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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선조들의 진실한 믿음이 감촉되는 수리산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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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ld Saint Paul's Cathedral - 웰링턴, 뉴질랜드>

 

 

오래 전 뉴질랜드 출장 길, 여백의 시간에 수도 웰링턴에 들렀다가

우연히 옛 성 바오로성당 - Old St. Paul's Cathedral을 찾았다.

그때까지 외국의 성당 구경이라고는 파리의 노트르담, 바티칸,

캐나다 몬트리올의 아름다운 노트르담 등이 전부였던 나는

옛 성 바오로성당을 만나는 순간 완전히 새로운 지평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이것이 교회의 아름다움이구나!”

장엄하고도 다채로운 스테인드글라스, 발바닥에 부드럽게 밟히는 마루,

묵직하여 안정감을 주는 통나무 의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고,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성전.

높이 달려있는 창문들은 연결된 끈으로 여닫아 옛과 오늘을 이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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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세인트 폴 성당 내부 - 모두 뉴질랜드산 나무로 만들어졌다.>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많아야 1백 명을 수용할 그 아담한 크기였다.

양들은 그의(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는 요한복음 말씀대로라면,

교회의 사제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알아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웬만하면 신도수가 수천 명이 넘는 오늘의 교회에서

과연 양들의 이름을 다 아는 사제를 기대할 수 있을까?

사제와 신도가 서로를 잘 알고, 자주 대화하여 소통하는 그런 교회가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라는 당연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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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환 성인 생가>

 

 

우리나라의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나는 정말 아름다운 교회들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교회들에서 느낀 아름다움이 대부분

외관에서 온 것이라면 우리의 그것은 그 안에서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감싸주는 분위기와 함께

옛 신자들에게서 전달되는 진실한 믿음의 모습이었다.

 

이런 성스러운 느낌을 가장 잘 만들어 준 곳 중 하나가

수리산 성지의 최경환 성인 생가 기념 성당이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가족이 살던 곳이다.

200664일 빈 터만 남아있던 자리에 고택을 복원하여

내부에 작은 성당을 만들었다.

    

                             최경환 성인 고택-05-03.jpg                                     <최경환 성인 생가 기념 성당>

 

낮은 천장 아래 공간을 2단으로 나누어 윗단에는 제대를 만들고

아랫단에는 신자들이 방석을 깔고 앉아 미사를 보게 했다.

실내에는 외부 광선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미사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경건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좁은 공간이니, 말씀은 바로 옆에서 실제로 주님이 하시는 듯 들렸다.

자청한 나의 독서 또한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한 진동으로 참례자들 사이를 흘러 나갔다.

신앙의 선조들이 옆에 앞에 뒤에 함께 앉아있는 것 같은 감촉에 싸여 있었다.

    

    최경환 성인 상-02.jpg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흉상>

    

 

최경환(崔京煥 1805-1839) 성인은 충청도 홍주(洪州) 다락골(누곡-樓谷.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교회 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성장해서 '내포(內浦) 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입동. 종로 2, 3가 관수동 관철동)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으로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김화군), 경기도 부평(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 뒤뜸이 담배촌에 정착하였다.

여기서 신자들과 담배를 경작하여 생계를 이으며 교우촌을 이끌었다.

 

1836년에는 큰 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모방(Maubant, )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헌종 5) 수리산공소 초대 회장으로 선임된 그는 기해박해(1839)가 일어나자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매장해 주었다.

7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가

아들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 신학공부를 시킨다는 죄가 추가되어

혹심한 고통과 형벌을 받고 5백여 대의 치도곤을 맞아 옥중에서 사망했다.

아내 이성례는 18401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84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위(聖人位)에 올랐다.

이성례 마리아와 최양업 토마스는 시복 시성이 추진 중이다.

 

최경환의 유해는 1928년 막내며느리 송 아가다의 증언에 의해

뒤뜸이에서 발굴돼, 명동성당 지하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시성 직전에 절두산 순교기념관 지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수리산성지 홈페이지-수리산성지 연혁>

    

                                        수리산성지 순례자성당-29-01.jpg

                                                        <성지 입구에 있는 순례자 성당>

 

 

1839912일 순교 후 성인의 시신은 여러 번 장소를 옮기는 어려움 끝에

성인의 둘째 형인 영겸씨 부자가 이곳 수리산에 안장하였다.

다시 절두산으로 옮겨진 뒤 유해 일부를 모셔서 묘역을 이루어

많은 이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최경환 성인 묘소-30-05.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