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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62

한국 최초의 --- 명동성당


‘땅’에도 ‘격(格)’이 있고(地格), 운명이 있는가.

땅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각각 그 쓰임새가 특징지어 있고,

그 쓰임의 흐름이 무언가를 좇아 그렇게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땅에 따라 그러한 느낌의 강도가 차이가 나겠으나,

‘명동(明洞)’은 우리나라 땅 중에서 뚜렷한 개성을 가진 땅들의 대표중 하나일 것이다.


수많은 상징의 명동-.

가장 손쉽게 떠오르는 얼굴이 문화의 거리,

상업의 거리일 것이고, 보다 강렬한 느낌으로 ‘민주화의 보루’가 깔려있다.

민주, 자유는 명동 거리의 바닥을 이루는 기운이었으나,

이러한 기운이 행동으로 결집되는 데는 ‘명동성당’의 ‘힘’이 있다고 여겨진다.

 

 

 

 

명동성당-02.jpg

 

 


한국 가톨릭의 비조(鼻祖) 이벽(李蘗)은 1784년 수표교 자기 집에서

천주교를 포교, 강학하고 미사를 올렸다.

1년간 약 5백 명이 입교하니 집이 좁아졌고,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가

명례방(明禮坊) 집을 제공하여 기독교의 명동 시대가 시작되었다.


1785년 봄 수십 명의 신자들이 김범우의 집에 모여 있을 때

추조(秋曹=형조) 관리들이 몰려와 수색을 하고, 성물과 성서를 몰수해 가는 동시에,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박해인 ‘을사추조적발사건 (乙巳秋曹摘發事件)’이다.

양반들은 모두 훈계 방면됐으나, 중인인 김범우는 단양으로 귀양되어,

이듬해 고문후유증으로 병사, 한국 최초의 기독교 희생자가 되었다.


명례방 공동체의 역사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사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어느 기록에서도 명례방이란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천주교 박해가 비교적 누그러들자 조선교구 7대 교구장 블랑(Blanc, 백규삼) 주교가

전교회장이던 김 가밀로의 명의로 명동성당 일대의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고,

한 한옥에 종현학당(鐘峴學堂)을 설립, 신학생들을 모아 기초 학문을 가르쳤다.

1백여년 만에 천주교가 다시 명례방에 자리 잡는 신비가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598년) 때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진을 치고

남대문에 있는 종을 갖다 달았으므로 북달재 혹은 북고개,

한자명 종현(鐘峴)이 된 곳이다.


당시에는 판서(判書)를 지낸 윤정현(尹定鉉)의 저택이 있었는데

60여 칸이 되는 바깥채를 그대로 이용하다가,

1887년 5월 한불조약 이후 성당 건립계획이 추진되면서

집들을 헐고 언덕을 깎아 대지를 만들었다.

코스트 신부가(Eugene Coste, 高宣善) 설계하고 공사를 지휘하였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놀랄 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에서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블랑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고했다.


공사는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 8일에 가서야 기공식을 가졌다.

그 사이 블랑 주교는 1890년 선종하고,

두세신부(EugAne Camílle Doucet 정가미-丁加彌 1853.11.16~1917.4.19)가

제2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코스트 신부도 공사중인 1896년 선종하고,

뒤를 이은 프와넬 신부(Poisnel, 朴道行)가 건축을 마무리 지어

1898년 5월 29일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Mutel, 閔德孝)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착공 후 무려 12년 만에 40m가 넘는 종탑을 갖춘

길이 65m의 고딕식 건물이 그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건축 과정에서 많은 신자들이 무료로 노력 봉사를 하였고,

성당의 건축에 쓰인 벽돌은 청나라의 벽돌공을 데려다가 만들었다.


이후 종현성당은 명동성당(明洞聖堂)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의 명동은 조선 초 한성부의 행정구역 5부(部) 49방(坊)의 하나인

명례방(明禮坊)에서 명(明)자를 딴 것으로,

일제시대에는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리다가

광복 후인 1946년에 명동(明洞)으로 동명이 정해졌다.


신자들이 증가하자 공사 중이던 1892년 남대문 밖에

약현본당(藥峴 本堂  지금의 중림동성당)을 분리시켰다.

한 때 종현성당은 문안성당, 약현성당은 문밖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26년 10월 17일 백동본당(栢洞本堂, 현 혜화동 본당)을 분리시켰고,

1947년 6월 29일 세종로 본당, 1948년 12월 신당동 본당,

1949년 가회동 본당을 각각 분리시켰다.


2백여 년 전 ‘믿음’으로 희생된 사람의 집터가,

천주교회당의 모태가 되고,

가난한 이, 소외된 이, 고통 받는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된 것이다.


<馬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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