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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벽해(碧海)가 상전(桑田)된 제물진두(濟物津頭) 순교 성지

 

 

제물진두 순교터-01.jpg

  <제물진두 순교 터 : 정면 큰 길이 인천역 가는 길, 왼쪽 끝 건물 위가 파라다이스 호텔,

      오른쪽 십자가 건물 뒤편이 해안성당. >

    

 

제물진두는 병인박해 때, 증거자 박순집의 외가 집안과

이승훈의 후손들이 치명한 순교 터이다.

한적했던 나루터가 지금은 다 메워져 바다는 보이지 않고

그야말로 벽해상전(碧海桑田)의 번화한 거리가 되었으나

핏빛 아픔의 상처는 역사 속에 온전히 살아있다.

 

 

제물포는 본래 고구려의 미추홀현(彌趨忽縣 또는 彌鄒忽縣)이었는데,

백제가 점령한 뒤 매소홀현(買召忽縣)이 되었고

중국의 동진북위와 내왕하는 포구로 자리한 이래

고려와 조선에서도 국내외 해상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계속해 왔다.

 

조선 시대에 제물진(濟物鎭)이 설치되어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하였으나

효종 때 강화도로 옮겼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과 1882년의 제물포조약이 체결되면서

개항장의 면모를 갖추고 급속히 확장되었다.

1883년 일본 조계(租界)가 처음 설치되고

이듬해 청국 조계를 비롯, 각국의 조계가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15만여 평 지역에 들어서면서 국제도시로 발전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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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당 벽에 걸린 순교도>

    

 

병인박해 때 외적과 내통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여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고,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천명하는의도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공개 처형장으로 이곳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1868년 손 베드로 넙적이(박순집의 이모부),

김씨(손 베드로의 부인, 박순집의 이모), 백치문 사도요한(손 베드로의 사위),

이 마리아의 손자 등 4명이 포졸에게 잡혀 도끼로 순교하였다.

 

1871년 신미년 56일에는 이승훈의 증손자인 이연구(蓮龜), 균구(筠龜) 형제가 순교했다.

이들은 미함(美艦)으로 들어가 미함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죄목으로

효수경중(梟首警衆, 목을 잘라 매달아 대중에게 경각심을 줌) 되었다.

같은 해 518일에는 정씨(이승훈의 손자 이재겸의 부인),

이명현(이재겸의 손자), 백용석, 김아지(김애기)들이

사학죄인으로 제물진두에서 효수되었다.

<인천교구 홈페이지 및 제물진두성지 경당 비석에는 위와 같이 10명 순교한 것으로,

  백과사전 등 여러 곳에는 이 마리아의 손자를 빼고 9명이 순교했다고 기록돼 있다.>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01.jpg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제물포에서는 이밖에도 역사적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다.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입국하여 1년 여 간 조선교회의 사정을 둘러보고,

18454월 사제 서품을 받기위해

이 부근 포구에서 작은 목선을 타고 중국 상해로 떠난 곳이기도 하다.

 

188545일에는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제물포 나루에 상륙했다.

인천역 남서쪽에 있는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은 이를 기념하여 1986년에 건립되었다.

 

1888년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 4(프랑스 2, 중국 2)

이곳을 통해 입국했다.

 

 

사진이나 기록을 통하여 옛 제물포 나루의 위치는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부근임을 알 수 있으나,

제물진두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2010년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 김진용 마티아는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파라다이스호텔이 위치한 언덕에서 자유공원 방향으로,

   해안동성당 뒤편 벼랑 아래에 이르는 장소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김 마티아 부원장은, 제물진두 순교자에 대한 관변 측 사료와 교회 측 사료,

박순집 증언록, 인천부 고지도 및 현 위치도, ‘인천개항 120년사’(나채훈 교수),

인천부사’(仁川府史, 1883~1933)에 기록된 해안 매립사업(1899~1931),

여러 증언록 등을 토대로 이 위치를 특정하였다고 한다.

<평화신문>

 

    

순교성지 경당-01-01.jpg     순교성지 경당-02-01.jpg

<순교성지 경당. 오른쪽 건물은 한중문화관.                    <벽해상전의 기록 : 이곳은 바다였습니다.>

   사진, 길 위의 검은 부분은 --->                                                                 

                

 

2014년에는 제물진두 순교성지 경당이 건립되었다.

차이나타운 입구 한중문화관 바로 옆,

대지 33평 건평 13평의 아름다운 건물이다.

  

 

           위로와 자비의 주님-01.jpg

                                               <위로와 자비의 주님 - 경당 입구>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힘드니? 내 손을 잡아라!”

손을 내밀고 계신 위로와 자비의 주님옆 좁은 입구 벽에는

순교자 10위의 명패가 붙어있고,

경당 안 유리창을 등진 예수 상과 유리화 십자가를 통해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경당 정면-01.jpg

                                                          <경당 안 정면>

 

오른쪽 벽에 걸린 그림 속에는 사제품 받으러 떠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1888년 이곳에 도착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

처형당하는 순교자들과 그를 둘러싼 신도들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