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2304 추천 수 0 댓글 0

 

 

7. 서 루도비꼬 성인의 하우현 성지

 

분당구 운중동에서 의왕시 청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하우현(下牛峴)이다.

왜 하우현으로 이름 지었는지 알아내려고 애썼으나 아직 정설을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하우고개들의 유래에서 그 뜻을 짐작할 수는 있다.

 

- 고개가 길고 경사가 급하여, 넘을 때 숨이 차서 "하우" 하고 넘었대서 하우현이 되었다.

<황해도 황주군 운성리 하우고개 - 조선향토대백과>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하고개 - 한국지명유래집>

 

- 외설스러운 유래도 있다.

옹기장수 남자와 자리장수 여자가 고개를 넘는데, 남자가 자꾸 치근덕거리자

여자가 자리를 깔면서 그럼 하우라고 말했다 하여 하우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횡성군 공근면 도곡리 -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믿기지 않는 얘기 같지만, 이웃인 판교에 달래고개가 있는 것을 보면

운중동에도 그런 고개쯤 있을 것 같기도 하다.

 

- ()과 관련된 것.

고개가 험하고 높아서, 학처럼 날아서 넘었으면 하여 학고개.

<황해도 연산군 하우고개 - 조선향토대백과>

 

소나무가 무성하여 학이 많이 깃든 고개.

<경기도 파주시 야당동(野塘洞) - 두산백과>

 

- 운중동에서 의왕시 청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운중동에서는 하오개, 하오고개,

   화의고개 등으로 불리고, 의왕시에서는 학고개, 학현(鶴峴)이라 부른다.

   의왕시 청계동 점말에 있었던 김해김씨 종산이 풍수지리상 학이 거동하는 형국이며,

   인근 안동김씨 묘도 학의 혈에 해당하므로 학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한국지명유래집>

    

동양원지 비-02.jpg    

<하우현 성당 입구에 서 있는 동양원 터 비석>

    

 

하우고개를 동쪽으로 넘어가자마자 오른편에 하우현 성당이 있다.

조선 시대 동양원(東陽院 - 비석에 쓰여있는 이름. 한국지명유래집에는 洞陽院.)이라는

역원(驛院)이 있었던 곳이어서 지금도 원터라 불린다.

한자 이름조차 불명한 공무원 숙소이니, 동양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도 알 수 없다.

    

하우현성당-02.jpg 

<하우현 성당 - 왼쪽에 보이는 큰 나무는 튤립나무이다. 백합나무라고도 한다.

  56월에 녹색을 띤 노란색 꽃이 피고, 가지 끝에 지름 약 6cm의 튤립 같은 꽃이

  1개씩 달린다. 한국 중부 이남에서 관상용으로 심는다 - 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밖에 튤립나무를 본 일이 없다.> 

 

 

이 성당에서 보호자로 삼아 존경하는 주보성인(主保聖人 또는 수호성인 - 守護聖人)

성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Bernard Louis Beaulieu 우리 이름 서몰례-徐沒禮) 신부이다.

 

그는 1840108일 프랑스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Marie Desiree)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부친이 결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유복자로 태어나

모친에 의해 성모님께 봉헌된 볼리외 루도비꼬(Ludovicus Beaulieu)

여섯 살에 공민학교에 들어갔고, 일곱 살부터 복사를 하였으며,

아홉 살이 되던 184910월에 고향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에 그는 중국 사천(四川)에서 전교한 경험이 있는 한 선교사 신부로부터

중국에 관한 얘기를 듣고는 동양 전교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1857년에 보르도 대신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에 모친을 여읜 후

전교를 향한 그의 마음은 더욱 열렬해졌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64521일 사제 서품을 받고, 같은 해 615일 조선 전교 신부로 임명되었다.

한 달 뒤인 715일 파리를 출발, 도리(Dorie ) 신부,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 신부,

위앵(Huin ) 신부와 함께 1865527일 조선의 내포 지방에 도착하였다.

 

서 루도비꼬 성인-01.jpg

<서 루도비꼬 성인>

 

이 해 6월 경기도 광주 뫼논리(山畓里. 판교의 운중동이 윗뫼논리, 산운동이 아랫 뫼논리)의 

교우촌에서 사목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장제철이라는 교우 집에서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때 배교자 이선이가 볼리외 신부가 뫼논리에 살고 있다고 토설하였기 때문에

장제철의 집을 떠나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하우현성당 뒤 청계산 국사봉 남쪽 능선의 정상 바로 아래 있는 동굴에 은신하였다.

    

루도비꼬 동굴-02.jpg

<루도비꼬 성지 동굴 - 한국학 중앙연구소 옆에 굴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1866227일 도리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37일 베르뇌 주교와 도리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 동료들과 함께

새남터 형장에서 희광이의 칼을 맞고 순교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시신은 용산 외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0910일 명동대성당에 모셔졌다.

 

196810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5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두산백과>

    

사제관-01.jpg

<사제관(司祭館) : 하우현 성당은 19세기 초부터 천주교인의 피난처로서

  교우촌을 이루어 1893년에 공소가 되었다. 1894년 초가로 된 목조 강당 10칸을 지었고,

  1900년에 본당으로 분리 독립하여 사제관을 새로 지었다.

  현존 건물은 1965년에 복원한 것이다.

  몸체는 석조이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팔작지붕 집으로 된 절충식 건물이다.

  20세기 초 성당 사제관에 한양절충식 건축이 채택된 것은 드문 경우이다.

  평면 및 구조·의장 등이 갖는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경기도기념물 제176-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