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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자생적 기독교의 상징 곰실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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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실공소>

 

기독교 전파는 선교사의 파견으로 시작된다.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기독교를 박해하는 지역에 선교사가 들어가,

많은 목숨을 거는 오랜 노력 끝에 간신히 믿음의 씨앗이 뿌려져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러한 역사의 진행을 따르지 않았다.

소장 남인(南人)인 권철신(權哲身)1777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퇴촌면(退村面) 우산리(牛山里) 앵자봉(鶯子峰)에 있는 절

천진암(天眞庵)에서 이 벽(李 蘗) 정약용(丁若鏞)들과 개최한

실학 강학(講學)이 그 씨앗이었다.

6, 7년간 계속된 이 강학은 유교 경전 연구로 시작되어

서학서(西學書)의 검토로 이어지고

이 벽에 의해 서학은 서교(西敎), 천주학은 천주교로,

학문적 지식이 종교적 신앙으로 변환된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발아의 기적이 또 한 번 이루어졌으니

바로 강원도 춘천의 곰실 공소에서였고

그 주역은 젊은 청년 엄주언(嚴柱彦) 마르티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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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언 마르티노>

 

엄주언은 18721210() 강원도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착하고 총명하던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우연히 천주실의쥬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하게 된다.

<춘천교구 곰실공소편>

 

우리 아버님은 네 형제 중 막내였는데

두뇌가 명석하니까 형님들이 한문 공부를 시켰어요.

그래서 공부를 하다보니까, 이 세상 우주 만물이 이렇게 잘 만들어져 있는데

그 섭리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으셨대.

그래서 마음으로 천주교 신자 좀 만났으면 하고 있던 차에

천진암에서 춘천으로 장사하러 온 사람이 방을 빌려달라고 하더라는 거야.

그래서 건넌방을 내주었더니 그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중얼중얼하면서

뭔가를 하더라는 거야. 아마 기도하는 소리였나 봐.

, 저 사람이 말로만 듣던 천주교 신자구나.’ 하고

하루는 쫓아가서 당신이 무슨 도를 믿는지 나에게 알려달라고 했대.

그랬더니 그 사람이 얘기를 해주지 않으려고 하더라는 거야.

군란<1882년 임오군란>이 지난 지 얼마 안 된 때여서 말하기가 어려웠나봐.

그 사람이 떠나며 아버지에게 천주실의하고 주교요지를 주고 갔어.

그걸 읽어보니 어서 빨리 하느님을 공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래.

17살이던 아버님은 형님들에게 내가 천주교에 대하여 알았고.

천주교를 더 배우고 싶으니 같이 광주 천진암으로 가자고 했는데

둘째 셋째 형님의 반대가 심해 뜻을 이루지 못했어.

몇 년이 지난 뒤 두 형이 죽게 되자 1893년 맏형과 둘이

천진암까지 걸어가 한 달을 지내면서 교리를 배웠어.’

<엄 마르티노의 막내 엄연섭 루치아(당시 84)의 생전 인터뷰 내용.

  - 경향잡지 20027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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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 동산>


 

1893년 늦가을에 그는 맏형과 함께 일곱 식구를 모두 데리고

천진암으로 가서 움막을 짓고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에는 형과 함께 영세를 받았다.

 

1896년 나머지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뒤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마을에서 쫓겨났고

외가의 도움으로 고은리(東內面 古隱里 곰실) 윗 너부랭이라는 곳에

폐가 한 채를 사서 겨우 정착하였다.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따돌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며 살기 시작하였다.

주경야독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윗 너부랭이에서 여러 해 땀 흘린 보람이 있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 너부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로 이사한 후

조촐한 강당을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보게 되었다.

곰실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 지도하에 모범적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었다.

<춘천교구 곰실공소편>

 

‘3년 동안 광주(천진암)에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고향인 춘천 서면으로 돌아오셨는데 천주학쟁이라 아무도 반겨주질 않아.

외가 쪽 육촌의 도움으로 고은리에 폐가를 사서 살게 되었어.

떡갈나무 잎을 넣어 죽을 쑤어 먹으며 화전을 일구었는데

심는 것마다 잘되더래. 하느님 일을 열심히 한 덕인가 봐.

거기서도 처음에는 배척받고 살았는데 아버님은 술도 한 잔 안하시지,

학식도 있지, 성실하지, 농사도 잘 짓지 하니까 사람들이 다시 보게 된 거야.

