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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55 예수의 양부(養父) 성 요셉

띨띨한 사내는 늘 그의 남녀 동생들이 그와 달리 똑똑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마침내 나이 50에 그는 용기를 내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혹시 제가 입양되지는 않았나요?’
모친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사내가 ‘아, 역시 나는 양자였구나’ 생각했다.
그러자 모친이 눈물을 흘리며 사실을 밝혀줬다.
“그래, 너를 입양했던 집에서 그만 너를 되돌려 보냈지 뭐냐!
우리의 평생 고생이 시작된 거지.”


‘넘버 3’
영화제목이 아니라, 보통 가정에서 어머니가 정하는 아버지의 랭킹이다.
넘버 1은 아들, 넘버 2가 딸, 그리고 최하위인 넘버 3가 아버지라는,
아버지들의 자조적인 표현이다.
심지어 자기는 넘버 4라는 사람도 있다.
넘버3가 애완견이고, 자기는 ‘개만도 못하다’고 울분을 토한다.

‘성가정’ 이라고 불리는 예수의 가정에서도 가장인 요셉은 넘버 3 취급을 받는다.
신자들도 예수와 마리아의 얼굴은 알아도(물론 실제와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요셉의 얼굴은 모른다.
성당에는 예수와 마리아 상이 곳곳에 있으나 요셉의 상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한 가정의 가장을 이렇게 홀대할 수가 있는가?
실제로 요셉은 교회에서 어느 정도로 대접받고 있는지 알아보자.

예수의 가계가 나오는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은 그 족보의 내용이 상충된다.
요셉의 아버지도 마태오에는 야곱으로, 루카에는 엘리로 돼 있다.
그러나 두 족보에 다 그들이 골리앗을 한방에 보낸 다윗의 자손이라고 기록했다.

예수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데,
이는 요셉이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정리하러
본향인 베들레헴으로 갔기 때문이므로, 요셉의 본적지가 베들레헴이고,
갈릴레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셉은 신앙심이 깊은 집안의 처녀 마리아와 약혼했다.
6개월쯤 뒤에 요셉은 약혼자가 임신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유다인의 관습에 따르면 약혼은 결혼과 동등한 법적 효력이 있었고,
율법은 약혼기간에 부정이 드러나면 간음으로 취급하여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다.
요셉은 마리아가 처벌받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조용히 파혼하기로 결심한다.

그 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는 하느님의 성령으로 잉태했고,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고 계시한다.
의로운 사람 요셉은 순명하여 마리아와 결혼하고, 예수를 낳아 자식으로 기른다.

요셉이 몇 살에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예수의 공생활 이전에 세상을 떠났으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800년대 초 라이케누(Reichenau, 남부 독일 콘스탄스 호수에 있는 섬)의
베네딕토 대수도원 순교록에는 3월 19일이 요셉의 사망일로 돼 있다.
그 뒤 서방에서는 ‘마리아의 종 수도회’가 1324년 처음으로
3월 19일을 요셉 축일로 지내기 시작했다.
그 후 1479년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이 축일이 로마에 받아들여지면서 널리 확산되었다.

요셉에 대한 특별한 신심은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크게 성행했다.
1870년 교황 비오 9세가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레오 13세 교황도 요셉을 가장의 본보기로 선포하면서,
성인들 가운데 성모 마리아의 다음 가는 자리로 그를 높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요셉 성인을 ‘노동자의 수호자’로 선언했고,
비오 11세는 ‘사회 정의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2세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축하하는 공산주의에 대응해서,
이날을 ‘성 요셉 노동자의 대주보(主保)’ 축일로 선포했다.

19세기 후반기 교회에서는 성 요셉 대축일이 들어 있는 3월을
‘성 요셉 성월’로 지정하여, 의인이며 신앙인의 모범인 요셉 성인의 덕을
기리고 본받게 하였다

가부장제의 전통이 강했던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일찍부터,
성가정의 가장인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을 깊이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북경 교구에서는 요셉 성인을 중국의 보호자인 주보성인(主保聖人)으로 모셨다.

1831년 조선교구가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되자, 1838년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지금까지 조선이 북경 교구에 예속되어 있던 관계로,
북경 교구의 주보인 성 요셉을 주보로 모셔왔으나,
이제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를 새 주보로 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41년, 성 요셉을 함께 주보로 모실 것을 조건으로
이를 허락했다.

그 이래로 하느님께 순명한 깊은 신앙인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우리나라 교회를 보호하고 있다.
성 요셉은 교회 전체의 주보일 뿐만 아니라 지도자들, 아버지들, 성직자와 수도자,
여행하는 사람들, 노동자, 가정, 환자, 임종하는 자, 가난한 자들의 주보이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