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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63 신유박해(辛酉迫害)


조선에 천주교가 시작되어 교세가 확장되자,

이를 사교(邪敎)로 치부해 금지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를 천주교 박해(迫害) 또는 사옥(邪獄)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 많은 교도들을 집단적으로 체포하여 죽이거나

귀양 보낸 네 번의 큰 박해가 있었으니,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년)

병오박해(丙午迫害 184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년)이다.


천주교회는 1785년의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등으로

희생자가 나오기도 했으나 1794년 말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년)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활동으로 1800년에는 교인이 1만 명에 이르렀다.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진보적 사상가들과,

부패하고 무기력한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이 그 중심이었다.


한편에서는 천주교를 성토하고 공격하는 상소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正祖 1752-1800년)는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며,

유학(儒學)이 진흥하면 사학을 막을 수 있다."고 적극적 박해를 회피하였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南人)과 노론 시파(老論 時派)도

천주교를 묵인하는 편이었다.


정조가 1800년 6월 28일 승하하고 세자로 막 책봉된 순조(純祖, 1790-1834년)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자, 누군가가 왕을 도와서 정사를 돌보아야 했는데

순조는 후실의 소생이므로, 할머니 정순대비(貞純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정순왕후(=정순대비) 김씨는 영조의 후비인데,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일당이므로,

당연히 남인, 노론 시파의 정적인 노론 벽파(僻派)가 정권을 잡게되었다.


남인과 시파에는 서학(西學)에 심취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벽파는 공격 대상을 천주교도로 잡아, 1800년 12월 중인(中人) 최필공과

그의 사촌 동생 필제(必梯)를 체포하였다.

1801년 정초에는 김여삼(金汝三)의 밀고로 서울의 회장 최창현(崔昌顯)등

수많은 교인들이 잡혔고, 정월 10일(음력)에는 공식 박해령을 내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을 빠짐없이 고발하게 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하는 호적 단위.

 다섯 집 중에 한 집이라도 천주교도가 있는데 고발을 안 하면 다섯 집을 다 처벌하였다.>

 

 

천주교도 고문.jpg

 


정약용의 셋째형으로 한국 최초의 조선천주교 회장(명도회장 明道會長)이었던

정약종(丁若鍾)은 박해를 피해 고향인 양근(楊根 지금의 남양주)에서 서울로 이사 왔는데,

신변이 위험해지자, 가지고 있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편지 등을 담은 책고리짝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다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2월 9일(음력)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

권철신(權哲身), 정약종(丁若鍾)  정약전(丁若銓) 도 잡혀 의금부에 갇히었다.

그들 중 정약종, 이승훈 등 6명은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배교한 정약용, 정약전 형제는 유배되었다.


박해는 지방으로 확대되어, 충청도 공주, 경기도 여주(驪州)와 양근,

등에서 수십명이 처형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이래, 최초의 여신도 회장 강완숙(姜完淑)의 서울 집에 거처하면서

전교에 힘써왔는데, 포졸들이 그의 거처를 탐지하고 덮쳤으나,

이를 알아차린 주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하여 체포를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도피로 집주인 강완숙 일가와 많은 교우들이 잡혀 들어가자,

주신부는 자수하고 만다.

주신부는 4월 19일(음력) 군문효수(軍門梟首)되고,

강완숙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체포된 자들은 대부분 자기 고향에서 처형되었다.

참수 장면을 전국에서 목격시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전주(全州)에서는 3월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유항검(柳恒儉),

유관검(柳觀儉) 형제를 비롯하여 일가족이 많이 체포되었다.

유관검이 고문에 못 이겨 많은 교우들의 이름을 대니,

불과 며칠 만에 2백여명이 옥에 갇히었는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이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양박청래'(洋舶請來) 계획이 탄로되어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양박청래'(洋舶請來)란 소위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에 담긴 구상으로,

서양 함선을 한국에 보내 신교의 자유를 얻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다.

`양박청래' 관련된 이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곧 사형을 언도 받아,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9월 17일 능지처참당하였다.

황사영도 9월 29일 충청도 제천(堤川) 배론에서 잡혀,

11월 5일 능지처참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연루자들도 참수 되었다.


사건이 일단락되자 조정에서는 12월 22일 토사교문(討邪敎文)

즉 척사윤음(斥邪倫音)을 반포하여 신유박해를 매듭지었다.

희생된 자들의 수는 처형된 자가 약 1백명, 

유배된 자가 약 4백명이었다.


신유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생명유지를 위해 산간벽지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어

교세는 거의 비산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馬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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