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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65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국사교과서에 황사영백서가 언급돼 있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 내용은 배운 것 같지 않고,

다만 ‘천주교에 대한 글’ 이라고만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가톨릭이 되고 나서도 황사영백서가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의 귀중한 자료’ 인가보다 하고 막연히 느꼈지,

그 내용을 읽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신유박해’가 황사영백서의 처분으로 일단락 맺음을 보면서,

백서의 내용을 대충 알게 되었고, 조선시대 선비들의 ‘국가관’,

조선시대 엘리트들의 ‘사고의 한계’를 다시 한 번 더듬어보게 되었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은 세조 때 공조판서를 지낸

장무공(莊武公) 형(衡)의 후손으로, 증조부 준(晙)도 공조판서를 지내는 등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창원 황씨 명문대가의 후예로

1775년 서울 서부 아현방(阿峴坊), 지금의 서대문구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기 4년 전 아버지 석범이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와 한림을 역임했으나 사영을 유복자(遺腹子)로 남기고 요절했다.

어머니 평창 이씨 윤혜(李允惠)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영세자

이승훈의 아저씨 이동운 진사의 딸이니 이승훈이 친척 오라버니이다.


열여섯 살 때인 정조 14년(1790) 9월 12일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급제하자

정조는 사영의 손목을 잡고 “스무 살이 되거든 과인을 만나러 오라” 고 했다.

사영은 임금에게 잡힌 손목을 평생토록 명주로 감싸고 다녔다고 한다.


이 해 사영은 정약용의 맏형 약현(丁若鉉)의 첫째 딸

명련(丁明連 마리아, ‘난주’라고도 불림)과 결혼했다.


약현의 첫 부인은 조선 교회 창설 주역 이벽의 누나였고,

정씨 형제들의 누이가 이승훈과 혼인했으므로,

사영은 자연스럽게 그들로부터 전해진 기독교 교리서를 읽고,

과거를 포기한 채 천주교에 깊숙이 빠져들었고, 그 해에 영세를 받았다.


신유박해가 시작된 2월 10일 정약용을 국문 공초하면서

황사영의 이름이 기록에 등장한다.

정약용의 집에서 압수한 서찰 중에서 황사영의 편지가 발견됐고,

정약용이 황사영의 신앙생활을 진술함으로써 의금부의 체포령이 내렸다.


황사영은 서울을 빠져나가 여주와 원주를 거쳐

제천 배론에 있는 김귀동의 집에 도착했다.

배론이란 이곳 골짜기가 뱃바닥 같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팔송정 도점촌(陶店村)이라고도 불리어, 옹기를 만든 부락이었음을 말해준다.

김귀동은 몇 달 전 이곳에 들어와 옹기를 구우며 지내고 있었는데,

토굴을 파 황사영을 숨기고 큰 옹기그릇으로 덮어놓았다.


신유년 9월 29일 황사영은 체포돼 의금부로 압송했다.

“포졸들이 배론으로 급히 달려왔으나 그들이 찾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다가,

 지하실 위를 걸어 다닐 때 커다란 옹기그릇들이 내는 둔탁한 소리가

 그들의 의심을 일으켜 황사영은 발각됐다.

 그는 임금의 은총의 표로 비단이 감긴 손목을 만지지 말라고 명령함으로서

 황사영임이 증명되었다. 

 포졸들은 그를 쇠사슬로 결박해 서울로 데려갔는데,

 그의 몸에서 옷 속에 둘둘 말아 지녔던 그 유명한 편지가 나왔다.”

 <달레 신부의 기록>


 

황사영백서-03.jpg

 

 

가로 62㎝, 세로 39㎝ 의 흰 세명주(細明紬)에

가는 붓으로 122줄, 13,384 글자를 한문으로 쓴 편지로서

‘백서(帛書)’로 불리게 된 이 글은

중국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신유박해 진행 과정과 순교자 열전,

교회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위한 5가지 방안 등인데,

그 중 조선감호책 (‘종주국’ 청황제가 조선을 보호 감독하기위해

조선 왕을 부마로 삼을 것)과 대박청래책

(大舶請來策 - 선박과 군사를 조선에 보내 국왕을 협박하여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 문제 되었다.


결국 황사영은 ‘흉서에 말한 것은 글자마다 흉측하고 구절마다 역심(逆心)이어서

위를 범하는 기막힌 말뿐이었고, 나라를 원수로 삼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대역부도죄로 결안한다.” 는 선고를 받고 11월 5일 능지처참(陵遲處斬) 되었다.

조선 엘리트 선비의 좁은 안목을 드러낸 것이고,

한국 가톨릭에도 씻기 어려운 오명을 입힌 글이었다.


황사영은 “국가에 해를 끼침으로서 조선순교자 선정이 보류” 되었고

<다블뤼 주교 비망기 제4권>, 2백년이 지난 뒤 한국 주교회의가

‘하느님의 종’을 선정할 때도 ‘순교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국가에 해를 끼칠 행위를 했기 때문에’

제외됐다.


1894년 갑오경장이 단행되자 조정에서는 묵은 문서들을 파기했다. 

이 때 개화관료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이건영(요셉)이 백서를 입수하여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달했다.

1925년 조선 순교 복자 79명에 대한 시복식이 로마에서 열렸다.

행사에 참석한 뮈텔 주교는 이 백서를 로마 교황청에 접수시켰다.

그 뒤 이 백서의 존재는 잊혀졌다.


1970년대 중반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는 이 백서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의 문서고에 있음을 확인하고 한국교회에 알렸다.

2001년 신유박해 200주년을 기념해 백서는 한국으로 돌아와

합정동 절두산순교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馬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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