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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28 우리나라의 최초의 신부 김대건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신부는 김대건이다.
김대건은 1821년 8월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로는 면천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조부 김택현 안드레아 등이 순교한 순교자 가문이다.
어릴 때 이름은 재복(再福).

김대건 일가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솔뫼를 떠나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한다.
어려서부터 신앙심 깊고 총명했던 김대건은 1836년 4월 부활절 무렵, 골배마실 근처에 있는
은이공소를 방문한 모방(Maubant)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모방(Maubant) 은 1836년 1월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적당한 소년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김대건은 7월에 서울로 올라와, 먼저 선발된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해 12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귀국하는 길에 유학의 길을 떠난다.
장차 한국교회의 순교성인으로 빛날 교우들인 정하상 바오로, 현석문 가롤로,
조신철 가롤로의 호송을 받으며 일행은 만주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의 교우들과
작별하고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 봉천, 산해관, 북경, 천진, 광동을 거쳐
1837년 6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도착했다.

최방제는 1년만에 열병으로 병사하는 불행을 맞았고, 조국에서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김대건의 부친과 최양업의 부모님이 순교한다. 모방(Maubant) 나 신부와 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 그리고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이 순교했다.
조선은 또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되어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마카오 신학교에서 사제양성 과정을 밟다가,
1842년 중국 요동 소팔가자(小八家子)로 옮겨, 1844년 12월 15일 조선교구 3대 교구장으로
선임된 고 주교에게서 부제품을 받는다.

김대건은 1845년 1월 평북 의주를 거쳐 국내에 들어왔다.
그에게는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주교를 맞아 들여야 하는 중대한 의무가
주어져 있었다. 외국인 성직자들이 육로로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그 해 4월 30일 중국에서 조선 입국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교구 제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셔오고자, 작은 배 한 척을 사서 현석문 가를로등
11명의 교우와 함께 상해로 출발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20리쯤 떨어진 김가항(金家港) 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국교회창립 61년만에 한국교회 첫 번째 사제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8월31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11명의 교우들과
페레올 주교가 라파엘호라고 이름 붙인 작은 어선을 타고 조선을 향해 출발한다.
라파엘호가 처음에는 요동방면으로 가는 중국 배에 끌리어 산동성까지 무사히 이르렀으나
갑자기 거센 풍파를 만나 키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 물결이 치는 대로 배를 맡기게 되었다.
9월 28일 라파엘호는 제주도의 해안에 닿았다. 1845년 10월 12일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금강으로 접어들어
60리쯤 올라가 은진군 강경에서 조금 떨어진 나바위에 상륙하여
서울로 잠입했다.

이듬해 5월 서해 바다길을 통한 선교사 영입 방법을 찾아보라는 주교의 지시에 따라
서해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에 편지와 지도를 건넨 김대건은 6월 5일 백령도 인근에서
체포됐다. 김대건의 사목활동은 아쉽게도 반년 만에 멈춰야 했다.

포도청에서 엄한 문초와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대건은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불과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였다.
모래사장에 가매장됐던 그의 시신은 경기도 미리내와 용산 성직자 묘지를 거쳐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에 안치됐다.

<馬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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