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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쉬운 가톨릭 안내 - 015   교황 요한 23세

교황이 뉴욕 공항에 도착하니 리무진이 마중 나와 있었다.
교황은 그 멋진 차를 둘러보고는 운전사에게 말했다.
“여보게, 나는 이렇게 멋진 차는 처음 보네. 내가 이 차를 몰면 안 될까?”
운전사가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할 수는 없겠네요.’

그러나 교황은 단념하지 않고 계속 졸라댔다.
“제발 내가 한번 운전하게 해 주지.”
운전사가 마침내 항복했다.
‘제가 어떻게 교황님에게 No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운전대를 잡은 교황은 신이 나서 악셀을 밟아 제꼈다.
45 마일 구간에서 리무진은 1백 마일을 넘어 질주했다.
길에 서 있던 백차가 이를 보고 싸이렌을 울리며 쫓아와 차를 세웠다.
창문이 내려져 교황을 발견한 경찰은 깜짝 놀라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는,
‘잠깐 그대로 서 계세요.’ 하곤 백차로 가서 경찰서장에게 무전을 걸었다.

순경 :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서장 : 무슨 문제 ?  
순경 : 속도위반 차량을 붙잡았는데, 굉장한 분이 타고 계십니다.
서장 : 뭐, 굉장한 사람 ? 시장님과 비슷하게 높은 사람이냐 ?
순경 : 더 높은 분입니다.
서장 : 그럼, 주지사만큼 높으냐 ?
순경 : 더 높은데요.
서장 : 아니 그러면 대통령만큼 귀하신 분이란 말이야 ?
순경 : 대통령보다 더 높으신가 봐요.
서장 : 야 임마, 뭘 하는 사람이 대통령보다 더 높아 ?
순경 : 뭐하는 분인진 모르겠는데요, 아 글쎄 교황님을 운전사로 쓰고 계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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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가톨릭교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매우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교회의 대변혁을 이룩한 이 공의회를 들여다 보려면 먼저 이를 소집한 요한 23세 교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58년 10월 9일 교황 비오 12세가 서거하자 콘클라베(conclave 교황 선출을 위한 비밀회의)가
소집되어 베네치아 대주교 추기경인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가 교황으로 피선,
그 해 11월 4일에 제 261대 로마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오타비아니 추기경과 타르디니 추기경으로 대표되는 보수세력과
개혁성향 추기경들의 대립이 격렬했다.
12번이라는 오랜 투표 끝에 의외의 인물로 여겨지던 안젤로 추기경이 교황으로 뽑혔다.
77세의 고령으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누가 보아도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탄생한
과도기 교황이었다.

본인도 피선 직후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황들은 언제나 단명이었습니다" 라고  말하여
교황직에 오래 있지 않을 것을 예감한 그는, 짧은 임기를 오히려 하느님이 선사한 소명으로 알고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59년, 요한 23세는 교황에 착좌한지 석달만에 전격적으로 세계공의회의 소집을 공포했다.
전 세계 교회 안팎의 놀라움은 컸다. 가톨릭 2000년 역사에 그때까지 모두 20번의 세계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공의회가 개최되기 위해서는 이단의 출현이나 중대한 사안이 있어야 했으므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의회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비오 9세(1846-1878) 이후 교황들은 100년 동안 과거의 권위를 지키려는 '방어정책'으로
일관하였고, 그 결과는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대량 교회 이탈로 이어지게 되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를, 개혁없이는 교회가 망한다는 절박한 상황으로 판단했다.

그 이전의 교황들이 풍기는 이미지는 폐쇄적이고 비밀스럽고 보수적인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 첫 번째가 '군주이미지'였다.
하지만 요한 23세는 서민적이고 개방적이었다. 전임교황들이 주로 귀족출신이었던데 비해
가난한 농부 집안 출신의 요한23세는 천성이 서민적이고 소탈했다.
요한 23세의 이러한 검소함과 겸손함은 귀족적이고 권위적인 비오 12세와는 무척이나
대조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집안의 출신임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교황의 사명을 대폭 주교들에게 위임하였다. 교회는 다양한 문화에 적응해야 하고
현지인에 의한 교계제도가 설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회도 예배의식의 토착화와 간소화에 박차를 가했다.
라틴어로 진행되던 미사 등 모든 의식에서 우리말 사용을 확대했고,
개신교단과의 협력을 통해  ‘공동번역 성서’를 간행하기도 했다.
또 사목위원회를 조직하여 평신도가 교회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했고,
제사를 인정함으로서 유교적 전통을 버리지 않고도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모토 '현대세계에로의 적응(Aggiornamento)'이 이루어진 것이다.

요한 23세는 개인적 삶에서도 소박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신자들은 물론 일반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를 즐겼다. 베드로 대성당이라는 거룩한 공간에서 벗어나 공장과 양로원과 감옥 등을
찾아다니며 평소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래서 그는 ‘걸어다니는 요한’ 이라는 의미에서 ‘조니 워커’ (Johnnie Walker)라는
별명을 얻었다.

1963년 6월 3일 선종함으로서, 예언대로 5년간의 짧은 재임을 마쳤으나,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교회쇄신과 현대에의 과감한 적응을
이루었으며, 1963년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발표, 세계평화, 빈부격차문제, 노동문제 등
현대 인류사회의 여러 가지 현안 해결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馬丁>
  • 구달 2010.05.23 09:23
    가톨릭 교직자들도 이제 연노하면 깨끗이 정년퇴직을 하는 문화가 이루어져야 할텐데.. 언제나 바뀌려는지.. 옛 군주시대의 유물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니 교회는 하루하루 더 현실에의 적응에서 멀어져갈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