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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모순은 우리가 스스로 해결해야

2014. 11. 11.

 


 

사람이 사람을 ‘포획’하여서 가축처럼 부리고, 그들을 물건처럼 사고팔고,

소유주와 그들과의 사이에 낳은 아이들이나, 혹은 그들 간에 낳은 아이들은

다시 가축 신세가 되고 가족과 헤어져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

노예제도에 대한 얘기들을 지금 읽으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끔찍한 짓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아주 오래 전 인류가 생긴 즈음부터

세상 어느 곳에서나 당연히 시행돼 왔습니다.

세계적으로 노예 또는 종이 없어진 것은 불과 2백여 년 전 부터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노예제도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넘치는 이 좋은 말씀에

어떻게 노예 종 하인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지 의문입니다.

왜 하느님은 이러한 나쁜 관습을 그대로 방치해 두셨으며

예수님은 어찌하여 노예해방을 주창하지 않으셨을까요?


 

‘종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현세의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순종하십시오.’ (콜로새서 3,22)

등 여러 곳에서 노예제도를 굳건하게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 아래서 바오로 사도는 대단한 폭발력을 가진

편지를 보냅니다.

 

10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1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필레몬서 7,)

 


자기 종을 ‘사랑하는 형제’, ‘동지’로 맞아달라니

얼마나 당황스러운 부탁입니까?

오네시모스 뿐만 아니라, 다른 종들도 세례를 받으면

형제 동지가 될 터이니 결국 노예제도가 없어지는

엄청난 혁명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잣대로 보자면 참으로 통쾌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가난한 자, 약자, 소외된 자들을 돌보라는 사상을

기조로 하고 있으면서도, 노예제도 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 강자에게 굽히라는 대목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정복자인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라는 말씀도 그렇고,

‘신자들에게 상기시켜, 통치자들과 집권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모든 선행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십시오.’(티토서 3,1) 도 그렇습니다.

 


노예제도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모두 다

그 제도의 옳음과 그름의 근거를 성경에 두고 있는 바와 같이

위정자들도 국민에게 순종을 강요할 근거를 제공해 줍니다.

 


이러한 옳지 못한 사회제도가 당시에는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예수님께서 이를 적극적으로 교정하지 않은 이유가,

제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왕국’을 선포하러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지,

‘지상 왕국’의 모순을 직접 해결하러 오시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보이듯,

세상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는 개입을 최소화 하려고 하셨습니다.

식민지 제도라든지, 전쟁, 등등.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너무 속박하지 않으시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들에게 지혜를 주시어 나쁜 제도나 관습을

개선하고 제거하도록 돌보시지 않습니까?

 


오늘날에도 있어서는 안 될 사회적 정치적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시정 조치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라는 지침을 주신 것으로

해석함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