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2492 추천 수 0 댓글 1

 

 

12. 성당을 통째로 끌어 옮긴 구산성지.

 

필리핀의 시골 바닷가를 지나다 보면 가끔 주민이 이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의 집은, 한길 정도 되는 기둥 네 개를 땅에 박고, 그 위에 마루를 깔고,

삿자리 종류로 대충 바람벽을 세운 뒤,

니파(Nipa - 야자의 일종) 잎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은 간단한 구조이다.

아래층은 비어 있어서 닭, 돼지, 개들이 사는 곳이고

사람은 사다리를 타고 2층에 올라가서 산다.

원두막을 생각하면 그 모양이 쉽게 그려지리라.

동남아나 열대지방의 바닷가 집들은 대개 비슷할 것이다.

 

이사 할 때면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어, 패를 나누어 네 기둥을 번쩍 들고는,

원하는 곳까지 걸어가서 내려놓으면 끝이다.

보고 있노라면 신기하고, 살림하는 모양이 좀 허망하기도 하고,

소박함이 부럽기도 하고, 여러 생각이 뒤섞인 미소가 떠오른다.

이와 비슷한 이사가 우리나라에서도 행해졌다.

  

옛 구산성당 - 01.jpg 

           <옛 구산성당-01>

 

미사리 남쪽 강변에 있는 구산성당(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미사지구 택지개발사업에 따라 2016년 철거가 결정되었다.

이 성당은 육이오 전쟁 휴전 직후인 1956,

가톨릭 신자들인 마을 사람들이 한강변에서 직접 자갈돌을 옮겨 지은 건물로서

막 환갑을 맞은 터였다.

조선 최초 서양인 신부 피에르 모방이 은신하기도 했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이 거쳐 가기도 한 이 성당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원형보존실행위원회는 교구의 중재와 합의로 건물을 원형 그대로 이동 보존키로 했다.

<위키백과>

 

3개월간 구조물을 보강하고 건물 바닥을 지반에서 분리했으며

이사 갈 구산성지에 이르는 2백여 미터의 이동로를 평탄하게 골랐다.

124일부터 하루에 15m씩 총 10여 일간 이동하는 방식이다.

 

구산성당 이전-01.jpg

                                   <구산성당 이전 - 01>

 

시멘트 벽돌 건물을 원형 그대로 이동 보존하는 것은 이번이 첫 시도라고 보도됐다.

우여곡절 끝에 성당은 2017214일 마침내 새 보금자리에 안착했다.

<연합뉴스>

    

  

구산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1795~1841)의 고향이고 묘소가 있는 곳으로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200여 년간 간직한 평화의 은혜가 가득한 성지이다.

평화의 은혜가 충만한 이유는, 성인과 순교자들을 모신 곳이지만

피 흘림의 순교지는 아니었다는데 있다.

이곳(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387-10)에는 김 성인과 여덟 분의 순교자가 묻혀있다.

<구산성당 홈페이지>

 

자비의 문-01-01.jpg

                                     <자비의 문 - 01>

 

김 성인의 본관은 경주, 이름은 우집(禹集)이고,

성우(星禹) 치윤(致允)은 그의 자()이다.

경기도 광주 구산(龜山 : 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의 부유한 집 장남으로서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주위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830년경 셋째인 문집(文集 : 윤심)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얼마 후에는 둘째 만집(萬集 : 덕심)도 입교하여,

삼형제가 이웃과 친척들에게 전교함으로써

구산 마을이 천주교 교우촌으로 변모하게 하였다.

 

1833년 중국인 신부 유방제(劉方濟)가 입국하자,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於義洞 : 현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동대문 밖 마장안(馬場內 : 현 마장동)으로 옮겼다.

그 후 다시 구산으로 내려가 자신의 집에 강당을 마련하고,

한동안 모방(Maubant) 신부를 그 곳에 거처하도록 하였다.

18361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Maubant) 신부가 공소를 설립하자

초대 회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동생들이 체포되었으나

김성우는 관헌들의 습격을 미리 알고 지방으로 피신하였는데,

수색에 걸려 18401월경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치도곤을 맞으며, 배교하라는 강요에, 아무런 굽힘없이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

(사생간 천주교인 - 死生間 天主敎人) 라고,

우리의 심금을 찡하게 울리는 명언을 남겼다.

옥중에서 성인은 의연하게 행동하였고,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 중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하였다.

성인은 다시 형조 감옥으로 이송되었으나,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안 관장은

결국 1841년 윤 39(429) 그를 교수형에 처하였다.

 

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金聖熙) 등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되었으며,

시복 후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다.

