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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57 다산초당(茶山草堂)과 정약용(丁若鏞)


봄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봄 향기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산수유나 매화를 보러 남행을 한다면,

가는 길에 다산초당(茶山草堂) 들리기를 권한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으로

강진(康津)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는데,

그중 1808년부터 1818년까지 약 10년간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다산초당은 본래 윤 단이라는 사람이 건립하여 서당으로 쓰던 초가집이었다.

1936년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58년 정약용의 외가인 해남 윤씨의 도움으로

기와집으로 다시 복원했다.

현판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글씨는 집자(集字)한 것이라 한다.


다산초당-02.JPG  

 

 

정약용은 어떻게 하여 광범위한 분야에서 그 많은 책을 저술할 수 있었는지

불가해한 인물이다.

도서관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곳에서 쓴 그 글들이 과연 어느 정도의 깊이와

학문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또한 그가 천주교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그가 천주교도였다고 치부하고,

일부 학자들은 그가 가톨릭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사실여부는 각자가 판단할 것이고, 여기서는 천주교와 정약용의 관계를 대략 살펴본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등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實學)에 전념하던 정약용은,

맏형 약현(丁若鉉)의 처남 이 벽(李檗)에게서 천주교를 배우고,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 벽의 집에서 그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천주교에 반대하는 척사(斥邪)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이며 정약용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이

천주교를 믿음으로서 평창 이씨 문중에 큰 문제가 된 정미반회사(丁未伴會事)에서,

정약용이 함께 서학서(西學書)를 읽었음이 밝혀져

천주교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91년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해박해(辛亥迫害 또는 진산사건 -珍山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분명히 배교하는 자세를 밝힌다.


1797년 그가 다시 서학도(西學徒)로 지목 받자, 그는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천주교도가 아니라고 호소했다.

1799년에는 천주교를 뿌리 뽑는 방법을 쓴 척사방략(斥邪方略)을 발표했다.


1801년에 이르러 신유박해(辛酉)가 발생하자 그는 체포되었는데,

그는 천주교를 철저히 부인하고, 천주교 지도자인 권철신(權哲身), 조동섬(趙東暹),

황사영 등을 고발하였고, 천주교도를 색출하려면, 믿음이 약한 노비(奴婢)나

학동(學童)을 신문하여 정보를 밝히도록 제안해서 이것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는 1801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신문을 받았고, 그 후 강진으로 유배되어 1818년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말년에 다산은 조선 복음 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유고(蔓川遺稿)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만천은 이승훈의 호이다.

만천유고에는 이 벽의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와 “성교요지”(聖敎要旨) 같은 글들이

담겨 있다.

정약용은 중국인 파치피코 유방제(劉方濟)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숨을 거두었다.

 

정약용-01.JPG


자(字)는 미용(美庸), 호(號)는 사암(俟菴) 탁옹(籜翁) 태수(苔叟)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다산(茶山),  시호(諡號) 는 문도(文度), 당호(堂號)는 여유(與猶)이다.


다산은 자신이 살던 집을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이름 지었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15장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에서

여유(與猶) 두 글자를 따 온 것이다.

여(與=豫)는 코끼리, 유(猶)는 원숭이를 뜻한다고 한다.

‘망설이기를(與兮) 겨울에 살얼음판 건너듯 하고,

 겁내기를(猶兮)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하라‘ 는 뜻이다.


관료로서의 세속적 출세와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는 엘리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당호이다.

한편, 중국 글에서 퍼 오지 않고는 이름조차 창작하기 어려웠던

선배들의 한계가 몹시 못마땅하지만,

(추사-秋史 또한 중국사람 호의 직접 copy 이다.)

오늘날의 잣대로 옛 사람들을 재는 것 또한

그리 너그럽지 않은 듯한 생각도 없지 않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