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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최초의 신부를 영입한 선구자들을 기리는 어농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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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기독교 최초의 신자들인 이 벽 권일신 이승훈 등은

중국에서 들여온 책을 읽고는, 그들이 해석한대로 천주교를 믿고,

상상을 바탕으로 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자기들 중에서 신부를 지명하여 미사를 집전케 하고,

책에 쓰여 있는 고해성사를 받게 했다. <가성직제도 假聖職制度>

그러나 교리 공부를 계속하면서, 자신들의 행위가 과연 천주교 제도에 합치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청나라 북경에 있는 주교를 만나 유권해석을 받아내기 위하여

윤유일(尹有一)을 대표로 뽑아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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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유일 바오로 복자>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의 집안은 동생 윤유오(尹有五 야고보)와 사촌동생들인 윤점혜(아가타)

윤운혜(루치아)1801년 신유박해 때 희생된, 순교의 피로 이어졌다.

 

양근에서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윤유일은

스승의 아우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다.

 

1789년 교회 지도층이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낼 때,

선발된 이가 바로 윤유일 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이 온순하면서도

심지가 굳고 학식이 있으며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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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 묘소>

윤유일은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서한을 옷 안에 숨긴 후

178910월 북경에 도착하였고, 이듬해 초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윤유일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오(N. J. Raux, ) 신부로부터

조건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때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어농성지 홈페이지>

 

윤유일 바오로의 보고를 받은 조선교회는 가성직 제도를 해체하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시작하여,

1790년 윤 바오로는 다시 밀사로 북경에 가서 사제 파견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1792년 한 차례 더 밀사로 다녀온 뒤,

1794년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할 때

지 황(池 潢)과 함께 안내를 맡아 서울로 잠입시켰다.

 

1767년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난 지 황은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1793년 지 황은 박 요한과 함께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떠났다.

 북경에서 견진을 받은 지 황 사바는 1794년 초 한국으로 발령 받은 주문모 신부와

따로 국경에 가서 상봉하였으나 입국에 실패하고 헤어져 귀국했다.

마침내 그해 1224(음력 123) 밤 주 신부를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윤유일과 함께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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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최인길 마티아>

 

1765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이 벽 세례자요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의 동생 최인철(이냐시오)1801년 희생된 순교 가정이다.

그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가담, 선교사 은신처 준비 임무를 맡아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사 일행을 기다렸다.

 

마침내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신부는 최인길의 집에 도착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한 밀고자에 의해 신부의 정체가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주 신부는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 나와 여회장 강완숙(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했다.

최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 출신으로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속임수는 오래 가지 못해 그의 신분이 드러났고,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면서 윤유일과 지 황도 체포되었다.

1795628(음력 512) 셋은 포도청에서 매 맞아 순교했다.

그들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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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 동산>

 

어농성지는 1795년 을묘박해로 순교한 세 분을 현양하기 위하여 조성된 성지이다.

또한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17명의 복자를 모시고 있다.

이들은 20148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로 시복된

124위 중 어농과 연관이 있는 분들이다.

 

이분들의 성함은 이렇다.

윤유일 바오로 (17601795)

최인길 마티아 (17651795) - 최인철 이냐시오(1801 순교, 복자)의 형.

지 황 사바 (17671795)

주문모 야고보 신부 (17521801)

윤유오 야고보 ( ? 1801) - 윤유일의 동생.

윤운혜 루치아 ( ? 1801) - 윤유일의 4촌 동생, 윤점혜 동생.

정광수 바르나바 ( ? 1802) - 윤운혜 남편, 정순매 바르바라 오빠.

윤점혜 아가타 ( ? 1801) - 윤유일의 4촌 동생, 윤운혜 언니.

강완숙 골룸바 (17611801) - 홍필주(필립보)의 어머니.

조용삼 베드로 ( ?1801)

최창주 마르첼리노(17491801) -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바르바라)의 아버지.

이중배 마르티노 ( ?1801) - 원경도 4촌 형.

원경도 요한 (17741801) - 최창주 사위. 이중배 4촌 동생.

심아기 바르바라 (17831801)

정순매 바르바라 (17771801) - 정광수 동생.

홍필주 필립보 (17741801) - 강완숙 골룸바 아들.

한덕운 토마스 (17521802)

 

어농리(於農里)

어농리의 옛 이름은 어능동리(於陵洞里)이었다.

100년 전에 어느 도승이 와서 좌결(座訣)을 하다가

()이 승천한 자리는 농사를 지으면 부귀영화를 누린다하여

늘 농사를 짓는 다는 뜻으로 늘 어()자와 농사 농()자를 따서

어농리(於農里)”라 칭했다고 전해진다.

<모가면(暮加面) 홈페이지>

 

어농성지(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 62번길 148,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3322-4)

1987년 김남수 안젤로 주교에 의해 축복된 성지이다.

20028, 수원교구장 최덕기 바오로 주교에 의해

을묘,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선조들을 기리고

   현양하기 위한 기념성지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