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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51 공소(公所)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성당까지 가는 길이 멀어서
일주일에 한 번 미사에 참례할 수 없는 오지가 있다.
도시나 그 주변에는 이런 곳이 없지만,
산간이나 외진 농촌에는 도저히 성당까지 왕래하기 힘든 곳이 의외로 많다.

이런 데서는 신자들끼리 모여 예배를 보는데,
이 예배당을 ‘공소’ (公所 Mission Station 또는 Mission Chapel) 라 부른다.
공소에는 사제가 상주하지 않아, 고백성사나 영성체를 할 수 없으므로
이들끼리의 예배는 ‘미사’라 칭하지 않고, ‘공소예절’이라고 한다.

공소예절은 성체성사 차례에 찬송으로 대신하는 것 말고는 미사와 거의 같다.
공소예절은 공소회장의 주도로 치러진다.
공소에는 일반적으로 한 달에 한 번 내지 두 번 정도,
소속 지역의 사제가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를 행한다.

우리나라의 가톨릭은 사제 없이 스스로 모인 신자들이 예배를 보며 시작했기 때문에
자연히 공소가 이루어졌으며, 이 공소에 신자들이 늘어나고
사제가 상주하면서 성당(본당)으로 발전하였다.
그렇게 해서 생긴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교회가 명동성당이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맨 처음 세례를 받은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한국 가톨릭의 후조격인 이 벽(李檗)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장소가 서울 수표교 부근 이 벽의 집이었고,
그곳에서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봤으므로, 거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공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784년 가을 이 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은 역관 김범우(金範禹)는,
좁은 이 벽의 집 보다는 넓은 명례방(明禮坊 명동) 자기 집에서 집회를 갖자고 고집하여
1785년 '을사 추조 적발사건'(乙巳 秋曹 摘發 事件)으로 체포될 때까지
그의 집에서 이 벽의 주재로 집회를 열었다.
1898년 이 자리에 고딕 양식의 벽돌 건물인 종현성당(鐘峴聖堂 오늘의 명동성당)이
그 위용을 드러냈으니 땅 또한 운명이 있는 것인가.

뒷날 프랑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이 신자만의 집회소를 ‘공소집’ 또는
‘공소방(chapelle)’이라 불렀다.
그러나 ‘공소’는 단순히 건물만을 뜻하지 않고, 신자들이 모여 사는 ‘교우촌’의 의미도 있었고,
거기서 진행되는 전례행위까지도 포함한 복합적인 지칭이 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 신부는 여러 의미가 함축된 이 단어를 표현할
적합한 프랑스어를 찾지 못해 1862년에 본부에 쓴 편지에서
그냥 ‘kongso’ (공소)라고 표기했다.
‘공소’는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만들어진 고유의 이름이 된 것이다.

1850년 공소는 185개를 넘었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두 번째로 서품된 최양업 신부(崔良業)는  
관할 구역 내 127개의 공소를 순방하기 위하여 1년에 7천여 리를 걸어 다녔다고 전해진다.

1865년 말 베르뇌 주교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순회하며,
몇 주일 동안 4개의 공소에서만 8백 명 이상의 성인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보고서도 있다.

2009년 12월 31일 현재 우리나라에는 1,571개의 가톨릭 본당에 1,017개의 공소가 있다.
사제가 없는 곳에 이렇게 많은 공소가 있어 신자들 스스로가 집회를 계속한다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힘을 느끼게 한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