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3926 추천 수 0 댓글 0

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49 파리 외방 선교회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신부가 원주민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마음먹었다.
우선 추장을 데리고 숲을 거닐며 단어를 일러주었다.
나무를 가리키며 ‘나무’ 하자 추장이 ‘나무’하고 따라했다.
바위가 있는 곳에서 ‘바위’하자 추장은 또렷한 발음으로 ‘바위’해서 신부를 즐겁게 했다.
숲 속으로 좀 더 들어가는데 웬 남녀가 ‘그 짓’을 하고 있었다.
신부는 추장에게 ‘자전거 타기’ 하고 가르쳤다.

그동안 문화생활에 역점을 두고 원주민들을 가르쳤던 신부는
남들 보는데서 ‘그 짓’을 하는 년놈에게 화가 치밀어,
지팡이로 사내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놀란 남녀는 후닥닥 일어나 그대로 뺑소니를 쳤다.
그걸 본 추장이 소리 질렀다.
“어, 내 자전거!”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외국의 선교사가 와서 기독교를 가르치고 전파해서 시작된
대부분의 나라들과는 달리,  ‘천주교’라는 종교가 있음을 알게 된 지식층에서
독학으로 익히고, 중국에 가서 스스로 세례를 받았으며, 신부를 초청해서 퍼뜨린,
유례가 없는 과정으로 도입되었다.

1830년대에 이르러서는 파리외방선교회의 직접 선교를 통해
독자적인 교회 조직을 마련하고 선교를 강화해 간다.
‘외방(外邦)’이라는 어려운 한자를 왜 지금까지 쓰는지 모르나,
그 뜻은 파리에 있는 ‘해외’ 선교회이다.
왜 파리외방선교회였을까?
국교도 없는 프랑스의 선교사들이 왜 우리나라에 왔으며,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되었을까?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이르는 때를 ‘대항해 시대’
또는 ‘지리상의 발견 시대’라고 부른다.
이의 주연이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다.
교황청에서는 두 나라가 경쟁적으로 발견하는 새로운 지역에서의 효율적 선교를 위하여,
두 나라에 일정한 경계를 정해주며, 그 경계 안에서 두 나라가 각각 선교사와
교회를 보호하며, 성당을 건설하여 십일조를 걷을 수 있고, 교구를 설립하여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를 ‘선교 보호권’이라 한다.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식민지 경쟁의 대열에서 탈락하고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새로운 나라가 해양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선교 보호권을 앞세워 자신들 지역에 대한
다른 나라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금지하였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재위 1621-1623년)는 정치적 식민 선교를
순수한 교회 선교로 바꾸고자 포교성(현재의 인류복음화성)을 설립했다.
이로써 교황청에서는 ‘교황 파견 선교사’를 새로운 전교 지역에 파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고, 또한 교황을 대리한 선교사가 일정 지역에서
교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대목구(代牧區) 제도를 설치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선교 보호권’에 따라 교황 파견 선교사의 입국이나
대목구의 설정에 항의했다.
교황청에서는 ‘선교’는 수행하지 않으면서도 ‘보호’라는 권리만을 주장하는
두 나라에 맞서 새로운 선교정책을 강행해 나갔다.

이러한 세계 교회사의 흐름이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포르투갈은 1558년 인도의 고아에 대교구를 설정했고,
1566년 중국 마카오에 전진 기지를 마련했다.
교황청은 1576년 마카오 교구에 내린 대칙서에서 그 관할구역을
‘중국 일본과 인접지역’으로 규정하여 막연하게나마
조선의 선교 관할권이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해양을 지배하던 시대가 곧 끝나면서
새로운 지역을 선교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1679년에 중국에 난징(南京) 대목구를 설정하여
선교사를 새롭게 파견하고, 그 관할구역을 ‘난징과 조선 및 인근 성’으로 설정했다.

1690년에는 난징 대목구에서 베이징(北京) 대목구를 독립시키면서
조선 선교의 책임은 막연하게나마 베이징 대목구 관할로 넘어갔다.
이로써 동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이 무력해졌다.

1790년대 이후 조선 교회에서는 교황청에 수차례에 걸쳐 주교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대목구의 독립을 추진했고,
조선 교회 선교를 담당할 단체로 파리외방전교회를 지목하여 부탁했다.
방콕에서 선교하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원함으로써
조선교구(代牧區)가 설정되어 조선 교회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들은 선교회의 방침에 따라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김대건과 최양업을 중국에서 교육시켜 신부로 만들었다.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은 조선말을 배워 조선인과 함께 살며 선교했고,
박해가 닥쳐왔을 때 신자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고, 조선 신자들과 함께
형장에 나가 숨을 거두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들이 뿌린 씨앗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파리외방선교회는 1658년 팔뤼 신부가, 아시아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교회를 세우고
현지인 성직자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창설했고, 오늘날까지 이 신학교에서
아시아로 4천명 이상의 선교사가 파견되었다.
현재도 동남아는 물론 대한민국의 서울, 안동, 대전을 비롯한 6개 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다.


잘못된 ‘구노의 아베마리아’ 인터넷 통해 마구 전파돼
  
‘파리외방선교회 신학생이었던 샤를 프랑소아 구노는 학교를 중퇴하고
작곡가의 길로 들어섰다.
어느 날 그는 신학교 동창 다블리 주교가 한국에서 순교했다는 얘기를 듣고
슬픔에 잠겨  그를 위해 노래를 하나 작곡했으니 그것이 불후의 명곡 아베마리아 이다.’

이런 비슷한 얘기들이 인터넷을 통해 마구 돌아다니며,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다.
친절하게 ‘친구의 이름을 조선교구 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라고 쓴 곳도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라고 주석을 붙인 것도 있다.

소위 ‘퍼온 글’의 피해를 보여주는 전형이다.
‘퍼온 글’의 적지 않은 부분이 아무런 고증도 없이, 생각도 없이
‘소문 퍼뜨리는’ 수준임을 웅변해 준다.
그래서 ‘퍼온 글’은 싣지 않는 게시판도 많이 있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에 얽힌 이야기의 진원지는 대구대교구 김XX라는 신자가
교회사를 전공하신 분도 아닌데 입담이 좋아 유명강사가 되어,
한국천주교회사 강의를 하러 다니면서 신자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만든 이야기입니다.
구노의 아베마리아는 원래 성모님이 아닌 구노의 연인을 위해 작곡했던 세레나데에
성모송을 붙여 더 유명해진 것입니다."

벨기에 루뱅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했고,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총무로서
한국교회사 관련 사료를 담당하고 있는 이영춘신부의 유권해석이다.

“구노가 한국순교자들을 위해 작곡한 성가는 가톨릭성가 284번
<무궁무진세에>라는 노래이고 가사는 병인박해까지의 한국천주교회사 요약이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