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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70 사도 바오로


가톨릭에서 하느님, 천사와 성인들, 거룩한 신비와 구세사적 사건들 등을

기념하거나 특별히 공경하도록 교회가 별도로 정한 날을 축일(feast)이라고 한다.

성인의 축일은 교황청에서 정한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지만, 대개 성인이 숨을 거둔 날이 그의 축일이다.


기독교 성립의 심장과 두뇌라고도 할 수 있는 두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대축일은 6월 29일이다.

두 사람이 같은 날 순교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렇게 정한 것이다.

기독교의 두 축인 두 사람의 축일이 같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바오로는 초기 기독교의 포교와 신학에 주춧돌을 놓은 사도이며,

첫 번째 신약성서인 테살로니카 전서(51년경 저술)를 비롯,

신약성서 27개의 문서 중 13편에 달하는 서신서를 쓴,

역사상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저술가이자 신학자이다.


그의 저술은 다음과 같다.

로마서(57-58년) 코린토 1서(54년) 코린토 2서(57년) 갈라티아서(54년) 콜로새서, 필리피서, 에페소서,

필레몬서(61-63년) 테살로니카1, 2서(51-52년), 티모테오서와 티토서.


바오로는 소아시아 키리키아 지방(길리기아, 터키)의 중심 도시 타르수스에서

섬유업을 하는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5-10년)

타르수스는 국제교류의 중심이며 두 개의 문화가 경계를 이루는 옛 도시로서,

서쪽의 그리스-로마 문화와 동쪽의 셈족과 바빌로니아 문화가 만나는 곳이다.

그리스식 교육을 받고 그리스 언어를 쓰고 그리스식 환경에서 살았으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히브리 이름은 사울(Saul), 그리스 이름은 바오로(Paul)였다.

그는 15살 때쯤 예루살렘으로 유학 가서 저명한 바리사이 학자 가말리엘로부터

교육받고 율법교사가 되었다.


그동안 예수가 나타났고, 처형당했으며, 예수 추종자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정통 바리사이인 바오로는 예루살렘의 예수 신도 축출에 앞장섰다.

동료들과 함께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사도 8,3)

그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만 아니라 다른 도시와 마을들,

나아가 시리아 다마스쿠스까지 박해의 발길을 뻗었다.

 

 

사울의 회심 - 미켈란젤로.jpg

 

<사울의 회심 - 미켈란젤로>

 


 

그는 무장한 무리를 이끌고 여드레를 여행해 한낮 태양 아래

다마스쿠스 평지의 오아시스로 다가갔다.

갑자기 하늘에서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번쩍 내려 쏘였다.

땅에 엎드린 바오로는 불타는 광채 속에서 슬픔에 찬,

아름답고 고요한 두 눈을 가진 "하늘에 속한 그분"(1코린 15,48)의 얼굴을 보았다.

히브리 방언이 그에게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26, 14)

바오로는 물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예수다. 네가 박해한 자다."

땅바닥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예수의 신실한 종이 돼 있었다.

예수가 지시했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사도 9,6).


사울은 감고 있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장님이 됐다.

동료들에 의해 성안에 들어간 사울은 식음을 전폐하고 사흘을 지냈다.

사흘 후 70사도중 하나인 하나니아스가 찾아와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사도 9,17).

하고 머리에 손을 얹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다시 빛을 보게 됐다.

 

그 무렵 흩어진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도해 유다인과 이방인의 교회를 창립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볼 책임자로 키프로스 섬 출신인

사제 바르나바를 파견했다.

바르나바는 회심한 바오로를 초빙해 만 1년(44~45년경)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봤다.


그 뒤 바오로는 세 차례에 (제1차 - 45~49년경 제2차 - 50~52년경 제3차 - 53~58년경) 걸쳐

아프리카를 제외한 로마제국의 주요도시들을 2만 킬로미터나 돌며 전교했고,

예루살렘 사도 회의 참석, 갈라티아, 그리스 등에 교회 설립, 서간문 집필 등의 업적을 남겼다.

탈 율법적인 신학을 가진 그의 선교활동은 유대교 소종파로 남아 있던 기독교를

세계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종교로 발전시켰다.


64년 네로 황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나서 여론이 좋지 않자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64~68년경) 동안 모진 박해를 했다.

이 때 바오로 사도가 순교했다. 그는 세례자 요한처럼 참수형을 당했다.


로마 남문 밖 교외에 위치한 「세 분수의 성당」(Chiesa di Tre Fontane)은

사도 바오로가 참수 당한 장소다.

바오로의 목을 올려놓고 칼로 쳤던 돌기둥이 보관돼 있고

사형 집행자가 목을 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을 볼 수 있다.

목을 벤 순간 그의 목이 세 번 튀었고 튀었던 자리마다 샘이 솟아나고 있다는 전설에서

세 분수, 즉 「뜨레 폰타네」라고 불린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