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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53 루르드(Lourdes)의 기적 - 성모 발현

1858년 2월 11일 저녁,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 북쪽 산기슭의 소도시 루르드.
가난한 집 맏딸인 14세의 베르나데트 수비루(Bernadette Soubirous)는 동생 마리,
친구 잔느와 셋이서 땔감을 찾아 나섰다.
가브강가에서 동생과 잔느는 수로를 먼저 건너 멀리 갔고,
베르나데트가 물을 건너려고 양말을 벗을 때, 폭풍우 같은 큰 소리가 들려 왔다.
건너편 마사비엘 동굴 쪽을 올려다보니, 마치 센 바람이 불듯이 덤불이 움직이고 있었다.
동시에 동굴 안에서 금빛 구름이 나왔고 잠시 후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 장미 덤불 위에 나타나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였다.

베르나데트는 얼결에 묵주를 꺼내 들고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그 여인도 오른 팔에 걸치고 있던 묵주를 손에 들었으나, 기도는 하지 않았고,
한 단이 끝날 때마다 영광송을 함께 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기도가 끝나자 여인은 동굴로 들어갔고 금빛 구름도 함께 사라졌다.

그 여인은 16세에서 17세 정도의 젊은 아가씨였으며, 흰 옷을 입었고
허리 부분에 겉옷 밑단까지 흘러내리는 푸른 색 띠를 매고 있었다.
흰 색 면사포를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그 면사포 안에는 허리 뒤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긴 겉옷이 맨발을 덮고 있었으며, 겉옷이 겹쳐진 단에는 노란 색 장미가 빛나고 있었다.
발에 꾸며진 장미의 빛깔처럼 금색 고리로 연결된 흰 묵주를 오른팔에 들고 있었다.

2월 14일 일요일 베르나데트는 다시 동굴로 갔다.
이번에는 잔느, 마리와 다른 친구들도 함께 갔다.
동굴 앞에 도착한 베르나데트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곧 "저기에 계셔! 저기에!" 라고 소리 지르며 친구들을 불렀다.
그녀의 친구들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베르나데트는 무아경에 빠져 한 지점만 계속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행복감으로 가득 찼으며 그 표정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2월 18일 베르나데트는 여인에게서 “너는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이 동굴에 오너라.” 라는
말을 들었다.

2월 25일 여인은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베르나데트에게 마시고 몸을 씻으라고 지시했다.
베르나데트는 지시한 대로 손으로 땅을 파헤친 후 그 물을 마시고 목욕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엄청난 양의 샘물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온갖 종류의 병을 앓는 환자들이 대거 몰려와
이 샘물을 마시고 몸에 뿌렸고, 많은 기적 치료가 보고되었다.
이 샘물이 ‘루르드의 샘물’이다.

3월 25일 밤중에 베르나데트는 어둠을 틈타 동굴에 도착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물결의 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멀리하고 있었던 터라,
발현에 대해 말하는 베르나데트는 정부 당국과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며,
발현 장소에 가는 것마저 금지당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동굴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경찰관을 배치하여
사람들이 접근을 막았다.

베르나데트는 가브 강가에서 무릎을 꿇고 동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여인이 나타나자 베르나데트는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 번이나 물었으나 여인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네 번째 물음에 그녀는 마침내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고 대답했다.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 - Immaculate Conception’를
모든 신앙인이 믿어야 할 계시진리라고 선포했다. 교육을 받지 않은 베르나데트가
이를 알 리가 없으므로, 사람들은 그 여인이 마리아의 발현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자 당시의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울타리를 철거하고, 순례를 허락하였다.]

7월 16일 베르나데트는 18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

지금까지 모든 과정 동안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교회는
전국적인 질문들에 직면하자, 1858년 11월 17일에
루르드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발족하였다.
1860년 1월 18일 지역 교구장은 “동정 마리아께서는 참으로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나타나셨다.”라고 발표하였다.
1862년 교황 비오 9세는 그 지역 주교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루르드의 성모를 공경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864년에는 베르나데트가 진술한 내용에 따른 성모상이
잡목으로 둘러싸인 벽지의 동굴 속에 성황리에 안치되었다.

성모 발현 이후 50년 동안 루르드의 샘물에서 난치병이 치유됐다는 보고가 4천 건을 넘었다.
1882년에는 이러한 기적을 조사하기 위해서 의료국이 생겼다.
치유 사실은 의료국에서 확인을 받아야 하며, 1년 후에 재차 검사를 하여,
병이 재발하지 않은 것을 확인 받아야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불치병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치료되었다."고 인정받았다.
지금까지 보고된 기적 치유 사례는 약 7천 건이며,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기적은 67건이다.

오늘날 루르드에는 약 1만 5천 명이 살고 있지만,
매년 5백만 명 이상의 순례자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세 개의 성당에서는 한꺼번에 수만 명이 미사를 드릴 수 있으며,
약 270채의 숙박시설이 있어서,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숙소를 보유한 도시이다.

베르나데트는 1866년 루르드를 떠나 수녀가 되었다.
성모 마리아는 베르나데트에게 현세에서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지병인 천식과 결핵, 몰려드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겸손하지 못하다는 원장수녀의 질책 등으로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1879년 4월 16일 35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고,
1933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된 마리아 축일’에 성녀 품에 올랐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