192575일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5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두산백과>

    

김성우 성인과 순교자들의 묘소-01-01.jpg

                                                <김성우 성인과 순교자들의 묘소-01>

 

그 밖의 여덟 순교자들은 다음과 같다.

 

김만집은 김성우 성인의 첫째 동생으로, 형제들보다는 늦게 천주교를 받아들였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아우 김문집(베드로),

사촌 김주집(金胄集, 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321(양력)이었다.

그들은 처음에 석방되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留守)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들은 배교를 거부하여 여러 차례 형벌을 당하게 되었지만

끝내 참고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광주 유수는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한 겨울 내내 그대로 방치하였다

결국 옥중에서 병을 얻게 된 김만집은 몇 주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순교하고 말았으니,

1841128(양력 219), 나이 44세였다.

김만집의 장남 원희(元熙 당시 14)는 부친이 순교한 뒤

버려진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김문집은 김성우의 둘째 동생으로, 형 김만집이 옥사한 뒤에도 사촌 김주집과 함께

18년 동안을 갇혀 있다가 1858년 왕세자 탄생을 계기로 베풀어진 특사 때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866(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戊辰年)에 박해가 점점 심해지면서

김씨 집안의 성인 남자들은 모두 잡혀서 남한산성으로 끌려갔다.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성희(암브로시오), 김만집의 차남 차희(次熙),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성희의 양자인 교익(敎翼, 토마스),

김주집의 장남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씨 집안의 은혜를 입은 일이 있는 포교가

'3대가 함께 죽도록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도중에 가장 어린 김교익을 언덕 아래로 밀쳐 내 살려 주었다고 한다.

결국 5명은 1868215(양력 38) 순교하였고

뒤에 김교익이 몰래 남한산성의 형장으로 가서

김문집, 김성희, 김경희의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 구산에 안장하였다.

 

최지현은 1860년경 입교하였고,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아내가 먼저 붙잡혀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살다가

1868년 윤4451세 때 강원도 원주 태생 조종구(趙宗九, 타대오),

경기도 지평 태생 민효원(閔孝源, 나자로), 경기도 광주 태생 홍희만(洪喜萬),

경기도 구산 태생 심칠여(沈七汝, 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잡혀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친척이 찾아다가 그 집 산에 안장했었는데,

1978년 순교자의 후손들이 구산으로 이장하였다.

 

심칠여는 구산 태생으로 1859년 무렵 이웃 마을의 신자 심성일(沈聖一)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1864년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심칠여는 1868년 윤44일 최지현 등과 함께 붙들려 매맞아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하여, 훗날 구산 신자들이 그의 용덕을 기려

구산에 그의 의묘를 조성하였다.

 

김차희는 일가친척들과 함께 순교한 뒤 아들 김교문이 시신을 거두어

안양 수리산(현 안양시 안양 3)에 안장하였으나 실전(失傳)되고,

훗날 의묘(擬墓)가 구산에 만들어졌다.

 

김윤희의 시신은 찾지 못하여, 지금은 의묘가 남아있다.

    

성당 외벽-01-01.jpg

                                                                          <성당 외벽-01>

 

성지로 옮겨진 구산성당은 너무 낡아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는 어려웠던 듯하다.

외벽은 전돌로 다시 쌓았고, 내벽은 벽돌로,

마루도 새로 깔았고, 대부분 새로운 자재로 바뀌어서

고즈넉하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마을 뒷산이 거북 형상을 닮았다 하여

거북 구()자와 뫼 산()자를 써서 구산이라고 불리는데

<하남시 홈페이지>

온통 아파트로 둘러싸여 산 자체가 없어진지 오랜 것 같다.

    

옮겨진 성전 - 01-01.jpg                                                              <옮겨진 성전 - 01>

 

성지도, ‘구산성지가 이랬던가?’ 할 정도로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성지 조성이 이제 새로 시작된 만큼, 중지를 모으면

도심 속의 성지로서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모자 상 - 01-01.jpg

                                                            <성모자 상-01>

 

성지 입구에는 아름다운 성모자 상이 모셔져 있다.

구산성당 초대 신부(1979-1984)인 길홍균(이냐시오 1931-1988) 신부가

꿈속에서 알현한 성모님의 모습을,

당시 서울대학교 미대학장 김세중(프란치스꼬) 화백에게 의뢰,

김 화백이 마지막 작품으로 심혈을 기울여 조각하였다.

왕관을 쓰고 오른 손에 지시봉을 든 특별한 모습의 성모님은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마리아"로서

가정과 온 인류의 평화를 전구하고 계신다.

    

 

 

  • 구달 2017.09.07 02:36
    잘 읽었습니다.
    신앙은 참으로 오묘한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