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사진 : 이 벽의 세례


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54 한국 가톨릭의 비조(鼻祖) 이벽(李蘗)

성남이나 송파 쪽에서 100번 도로를 타고 하남, 팔당대교로 가려면,
서하남 IC 를 지나 ‘광암터널’을 통과하게 된다.
이 터널을 지나면 우리나라 가톨릭의 발상지인 천진암에 갈 수 있다.
1백년 건설 계획으로 성지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인 천진암에는
한국 가톨릭의 창시자인 다섯 분 성조(聖祖)를 모시고 있는데,
그중 으뜸이 이 벽(李蘗)이고, 그 분의 호가 광암(曠庵)이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하나의 종교를 시작한 분을 기리기 위해서
그 분의 호를 터널 이름으로 붙였구나.” 하며
우리나라의 높아진 문화 인식에 흐뭇해했었다.
이는 단지 나 개인의 생각이 아닌 것이,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많은 분들이 그런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이 글의 서두를 ‘광암 터널’로 하기로 하고, 쓰기 시작하려다가,
“정말 우리나라가 그런 수준일까? 타 종교에서 과연 그런 일을 수용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광암 터널’의 지명 유래에 대한 자료를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전혀 발견하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한자 표기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결국은 하남시 역사박물관팀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는 터널이 있는 곳이 광암동(대부분의 안내에는 춘궁동으로 나와 있다.) 이어서
광암터널이라고 설명한다.
거기에 너른 고인돌이 있었고 그래서 ‘너른바위’ - 광암(廣岩)이 되었을 거란다.
“그러면 그렇지.” 몇 년간 멋대로 생각했던 나는 맥이 풀렸다.

풀린 맥은 이미 풀린 거고, 그냥 이 벽이란 누구인가를 풀어보자.

이 벽은 1754년 경기도 포천군에서, 경주 이씨 부만(溥萬)을 아버지로,
청주 한씨를 어머니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庵), 세례명은 요한세자(洗者).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원로 대학자 성호 이 익(星湖 李瀷 1681년-1763년)은  
'앞으로 아주 큰 그릇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일곱 살에는 경서를 읽었으며, 열아홉 살 때, '천학고(天學考)'를 지었고,
'상천도(上天道)'라는 글을 지어, 집 부근 봉선사(奉先寺)에 기증했다.

스물다섯 살 때, 성호 이익 선생의 학풍을 이으려는 정약전, 이승훈, 권 상문 등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이때 이미 천학도리를 아주 깊이 깨닫고, 믿고 있었다.
천학에 관한 서적들은 현고조부(5대 할아버지) 이경상이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년간 가 있을 때, 아담 샬 신부에게서 천주교 도리를 듣고,
중국인 천주교 신자 5명을 환관으로 데리고 왔었는데,
그 때 가지고 왔던 천주교 책이 집안에 전하여 오던 것이었다.

천진암 이 벽 묘소


1779년(정조 3) 권철신(權哲身 44세), 이승훈(李承薰 22세), 정약전(丁若銓 21세),
정약종(丁若鍾 19세), 정약용(丁若鏞 17세), 이총억(李寵億 14세) 등
기호지방 남인학자들이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새로운 사상과 실학을 모색하는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는데,
이때 그는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전했다.

<정약용(丁若鏞) : 기해년(己亥年 1779년) 天眞菴에서 講學 할 때, 李 檗이 밤중에 와서
                           여럿이 촛불들을 밝히고 經書를 談論하였으며 ...>

<丁學術(정학술 정약종-丁若鍾의 익명으로 판단됨) 의 이벽전(李檗傳) :
  무술(戊戌 1778) 기해(己亥 1779)년 이 벽선생이 천진암(天眞菴)에서
  성교요지(聖敎要旨)를 하필(下筆) 하시었다.>

