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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良貨)가 악화(惡貨)에게 구축(驅逐)되지 않으려면.

2015. 8. 18.

 

영국 왕 헨리 8세(1491 ~ 1547)는 세금을 올리지 않고 세수를 늘리기 위하여

100% 순은 대신 은이 40%만 들어간 새 돈을 만들어 유통시켰습니다.

그러자 시민들은 순은은 집에 감춰두고 가치가 떨어지는 새 은전만 쓰게 됐습니다.

헨리 8세와, 유명한 ‘천일의 앤’ 사이에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33 ~ 1603)은

이런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 재정전문가인 토머스 그레샴(1519–1579)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그레샴은 균일 통화 정책을 건의하면서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고 말했습니다.

가치가 있는 돈은 자취를 감추고, 모자라는 돈만이 통용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오늘날 ‘그레샴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만

사실 그런 논리는 예전부터 많이 있어왔습니다.

지동설(地動說)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도 같은 이론을 주장해서

‘코페르니쿠스의 법칙’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리스의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BC 405년에 상연된 그의 희극 ‘개구리들’에서

순금과 순은이 숨어버리고 구리만이 횡행하는 세상을 비웃으면서

사람도 이와 같아서, 올바르고 점잖은 사람들은 나서지 않고

시원치 않은 이들이 세상을 주무른다고 통탄했습니다.

<위키 백과>

 

같은 의미의 우화(寓話)가 구약성경에도 등장합니다.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우자

요탐이 큰 소리로 우화를 말합니다.

  8 나무들이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고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였네.

  9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0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1 무화과나무가 대답하였네. ‘이 달콤한 것, 이 맛있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2 그들은 포도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3 포도나무가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 이 포도주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하고 대답하였네.

14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5 가시나무가 대답하였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판관기 9,6-15)

 

올리브, 무화과, 포도나무처럼 향기롭고 맛있는 과일을 만들어 내는

좋은 나무들은 모두들 임금이 되기를 사양합니다.

높은 자리가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며

수많은 정적들에게 둘러싸여 제대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냥 제자리에서 자기 할 일이나 충실히 하겠다는 것입니다.

조정에서 아무리 불러도 절대로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던

꼿꼿한 우리 선배 선비들을 연상시킵니다.

 

나무들은 할 수 없이 별로 쓸모도 없고 열매도 못 맺는

가시나무를 임금으로 모십니다.

기고만장한 가시나무는 백성들을 모시고,

그들의 뜻에 따라 나라를 이끌어가려는 생각이 전혀 없이

'몸을 낮춰'  ‘내 그늘 아래’들어와 뭐든지 복종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 뛰어난 사람인

‘레바논의 향백나무’부터 없애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여러 사회 조직에서 윗사람이 필요한 경우,

특히 투표에 의해서 선출할 때 흔히 겪는 일입니다.

‘훌륭한 사람’ 보다는 ‘선거를 잘 하는 사람’이 뽑히기 쉽습니다.

그러니 정작 마땅한 인물은 점잖지 못한 선거판에 나서지 않고

‘가시나무’같은 이들 끼리 자리를 다투게 되니

바로 그레샴의 법칙대로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가톨릭, 아니면 다만 레지오의 간부선출에서는

이러한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선출직은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조직을 위해 봉사하는 자리임을 명심하여

스스로 그 자리를 맡겠다고 나서면 좋겠습니다.

 

자리를 꺼리는 커다란 이유 중 하나는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는’ 것입니다.

임금이 된 나무는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흔들어댄다면

어떻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자리든지 기회가 닿으면 기꺼이 맡고

나무들은 절대로 윗 나무를 흔들지 않는 풍토가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 KIMCHIE 2015.09.04 10:34
    그동안 좋은 글을 싣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 다음이 보이지 않네요. 궁금합니다. 혹시 단장을 그만두게 되었나요? 다른 주제의 글이라도 계속 보고싶네요. 기다립니다.
  • 한기호 2015.09.04 11:16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가 들키고 말았네요. 단장 임기 3년을 마치고, 억지로 새 단장을 뽑아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졸문을 150 여편 쓰느라고 스트레스도 많았고, 주회와 월례회에 개근하느라고 긴 여행도 못 했습니다. 우선 평단원으로서 좀 편하게 지내면서, 작은 힘을 보탤 봉사처를 찾겠습니다. 읽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조삼현 2015.09.04 18:12
    지금에야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는데 원고료도 못받지만 우리 마음의 양식과 정신수양을 위하여
    달필을 계속 부탁드립니다.
  • 未平 2015.09.05 06:18
    맛난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설마 형의 글이 '단장'의 所産은 아니겠지요?
    앞으로도 읽을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