그 동네가 양씨 집안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 사람들에게 교리 공부를 시켜서 다 영세를 시키고

풍수원에서 신부님을 모셔다가 일 년에 40, 50명씩 세례를 받게 하셨어.

신자도 늘고 재산도 늘자 좀 아랫동네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이 지금의 곰실공소 자리야.

우리 집 40칸을 짓고, 공소도 짓고, 양옥의 사제관도 지었어.

이때가 1920년인데, 공소를 짓고 나서 풍수원성당과 서울 명동성당을 오가며

신부님을 모시려고 갖은 노력을 한 끝에 제1대 신부님을 그 해 9월에 모셨지.

그 신부님이 김유용<金裕龍 필립보 1892~1972> 신부님이야.’

<엄연섭 루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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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


 

엄 마르티노는 애련회(愛練會 사랑을 훈련시키는 회)를 조직,

15세 이상 신자를 모두 이 회에 가입시키고

계를 조직하여 춘천시내에 새 성당을 짓기 위한 기금 마련에 나섰다.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짚신 삼기(당시 한 켤레 당 5)로 돈을 모아

애련회 소유 농토를 늘리고, 소출을 장리로 주기도 했다.(한가마당 세 말)

 

자신의 논까지 팔아 시내 약사리 고개 현 죽림동 성당 아래

골롬반 병원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를 사서 개조하여

19285월부터 성당으로 쓰게 되었다.

현재의 죽림동 성당(춘천교구 주교좌 성당)

김유룡 신부와 엄 회장이 이끈 곰실 교우들이 애써 마련한 아랫터에 보태어

구 토마스 신부(토마스 - 퀸란 - Quinlan Thomas 具仁蘭 1896-1970)

매입한 언덕 위에 서게 되었다.

<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성당편>

 

애련회는 지금의 연령회 같은 구실을 하는 것으로 아버님이 만드셨는데.

모은 기금에다 아버님 논 다섯 마지기를 합쳐

지금의 죽림동성당 터를 사게 된 거야.

죽림동으로 이전하면서 신자 수는 600명 정도로 늘었대.

이후에도 아버님은 헌신적 노력으로 교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고

몸소 실행하는 종교인으로서 모범을 보여 많은 사람을 교화시키고

전교하는 데 크게 기여하셨어.

1955430일 여든셋에 돌아가셨는데 정말 많은 일을 하고 가셨지.

 

아버님은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되어주며, 남의 말 하지 말고,

잘 입지도 먹지도 말며, 진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고,

죽은 사람 장사를 잘 지내 천하를 주더라도 살 수 없는 영혼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셨지.

아버님 뜻에 따라서 나는 지금의 연령회 같은 일을 53년간 했으니

염하는 데는 내가 1등이에요.

전교도 많이 했지. 외인이라도 가서 시신 한 번 잘 묶어주면

다들 성당에 나오고 그랬거든.

내가 염한 분들이 500구는 넘을 거야 아마.’

<엄연섭 루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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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소 정문>


 

곰실은 춘천시 동쪽에 솟아있는 대룡산(大龍山) 아래에 있다.

지금도 시내에서 고속도로 건너에 있는 외딴 곳이니

옛날에는 아주 깊은 산속 마을이었을 것이다.

()이 나오는 골짜기()여서 웅곡(熊谷),

고은동으로 불리다가 곰실, 고은리가 되었다.

마을 뒤의 골짜기 이름이 너부랭이이다.

 

가마니를 짜고, 새끼 꼬고, 켤레 당 5전하는 짚신을 삼아 팔아

20여년을 모아 시내에 땅을 사서 성당을 지었다니

그 믿음과 끈기와 정성에는 존경과 감탄만이 있을 뿐.

 

1920년 김유룡 신부가 부임했을 당시에

곰실 주민이 150명이었는데

1928년 죽림동 성당으로 이전할 때는

신자만 3백 명이었다니 이 또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곰실공소(춘천시 동내면 동내로 220. 고은리 438)에는

이렇게 훌륭한 선배들을 기리는 상징물이 전혀 없다.

성지로 지정만 되었을 뿐 성역화는 이루어지지 않아

옛 모습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깨끗하게 펼쳐진 잔디밭,

시멘트로 다듬어진 주차장, 의례 세워지는 성물들에 싸인

관광 성지보다, 선각자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

생생한 모습이 더욱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분들을 기리며 조용히 잠시를 보내고 싶으면

멋있게꾸며지기 전에 찾아봄이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