1836년에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성(聖) 모방(Maubant)신부는
1838년 파리 외방선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 벽은 1783년 북경으로
이(李)라는 성(姓)을 가진 사람을 파견하여, 1784년 2월 영세하고 돌아왔다."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이 이 벽의 지시에 따랐음을 증언한다.
이 벽은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고, 권철신 정약용 정약전 이윤하(李潤夏) 등
남인학자들과 김범우(金範禹) 등 중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벽은 우리나라 최초의 교단 조직인 '가성직자계급'(假聖職者階級)을 형성하고
그 지도자가 되어 포교·강학 등 천주교 의식을 거행했다.
1년간 약 500명의 입교 영세자를 냈고, 명례방 김범우의 집(지금의 명동 성당 부근)에서
집회를 열었다.

1785년 봄 수십 명의 양반과 중인이 모여 있을 때 추조(秋曹=형조) 관리들이 갑자기 들어와,
수색을 하고, 성물과 성서를 몰수해 가는 동시에, 집주인이며 중인인 김범우를 체포하여 가고,
양반들은 귀가시켰다. <을사추조적발사건 乙巳秋曹摘發事件>

이 벽의 아버지 이부만은 경주 이씨 문중 회의에 번번이 불려가,
이 벽의 천학운동(天學運動)을 막든가, 막을 수 없으면, 족보에서 빼 버리겠다는 선고를 받았다.

이부만은 이 벽을 달래고, 야단치고, 위협하며, 천학운동을 하지 말 것과,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잘못을 빌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문중에서는, 평창 이씨 집안에서의 이승훈의 사과와,
나주 정씨 집안에서의 정약용 등의 사과 소식을 들은지라,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 벽의 태도에 한층 더 격분하였다.

마침내 이부만은 이 벽을 후원 별당에 감금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했다.
1785년 음력 6월 14일 이 벽은 운명했다.

야후, 다음, 위키백과등 여러 백과사전에는 이 벽이 페스트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천진암의 기록에는 아사벌(餓死罰)로 단식순교(斷食殉敎)했다고 씌어있다.
정학술의 이 벽 전에는 ‘단식 15일이 지나자, 완전 탈진하여, 그 자리에서 운명하셨다’고
돼 있다.

이 벽의 독살설은 꾸준히 제기돼 왔으며, 1979년 6월 21일 이장 때 발굴된 유해는
시신이 검푸르게 마르고, 치아가 검고 흑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어서,
당시 이장위원회의 유해관리 책임자였던 가톨릭의과대학 해부학 주임교수 권흥식박사도
독살 가능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페스트로 죽었다면 그 주위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므로
조선시대의 페스트 기록을 찾으려했으나, 공개된 자료에서는 언제 페스트가 창궐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최승숙이란 분이 2009년 4월 18일 쓴 ‘우리나라의 흑사병 발생사례’ 라는 글이
참고가 될 뿐이었다.

- 우리나라 역사에서 흑사병에 대한 사례를 찾기 위해, 일단 인터넷으로,
  조선시대부터 그 이전을 검색했다. ‘페스트’, ‘흑사병’, ‘조선시대 흑사병’, ‘고려시대 흑사병’,
  ‘우리나라 질병사’, ‘질병 기록’, ‘조선 전염병’ 그 밖에 여러 조합을 사용하여 ‘네이버’, ‘야후’,
  ‘다음’, ‘엠파스’, 심지어 영문판 구글 까지 조사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우리 의약의 역사’, ‘조선 의약사 및 질병사’, ‘세종시대의 보건위생’ 등을
  훑어보았지만, 흑사병이라는 표현은 찾지 못했다.
  다만, ‘우리 의약의 역사(정민성 저, 학민사)’를 보던 중 페스트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내용인즉, ‘19세기 말 기록에 의하면 조선 시기에 학질, 콜레라, 장티푸스, 재귀열, 천연두,
  홍역 등이 많았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시기에는 전염병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만연하였다는 데도 특징이 있다. --- 우리나라 질병사를 보면 페스트는
  압록강 이북 지역들에서는 유행했으나 압록강 이남 지역까지 내려온 일이 없다.‘

<馬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