게 되었다.

 

 

 

1839년의 기해(己亥)박해가 시작되자 앵 주교는 수원 부근 바닷가 교우 집에 몸을 숨겼다.

그는 모방과 샤스탕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몸을 피하라고 지시했으나,

그들은 함께 남기를 원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맡은 지방으로 되돌려 보냈다.

김여상 등의 배교로 체포가 임박하자 앵 주교는 자수하여 입감되었고,

두 신부도 자수토록 하여 세 선교사는 옥중 고초를 함께 겪었다.

 

 

마침내 대역 죄인으로 군문효수 판결을 받고,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한강변 새남터로 끌려갔다. 형리들은 그들의 옷을 벗기고, 손을 앞가슴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했다.

한 군사가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또 다른 군사는 사형 선고문을 읽고 나서

무릎 꿇린 다음 열 명 가량의 병정이 달려들어 칼질을 했다.

 

 

그들은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